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63화 (163/510)
  • 00163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  *  *

    “그래봤자 합스부르크는 거진 망했습니다.”

    나는 라우라의 맨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국토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린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황녀가 신도 아니고 말입니다. 간당간당하게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 버티다 못해 생명줄이 끊어지겠지요. 마왕군에 의해서든, 인간군에 의해서든…….”

    결국 나의 월맹군 원정은 성공했다. 인류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 엘리자베트 황녀의 팔다리를 끊어냈다.

    더 나아가 마왕들 사이의 분열이 드디어 겉면으로 명백하게 드러났다. 평원파를 멸살하기 위하여 파이몬이 계략을 꾸몄고, 마지막 전투에 앞서서 바르바토스를 제외하고 마왕들이 추격을 포기했다. 여기에다 지옥대공들의 배반까지. 멋진 난장판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입니다, 라우라.”

    “으음.”

    라우라가 신음했다.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귀여워라.

    “저는 이제 시간을 벌었습니다. 대륙은 이제 사분오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목상으로나마 단결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하나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인간군이다.”

    라우라가 바로 대답했다.

    “합스부르크를 제외하고 여타 국가들은 여전히 하나의 깃발 아래 뭉쳐 있다. 주군이 비록 연설전에서 귀족과 평민의 분열을 꾀했다 하더라도, 아직 그 분열이 군대를 벗어나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진 않았다.”

    “오오.”

    “인간군이 합스부르크 일대에서 전전하는 이유도 그것이겠지. 병사들의 단합력을 다시 이끌어올리기 위하여, 혹은 예비 반란분자인 병사의 숫자를 아예 줄어들이기 위해서.”

    “맞습니다. 맞아요.”

    내가 손뼉을 쳤다. 정답이었다. 과연 라우라는 군사에 관련해서는 척척박사였다.

    “혁명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흑사병과 흉년이 겹쳤습니다. 여기에 제가 연설전에서 독을 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지막 한 방이 부족해요.”

    아직도 겉으로나마 연합하고 있는 인간의 국가들을 완벽하게 해체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마인을 위한 대륙 정벌이라든지, 마왕에 맞서서 단합하는 인류 전체라든지, 그딴 대의명분은 싸그리 죽어야 마땅하다.

    오로지 자기 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그처럼 세력들은 아주 이기적이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두 가지 대전략을 수행할 겁니다.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까?”

    “…….”

    라우라가 머뭇거렸다. 나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일 분을 넘게 끙끙거리다가 항복했다.

    “모, 모르겠다.”

    “예에. 다음 차례 들어갑니다―.”

    라우라의 엉덩이에 구슬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라우라가 히끅! 하고 기묘하게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두 가지 질문 전부 대답하지 못했으니까 추가로 하나 더.”

    “자, 잠깐만? 주군. 그건 조금 이상한 계산법……하끄읏!”

    라우라가 온몸을 떨어댔다. 음. 실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가 나체로 내 품에 안겨서 몸을 떠는 것은 나에게 지극한 만족을 안겨주었다. 딱히 성욕이 치솟는다기보다 소녀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뭔가를 두려워하고, 신음을 내뱉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과 같이 아름다웠다. 요컨대 나는 변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의 예술작품을 구경하는 관객……그렇다. 마치 전시회를 전전하는 한 명의 댄디한 파리지엥에 불과했다.

    그러고보니 새롭게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 중에 <고문 슬라임>이 있었다. 그걸 조금 재밌게 활용할 수 없을까? 흐음. 슬라임에 찐득찐득하게 능욕당하는 라우라, 금발의 미소녀……먹힌다. 이건 먹인다. 파리의 신사들도 감격하여 기립박수를 칠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적극적으로 고려해보자.

    “뭐, 그건 차근차근하게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라우라도 언제까지나 정치에 무관심해서야 안 됩니다. 군사는 결국 정치의 일환이라구요? 노력해주세요.”

    “으으……알겠다.”

    두 가지 대전략 중에 첫 번째.

    그것은 물론 지금까지 마계의 지옥들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게 된 목적, 즉 마왕성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곧 있으면 대공들이 후원금――이라고 읽고 자진납세라 부른다――을 잔뜩 보내올 것이었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  *  *

    보름 뒤.

    라피스가 대공들의 후원금과 함께 건축기사를 데려왔다.

    마계에서 건축업은 고블린과 난장이가 꽉 잡고 있었다. 다른 종족은 발도 들여다 놓지 못할 정도로 건축업계는 폐쇄적이었다. 대체로 난장이가 지분의 7할, 고블린이 지분의 3할을 차지했는데, 나는 일부러 각 업계의 대표자들을 불러모으게 되었다.

    원래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가장 잘 나가는 업계한테 맡겨버리려고 했다. 십 년은 계속될 대사업이지 않은가. 당연히 신뢰할 만한 업계에 맡겨야 했다.

    그런데, 난장이족에서 운영하는 <붉은 대리석 건축소>에 문의를 넣었더니 엄청나게 큰 금액을 요구해왔다. 나는 견적서를 읽으면서 침음을 흘렸다.

    “으음. 아무리 적어도 이천만 골드가 소모된다라.”

    곤란했다.

    대공들에게 전부 뜯어낸 금액, 여기에 앞으로 뜯어낼 금액을 다 합쳐야 아슬아슬하게 이천만 골드가 모인다. 어차피 사기로 뜯어낸 금액. 공짜로 던전 하나를 으리으리하게 짓는다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지만…….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붉은 대리석 건축소>에 의뢰하자.”

    하지만 라피스가 강하게 반발했다.

    “제정신입니까, 단탈리안 님? 한 군데에만 견적서를 넣으면 당연히 바가지를 씌우겠지요.”

    “응? 어? 그런 거야?”

    “그런 겁니다.”

    라피스가 단언했다. 내가 어수룩하게 대답하니까 라피스는 무언가 용납하지 못할 장면을 보기라도 한 듯이 분노했다.

    “업자들이 부르는 값에 그저 순응하면 안 됩니다. 먼저 이쪽에서 예산안을 제시해둡니다. 이 예산안을 모든 업자들한테 돌려서, 자신들이라면 어떻게 예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제안해오라고 명령합니다.”

    “어, 어?”

    “저쪽은 어차피 돈을 버는 게 목적입니다. 서로 경쟁시켜서 조금이라도 값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상업의 기초적인 기술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 그럼 건축 예산이랑 업체 선정에 대해서는 라피스한테 맡길게.”

    “모쪼록. 게다가 이제 단탈리안 님은 어마어마한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라피스의 눈이 무섭게 반짝거렸다.

    잔소리가 시작될 때 어김없이 반짝거리는 바로 그 눈짓이었다.

    “단순 자산만 천사백만 골드. 시트리 님한테서 곧 도착할 현금이 약 백만 골드. 여기에 대공들이 추후로 지원할 금액이 오백만. 무려 약 이천만 골드를 최종적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단탈리안 님은 지금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자금을 운영했습니다만, 더 이상 그런 조잡한 방법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조잡하다니…….”

    라피스는 가끔 단어를 선택하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나에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난 지금까지 가계기록부도 한번 써본 적이 없었다. 상업이니 금융이니 하는 것과 인연이 없이 살았다.

    “갑작스레 자금 운용의 방식을 정교하게 만들라고 해도.”

    “거기에다가.”

    라피스가 말허리를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단탈리안 님은 올해부터 마왕성 근처의 마을들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세금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세금출납부터 체계화시켜야 합니다.”

    “체, 체계화?”

    “마을 촌로들로부터 세금출납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합니다. 지주들에게도 마을의 소작인을 관리하도록 의무를 지웁니다.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창고도 신경써야 합니다. 기본입니다.”

    “…….”

    네. 무척이나 복잡한 문제가 산재했다는 것은 알아들었습니다.

    “그, 그럼 마을 관리도 라피스 너한테 일임할게.”

    “제정신이십니까?”

    ─ 쿠웅!

    우와아.

    방금 내 말이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라피스, 자그마치 라피스가 두 손으로 탁자를 쳤다! 쿵, 하고 크게 쳤다. 언제 어느 때고 냉정하고 침착함이 상징이었던 라피스……심지어 지옥에서 암살자들이 마차를 습격했을 때조차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탁자를 두 손으로 쿵 쳤다!

    “미……미안.”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몸이 쭈그러들었다. 라피스 앞에만 서면 안 그래도 조심스러워지는데 저렇게 화까지 내니 마치 친척들한테 혼날 때처럼 마냥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영주는 어디까지나 단탈리안 님입니다. 저는 반쯤 단탈리안 님의 가신(家臣)이 되었으나 여전히 쿤쿠스카 상회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영주의 업무를 일제히 맡기다니, 도저히 책임감 있는 영주의 발언이라 볼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영지 업무는 제가 혼자 맡을 수 있을 만큼 손쉬운 물건이 아닙니다. 관리를 등용하세요. 가신단을 가꾸세요. 애당초, 단탈리안 님에게 제대로 된 가신이라고는 라우라 양밖에 없습니다.”

    “음?”

    구석에서 호밀빵을 깨작이며 먹고 있던 라우라가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이쪽을 바라보았다. 양쪽 볼이 빵으로 가득차서 볼록하게 불어올랐다. 꼭 햄스터 같아서 귀엽기 그지없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귀엽건 지금의 상황에서 나한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래요. 라우라 양. 당신도 여기로 오십시오.”

    “소, 소녀 말인가?”

    라우라가 라피스와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을까. 라우라가 모기처럼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다시피 소녀는 참을 먹고 있다만…….”

    “먹으면서 들으세요.”

    “아, 알겠다.”

    라우라가 쪼르륵 달려왔다. 그녀와 나는 둘이서 탁자에 앉아 고개를 푸욱 숙였다. 마치 어머니에게 혼나는 오빠와 여동생 그 모습 그대로였다.

    라피스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보십시오. 대륙에 위명을 떨치시고 마계에 위엄을 세우신 마왕, 그게 단탈리안 님입니다. 그런 단탈리안 님께 가신단이 고작 한 명. 그것도 말이 가신이지 사실상 군사 업무밖에 담당하지 못합니다. 평소에는 애첩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극히 비정상적입니다.”

    “미안…….”

    “죄송하다…….”

    라우라와 내가 사과했다. 왠지 모르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세력이 커졌으면 마땅히 격에 어울리는 가신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왕성을 증축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누가 마왕성을 관리합니까? 주변 마을을 영지로 삼은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누가 마을들을 관리할 것입니까? 세력의 덩치만 커진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항상 중요한 것은 내실입니다. 당연합니다.”

    “미안해…….”

    “죄송합니다…….”

    라우라의 말투가 존칭으로 바뀌었다. 주군인 나한테도 반말 쓰는데…….

    “지금 단탈리안 님께 필요한 것은 깔끔하고 명확한 관리 체계입니다. 세금출납서, 영주의 명령서, 법령실행서, 방문(榜文), 포고령, 외교문서, 이것들의 문체와 형식을 전부 통일해둡니다. 아니. 생각해보니 단탈리안 님은 율법을 만들지도 않았군요.”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화나기 이전에 어이가 상실되었다. 그런 느낌의 한숨이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신 겁니까, 라우라 양? 당신은 단탈리안 님의 제1신하. 가신필두입니다. 주군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여 보완하는 것이 보좌관의 역할이겠지요.”

    “죄, 죄송합니다…….”

    라우라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라우라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마음이 푹푹 찔렸다. 라피스는 라우라를 책망함으로써 사실상 바로 옆의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단탈리안 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바를 기본적인 구조로 삼은 다음, 실제로 마을들에서 어떤 관습들이 있는지, 그 관습들이 어떻게 영지민들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지, 모두 조사하여 율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기.”

    내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라우라만 혼나서야 너무 불쌍해서 조금이라도 어그로를 끌어보기 위함이었다.

    “예, 단탈리안 님. 말씀하세요.”

    “왜 굳이 율법을 만들어야 돼? 관습법으로 알아서 돌아가게 만들고, 문제가 생길 때만 내가 개입하면 되는 거 아니야?”

    “단탈리안 님이 영주로서 재판권을 독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답이었다.

    “관습법은 말 그대로 관습법. 문제가 생길 때 영지민들이 자기네가 해오던 바대로 처리합니다. 실상을 들여보면 영지민들에게 재판권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야 한 영지에 재판관이 두 개 있는 것입니다. 관습은 충분히 존중하되, 재판권은 어디까지나 영주의 소관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첫 걸음입니다.”

    실로 옳으신 말씀이었다.

    라피스 님께서 재차 한숨을 쉬셨다.

    “어쩔 수 없습니다. 차근차근하게 하나씩 실행하지요. 단탈리안 님, 언제까지나 정치에 무관심해서야 안 됩니다. 모략도 결국은 정치의 일환입니다. 부디 노력해주세요.”

    “으응……노력할게.”

    “열심히 주군을 보좌하겠습니다…….”

    나와 라우라는 고개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어쩌겠는가.

    결국 슬프게도 우리 세력의 상관관계가 몬스터들 < 라우라 < 나 < 라피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나저나 관리를 새롭게 등용한다라.

    ‘흐음.’

    <던전 어택>에는 물론 유능한 인재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나는 라우라만 콕 집어서 등용했다. 여태까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충분했고.

    하지만, 그렇다. 라피스가 옳게 지적했다. 가신단을 확충할 필요가 생겼다. 누구를 끌어들일지 지금부터 고민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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