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59화 (159/510)

00159 폭군의 시대  =========================================================================

닷새 후, 군단들이 합스부르크 제도에 도달했다.

“…….”

드높은 성문을 지나치면서 마왕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 처음으로 합스부르크의 수도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보다 영광스럽고, 보다 환희에 가득 찬 승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시커먼 연기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짐승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화염이 남기고 간 탄내가 콧구멍 깊이 찔러 들어왔다. 마왕들은 검게 타버린 땅바닥에 대충 군진을 차렸다. 바르바토스는 허망하게 수도의 풍경을 둘러보다가, 무언가 깨닫고 눈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다른 마왕들한테 서둘러 말했다.

“이건 계획적으로 퇴각한 거야. 젠장.”

“계획적으로 퇴각했다니이?”

가미긴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는 수도에 돌입한 이후 줄곧 비단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있었다. 그 탓에 목소리가 맹맹하게 울렸다.

“제5차 월맹군 기억하나? 아가레스. 네 년이 모스크바 왕국 방면을 맡았잖아.”

“그때는 모스크바 왕국이 아니라 키예프 왕국이었지만.”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불쾌한 듯 입끝을 이죽거렸다.

“왜 갑자기 남의 안 좋은 추억을 건드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인간군은 청야전술을 써먹었어. 하필 또 겨울이었지. 네 년이 죽을 똥을 싸가면서 키예프에 도착했더니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잖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수도를 버렸다고?”

아가레스가 턱에 손을 괴었다. 언제나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던 그녀가 모처럼 진지해졌다. 바르바토스는 마왕들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봐봐. 황릉들이 전부 도굴되었잖아. 황궁은 아예 해체해서 들고 갔어. 수도를 옮기겠다는 의도이지. 시발,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당장 정예를 추려내서 추격해야 돼.”

“마지막 기회라니?”

마르바스가 반문했다.

“무슨 뜻인가, 바르바토스.”

“자그마치 수도를 들였다가 딴곳으로 옮기고 있는 거야, 제국놈들은. 백성들이 예 알겠습니다 옮기라면 옮깁지요, 하고 얌전히 따랐겠어? 존나 강제로 철거시켰을 게 분명해.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겠지!”

바르바토스가 흥분했다.

“그런 백성을 다독이면서 후퇴하고 있는 거야. 움직이는 속도가 굼벵이 엉덩이 수준일걸. 지금이야말로 제국이 무너질 순간이지. 추격해서 놈들의 뒤꼬랑지를 조져버리면 합스부르크 전역이 우리의 영토가 된다! 자아. 동지들. 깃발을 들어올려 당장 공격하자!”

그녀가 어때, 하고 마왕들을 쳐다보았다.

“…….”

“…….”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뭐야?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아? 그럼 말을 해.”

“바르바토스. 제2군단은 합스부르크의 수도를 점령했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마르바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고의 전술은 무혈입성이다.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륙 중앙부에서 가장 명망 높은 도시를 점령했다. 이 이상으로 쓸데없이 전투를 자초할 필요가 있겠는가.”

“으응. 나도 마찬가지인걸.”

가미긴이 동조했다.

“보니까 이거, 인간군의 수뇌부가 백성을 등졌다는 소리잖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는 편이 심리적으로 우리한테 유리해지지 않을까아?”

여타 마왕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이, 친애하는 동지들. 무슨 소리야?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거 아닌가 싶은데. 다시 한번 말해줄게. 지금 우리가 합심해서 쫓아가면 합스부르크 제국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놈들은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고, 게다가 거추장스러운 백성들까지 덕지덕지 끌어안고 있어.”

“그거 말인데.”

아가레스가 피식 웃었다.

“제국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우리가 쫓아올 거라고 예상하지 않겠어? 응? 내 생각에는 우리한테 미끼를 던져두고 어서 물어주십쇼, 하고 광고하는 것 같은데. 일부러 미끼를 물어줄 의리 따위 없잖아.”

“……함정을 파놓았든 매복을 해놓았든 아무 상관없어, 아가레스.”

바르바토스가 분노를 목구멍 속으로 구겨넣으면서 간신히 말했다.

“중요한 건 두 가지뿐이야. 적은 약하고, 우리는 강해.”

“그러니까, 놈들이 비장의 한수를 숨기고 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

바르바토스는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마르바스, 아가레스, 가미긴, 월맹군의 수뇌부들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군이 함정을 설치해두었을 경우 압도적인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이었다. 그 사실을 여기 모인 마왕들이라고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마왕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즉 그들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너 이 년놈들――설마, 대륙을 정벌할 생각이 없는 거냐.”

마왕들은 제8차 월맹군이 대륙을 토벌하리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금발의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말했다.

“에에?”

마치 이상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네 쪽이라는 것처럼.

“월맹군 원정이 성공할 리가 없잖아.”

“…….”

“차암, 바르바토스도. 이상한 말을 한다니까.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령했으면 됐지, 뭘 또 욕심을 부려어? 그러다가 위장이 체해버릴 거야. 헤헤.”

아가레스가 이어서 말했다.

“차라리 잘됐네. 수도까지 버리면서 후퇴한 이상 합스부르크는 차마 반격할 만한 기력이 없을걸. 이대로 기수를 돌려서 제국의 남은 영토를 청소하면서 느긋하게 전리품이나 챙기겠어.”

“…….”

“본인의 제2군단은 원래 폴리투니아 왕국 방면을 맡았다. 바르바토스. 그대와 여기까지 함께 행동한 까닭은 검은 산맥을 돌파하지 않고도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후방을 염려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제2군단은 본래의 목적지로 향하겠다.”

하고 마르바스가 말했다.

“어차피 대륙 정벌은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작업이다. 굳이 한 번에 끝내려고 초조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바르바토스.”

“……초조해하지 말라고?”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까득 물었다.

“이 병신들이……지금 그게, 마왕 된 녀석들이 뱉어대는 소리야? 인간의 제국 하나를 멸망시킬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다. 우리의 사명은 인간을 멸종시키고 마인들에게 대륙을 선물하는 것이다. 네놈들은 그걸…….”

“아, 아. 그놈의 사명! 진짜 못해먹겠네.”

아가레스가 소리쳤다.

“그 잘난 사명은 너나 찾으세요, 꼰대 년아. 마인들 중에 진지하게 대륙 정벌을 외치는 새끼는 천 년 전에 다 뒈졌어. 이젠 네 년 주변에 있는 새끼들 빼고는 아무도 그딴 헛소리를 믿지 않아. 응? 알겠어? 우리는 그냥 우리를 따르는 마인들을 배불리 먹여줄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너……서열 제2위라는 년이, 어떻게.”

“미안. 바르바토스.”

가미긴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나도 굳이 피해를 보기는 싫어. 그야,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제국군을 괴멸시킬 수 있겠지만 말이야. 제국군도 지금 뒤치기 당하면 멸망할 거 빤히 아니까 어어엄청나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잖아. 헤헤. 그럼 지금까지 싸우는 척하면서 아낀 병력을 전부 잃어버리게 되거든!”

가미긴이 손수건으로 코를 풀었다.

“으응. 파이몬도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바르바토스, 네 평원파도 가장 적극적으로 싸우느라 병력을 꽤 잃었잖아. 나로서는 현재가 최고의 상태라고 할까―. 이보다 더 바랄 건 없을 정도로 기쁘다고 할까―. 헤헤.”

“…….”

“참. 그렇다고 해서 합스부르크 중북부를 너 혼자 다 차지해버리면 안 된다아? 병력을 아꼈다지만 아무렴 우리도 함께 싸웠는걸! 공명정대하게 영토를 배분해줄 거라 믿고 있어.”

바르바토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토 배분……?”

“응. 우리가 여태까지 뭘 위해서 바르바토스가 맡은 방면으로 군사를 움직여줬는데에.”

가미긴이 빙그레 웃었다.

“힘들었다고오, 언제 군량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했어. 응, 인간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우리한테 막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어느 군대였지? 튜튼 왕국? 우리 군단에는 걔네들이 따라붙었는데, 우리가 조금 나아가면 걔네도 조금 물러서고 그러지 뭐야. 헤헤. 걔네도 딱히 열심히 싸우긴 싫었나봐!”

실제로.

제8차 월맹군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싸운 군대는 정해져 있었다. 마왕군에서는 바르바토스가 이끄는 제6군단. 인간군에서는 엘리자베트 황녀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군.

제6군단은 올곧게 대륙 정벌을 위하여 분투했고,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자국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마왕군의 나머지 군단들은 애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움직였다. 즉, 마왕군 최대의 파벌인 산악파를 실각시키려고 움직였다. 그 목적이 달성된 이상에야 군사를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군의 나머지 군대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연설전으로 인하여 사기가 낮아진 가운데, 그들로서는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굳이 맞서싸울 이유가 없었다.

장병들의 사기를 다독일 겸해서 인간군은 합스부르크의 마을과 도시를 약탈했다. 청야전술이라는 명목 아래, 합스부르크를 지키기 위해 파병왔다는 명분 아래, 인간들은 같은 인간의 재산을 빼앗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약탈하지 않는다면 마왕군이 먹어치운다. 거리낄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해관계가 마왕군과 인간군 사이에 떨어맞았다.

정면에서 바르바토스와 엘리자베트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여타 마왕군과 인간군은 마치 미리 약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경계선을 존중했다. 이쪽은 마왕군이 약탈했다. 저쪽은 인간군이 약탈했다.

전투는 극히 드물게 발생했으며 그것도 소규모 전투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로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토에서 단물을 빼내는 데만 집중했다.

그나마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한 군대는 역설적이게도 산악파였다. 산악파는 동족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벗어던지기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 브르타뉴 왕국군을 전멸시키면서 산악파의 군대는 손상되었다……일부러 전투의 손해를 크게 부풀려서 광고한 것은 물론이었다.

“맞아. 우리한테도 정당하게 몫을 주장할 권리가 있지.”

아가레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뭐, 난 욕심이 그렇게 크지 않아. 적당히 공국(公國) 크기만한 영토만 떼어줘. 합스부르크 수도는 바르바토스 네가 가져도 돼. 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자비롭단 말이지.”

“아. 난 웬만하면 검은 산맥 부근이 좋아. 바알 님이 출진하지 말랬는데 무시하고 나온 거니까아. 멀리 떨어진 영토를 받으면 모양새가 별로야. 응. 브란덴부르크 영지 정도면 만족할게.”

“맞다. 위치도 중요하네. 쓰읍. 난 어쩌지.”

바르바토스가 침묵했다.

“…….”

분노보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런 것들이 자신과 동격이라는 사실이 차마 끔찍하여 인정할 수 없었다. 긍지라고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찾아 움직이는 승냥이 무리였다.

바르바토스가 말없이 자리에서 떠났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평원파의 마왕들만이 그녀 뒤를 따랐다.

그녀가 지극히 차가워진 얼굴로 말했다.

“당장 추격조를 꾸려.”

“우리 군단만으로 추격하실 생각입니까?”

제파르가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 송구하오나 승기를 장담할 수 없나이다.”

“승기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여 잡아내는 것이다.”

바르바토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마왕들이 쓰레기일지라도 우리만큼은 마족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아직도 마왕은 그대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노라고. 제왕이란 그런 것이야.”

“……존명.”

“개새끼들.”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등 뒤를 슬쩍 노려보았다.

“좋아. 네놈들이 그리 바란다면 대륙 정벌은 뒤로 미룬다! 그 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 새끼들을 청소해주지.”

이 순간, 평원파는 여타의 파벌들과 사실상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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