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58화 (158/510)
  • 00158 폭군의 시대  =========================================================================

    *  *  *

    월맹군 제6군단 선봉대, 합스부르크의 요새 크램스를 함락!

    함락했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학살이 일어났다. 검주가 두 명 배치되었음에도 마왕 벨레드는 질풍노도의 기세로 요새를 유린했다.

    제국군은 자신들이 최정예 병사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최후의 일인까지 대항했다. 살아남을 희망을 잃고 짐승처럼 발악하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의 적군이라도 더 저승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집요하게,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자신들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제국의 명줄이 조금 더 길어진다고 믿으면서.

    “오오.”

    장렬한 투혼에 마왕 벨레드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투박한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벨레드는 감성이 풍부한 사내였다. 머리로 생각할 줄은 몰랐어도 가슴으로 느낄 줄 알았다. 그는 감정이 북받쳐서 명령했다.

    “요새의 민간인을 전부 몰살하라. 저들의 최후를 더욱 비극적으로, 고로 더욱 영웅적으로 치장해주겠다.”

    벨레드는 천 년을 넘게 살았다. 어떻게 해야 인간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지 제법 잘 알았다. 그는 진군을 늦추면서까지 손수 요새 안에 머무르던 인간들을 죽였다.

    대부분의 백성은 이미 피난을 갔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집안에서 단지 정복자의 실날 같은 자비심만을 기원하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당했다. 여기서 벨레드는 단순하게 살해하기만 해서야 무언가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음. 시체들을 이어붙여서 뗏목을 만들자.”

    오백 명의 제국무사와 사백 명의 민간인. 그들은 도륙하여 열댓 명씩 묶었다. 인육의 뗏목들이 완성되었다. 벨레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특별히 머리통들은 따로 떼어서 또 다른 뗏목으로 만들었다. 그는 예술작품을 보는 눈초리로 살육의 결과물을 감상했다.

    “기가 막히게 멋있군 그래!”

    벨레드는 만족했다. 그는 시체 뗏목들을 지극히 정중하게 다누비우스 강줄기에 흘려보냈다. 불행하게도 그중 몇몇 개는 침몰하였다. 대다수는 순풍을 받아 돛이 불룩허니 도도하게 나아갔다.

    마계인들이 공포심을 담아 《마왕의 미학(美學)》이라 부르는 종류의 짓거리였다.

    시체 뗏목들은 다누비우스 강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때로는 도시에 도착하였다. 저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인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그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마왕 도래.

    어느 월맹군 원정에서나 가장 과격한 자들은 평원파였다. 그들은 전쟁의 신사임을 자칭했으나 어디까지나 자칭에 불과했다. 그들의 사명은 오로지 학살. 역사서에 잔뜩 과장스럽게 서술되어 있는 온갖 학살의 주도범이 바로 평원파 마왕들이었다.

    하지만 제8차 월맹군에는 단탈리안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학살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쓸데없이 피를 보는 것을 꺼렸으며, 만약 인간종을 회유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회유하자는 입장이었다.

    평원파가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영토를 점령했음에도 학살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단탈리안, 그리고 단탈리안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바르바토스가 평원파 마왕들을 제어하기 때문이었다.

    부르노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평원파는 학살을 자제했다. 단탈리안이 '민간인을 죽이지 않을수록 우리 마왕군에 승기가 돌아온다'라고 당부했으므로. 하지만 이제 단탈리안이 평원파를 이탈한 지 반년이 흘렀다. 평원파 마왕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이여! 우리가 그대들에게 선사할 자유는 오로지 공포이며, 그대들에게 선물할 해방은 군림뿐이며, 그대들에게 허락할 진리는 무지밖에 없다!”

    벨레드는 곧장 다누비우스 강을 도하했다. 중간중간에 인간의 마을들을 착실하게 청소하며. 이 살육으로 인하여, 벨레드가 기대했던 바 그대로, 요새를 지키다가 전사한 제국무사 오백 명은 비극적인 영웅으로 역사서에 길이 남게 되었다.

    벨레드가 마냥 미학에 취해버린 자는 아니었다.

    살육에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었다. 벨레드는 마을들에서 살육한 시체들을 긁어모아 진군했는데, 곧이어 벌어질 합스부르크 제도 공성전에서 써먹기 위해서였다.

    “시체는 써먹을 데가 많거든.”

    벨레드가 싱글벙글 웃었다.

    시체가 잔혹하게 손상된 모습은 그 자체로 인간군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적군의 사기를 깎아먹을 수 있다. 여차하면 흑마법을 걸고 투석기에 담아 쏘아버린다. 운이 좋으면 성안에 전염병이 발생한다.

    “살아 있을 때는 나를 즐겁게 해주고, 죽고 나서는 나를 위해 봉사하지. 인간만큼 우리 마왕에게 도움이 되는 놈들이 따로 없다니까.”

    벨레드는 흑랑들의 등허리에다 시체를 잔뜩 실었다. 죽음의 기사들도 시체를 하나씩 짊어지고 진군했다. 천여 구에 이르는 인간 시체를 기어코 날랐다. 이것 때문에 진군 속도가 늦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벨레드는 선봉대에 불과했다. 제도에 일찍 도착해봤자 할 일이 없었다. 합스부르크의 제도는 대륙에서 가장 튼튼하게 지어진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가 세워지고 여태까지 월맹군은 단 한 번도 그곳을 점령하지 못했다.

    아무리 짧아도 한 달은 걸리겠지. 월맹군 수뇌부는 그렇게 판단했다. 벨레드도 똑같았다. 자신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가 재빠르게 진군하는 것 대신에 인간의 시체를 모은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인간군에 평범한 지도자밖에 없었다면.

    요새를 점령하고 사흘 뒤. 벨레드의 군세가 제도에 도달했다.

    “……어이, 어이. 이건 또 무슨 난리야.”

    벨레드는 멈춰섰다. 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평원 한 가운데 대도시가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을 시선에 담으면서 벨레드가 실없이 웃었다.

    “어느 약삭빠른 새끼들이 우리보다 먼저 제도(帝都)를 함락하기라도 한 거냐?”

    이미 타버려서 갈색빛이 되어버린 평야. 검게 그을린 성벽. 도시 안쪽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 몇 가닥.

    제도는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합스부르크의 수도가 남김없이 타올랐다!

    벨레드가 곧바로 마법수정구를 통하여 보고했다. 월맹군 수뇌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제도가 불타다니, 무슨 소리인가.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다름 아니라 제도였다. 월맹군은 반드시 함락해야 했고 인간군은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그런데 월맹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타버린 것이었다. 처음에 월맹군 수뇌부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마르바스 영감탱이. 댁이 저지른 짓이야?”

    “헛소리. 우리 제2군단은 너희보다 하루 늦게 움직이고 있다.”

    “어이. 친애하는 동지들.”

    바르바토스가 싸늘하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우리 중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고. 어이, 시트리. 내 눈을 봐.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네가 했어? 제1군단이 움직였냐?”

    “몸집이 작으니까 머리통도 작은 모양이네, 바르바토스.”

    시트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현재 파이몬을 대신하여 월맹군 제1군단, 산악파 마왕들을 이끌고 있었다.

    “뇌세포가 적은 건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기억할 건 기억해야지. 우리는 저번에 브르타뉴 왕국군을 전멸시키느라 전력을 죄다 소비했어. 빼돌릴 군대도 없거니와 어찌어찌 빼돌린다고 해도 합스부르크의 제도를 떨어트릴 수는 없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발의 마왕이 느긋하게 포도를 따먹고 있었다.

    “가미긴.”

    “어머나, 싫다아. 동지를 의심하면 못 써요. 우리 제5군단이 이중에서 제일 늦게 합류했는걸? 난 너희들처럼 뒤에서 콩깎지 까먹거나 그러는 사람이 아니야아. 게다가 우리가 뭐 제2군단처럼 쪽수가 많은 것도 아니구. 어떻게 제도를 단독으로 함락하니?”

    “흥. 단독이 아니라면 가능하겠지.”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아가레스, 바싸고, 가미긴. 너희가 짜고친 거 아니야? 솔직히 불어, 뇌수가 면발로 된 년놈들아. 어쩐지 전쟁 내내 전력을 아낀다느니 뭐니 하면서 게으르게 싸운다 했어. 씨발, 지금까지 뒷구멍으로 병력을 빼돌려서 제도를 공격한 거 아니냐고.”

    “얼씨구. 건방 떨지 마, 애송이 아가씨.”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머리색이 하늘색이라 눈에 쉽게 띄었다.

    “애초부터 합스부르크 방면은 네 년의 제6군단이 맡고 있었잖아. 안 그래? 우리는 아주아주 특별하게, 네 년을 도와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행차하신 몸들이야. 응? 네 년한테 추궁을 당할 입장도 아니거니와, 서열 제9위 주제에 목소리를 높여도 될 만큼 가소로운 분들도 아니야.”

    “난 서열 제9위가 아니라 제8위이다, 머리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새끼야.”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아가레스가 어머나, 하고 입을 가렸다.

    “정말 미안해! 서열이 너무 낮아서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네. 하지만 너도 나빴어. 응? 적어도 제5위 안에는 들어야지 상대방도 기억하기 편할 거 아니야. 제8위라니. 너무 숫자가 커서 나 같은 멍청이는 외우지도 못하겠다, 야.”

    “오호. 내가 그 머저리 같은 두뇌에다 직접 각인시켜줄 수도 있는데.”

    두 마왕이 서로를 보며 살벌하게 미소 지었다.

    “까볼 테면 까보던가, 마드모아젤 씨발 양.”

    “네 년, 죽여버리겠어.”

    바르바토스가 전투대낫을 소환하려는 순간이었다. 마르바스가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가 여기는 평온하게 회의가 굴러가는 법이 없군. 바르바토스. 아가레스. 만약 너희 둘이 이곳에서 결투를 벌이겠다면, 좋다. 나에게는 결투를 주최할 권리도 말릴 권리도 없으니 얌전히 물러가지. 하지만 다시는 연회에 초대하지 않을 줄 알도록.”

    “흥.”

    “씨발.”

    바르바토스와 아가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마르바스는 마왕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중재자를 맡을 만한 인물이었다. 서열 제1위의 바알은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 아닌 바에야 철저하게 마왕들을 방관했다. 나머지 상위 마왕들은 전부 제 콧대가 높아 남의 말을 안 들었다.

    오직 중립파의 수장인 마르바스만이 마왕들을 조율하고 다독였다. 그는 서열상으로 제5위였어도 실질적으로는 마왕군 최고의 권위자였다. 마르바스가 나서면 예의라도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마르바스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면 끝이 없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우리들은 각자 동떨어져서 행동했다. 그 동안 군대를 어떻게 굴렸는지는 본인들만 안다. 완벽하게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군단은 한 군데도 없다. 바르바토스. 제6군단도 마찬가지이다.”

    “…….”

    “무엇보다도 숨길 일이 아니다. 합스부르크의 제도를 함락했다. 이건 군공이지 결코 흠이 아니다. 누군지 몰라도 제도를 떨어트린 마왕은 영원토록 칭송을 받겠지. 그걸 숨겨서 얻을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마르바스가 천천히 마왕들을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만약 생각나는 바가 있으면 발언해봐라, 하는 눈빛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마르바스가 신중하게 말했다.

    “지금 의심해본들 그 의심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중상모략이다. 그렇다면,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 수도를 불태웠다고 판단하는 편이 옳다.”

    “으으응. 합스부르크가 자국의 수도를 불태웠다고?”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발이 찰랑거렸다.

    “그것도 난 전혀 이해가 안 가는걸. 수도는 수도잖아. 나라의 심장이잖아. 거길 불태워서 무슨 이득이 있는 거야아?”

    “…….”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왕조는 극히 드물긴 해도 있었다. 그중 어느 왕조도 수도를 철저하게 불태우지는 않았다. 분노에 찬 백성이 궁전을 태워버린 적은 있었다. 하지만 수도 전체가 불탄 것은 전대미문이었다.

    인간들에게 도시란 되찾아야 할 보물이다. 당장 월맹군에 밀려도 언젠가 도시를 수복할 수 있다. 지난 역사에서 인간은 수없이 그런 과정을 반복했다. 왜 뜬금없이 수도를 전소시켰는가?

    “……아무래도 대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군. 일단 진군을 계속해볼까. 정답은 그 이후에 찾아도 좋을 것이다.”

    마르바스의 제안에 모두가 끄덕였다. 월맹군은 이미 불타버린 제도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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