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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56화 (156/510)

00156 폭군의 시대  =========================================================================

“말도 안 된다!”

요새지휘관이 비명을 질렀다.

요새 정문에는 온갖 마법적인 처리가 가미되었다. 그중에는 이백 년 전부터 내려져온 8서클 등급의 최고위 마법, 개념 마법까지 있었다. 《어떤 종류의 공격을 받더라도 단 한 번 견뎌낸다》. 설령 상대방이 얼마나 강력하게 성문을 공격할지라도, 그것이 공격인 이상, 반드시 한 번을 견딘다.

그처럼 고급스러운 개념 마법이 성문에 일곱 겹이나 둘러쌌다. 단적으로 말해 메테오 마법을 쏟아붓더라도 일곱 번은 쏟아부어야만 했다. 메테오도 한 번의 공격으로 취급되므로. 그러나 요새지휘관의 눈에는, 형편없이 동강 나버린 성문 그리고 도끼를 들쳐맨 한 명의 마왕이 비추었다.

“이거, 뭔가 잔뜩 장난을 쳐놓은 것 같은데. 미안하군 그래.”

먼지가 뿌옇게 낀 성문으로 벨레드가 걸어 들어갔다.

성문 뒤에서 대기하던 문지기 병사들은 문이 파괴되는 것과 함께 인육의 파편이 되었다. 철조각과 나무조각이 튀어 하필 관자놀이에 틀어박힌 병사,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희여멀건 내장을 땅바닥에 흘리는 병사. 그중에는 불행하게도 목숨이 질겨 괴롭게 신음하는 남자도 있었다.

“흐흐…….”

벨레드가 발자국에 맞추어 도끼를 흥겹게 흔들었다.

인육과 신음, 이 두 가지가 만들어내는 인세의 도살장. 이것이 바로 마왕 벨레드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었다. 이때 비로소 벨레드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대저 마왕이란 자아가 불안정했다. 다른 마인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는 탓이었다. 어디까지가 내 영역인가. 어디부터 타인의 영역인가. 그 경계선이 마왕들에게는 흐릿했다. 마왕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유지했다.

벨레드가 선택한 방법은 학살이다. 대지에 자신 말고 아무것도 서 있지 않다. 전쟁터를 헤쳐 가다보면 반드시 그런 순간이 있다. 승리의 순간이다. 강자만이 만끽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나만이 오롯하게 두 발로 선 그 절대적인 순간에 비로소 벨레드는, 그렇다, 이것이 '나'이다, 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하고 말한다.

반시체들이 고통스럽게 내뱉는 신음은 벨레드에게 다만 감미로운 협주곡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벨레드는, 최대한 신속하게 돌파해야 마땅할 성문에서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길게 잡아당기기 위해서.

“네놈, 어떤 사악한 수작을 부렸는가!”

“흐음.”

음악과 같은 시간에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벨레드가 혀를 찼다. 아까 전 평야에 혼자 나와서 일대일 결투를 울부짖은 검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귀족 출신인지 절도 있는 발음으로 마왕을 매도했다.

“에잉, 아가씨. 운치가 뭔지 모르는구만. 지금 내가 음악을 즐기는 게 안 보이는가?”

검의 주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음악? 무슨 헛소리냐. 여기에는 참혹한 죽음밖에 없다.”

“오, 잘 말했어. 이곳에는 죽음밖에 없노라. 오늘 음악에는 제목을 그리 붙여야겠군. 으음. 시(詩)적이야. 매우 시적이야. 음.”

벨레드가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검의 주인은 상대방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느껴 분노했다. 그녀는 이번 전투에서 더 이상 예법을 취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불문곡직으로 검을 빼들었다.

‘놈은 덩치가 크다. 그만큼 둔중하다.’

검의 주인이 허리를 숙이면서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곧 리치가 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대일 결투에서도 리치의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아직 상대방이 제대로 자세를 갖추지 않은 이때가 최고이자 최후의 기회였다.

리치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상대방이 호락호락 허용할 리 만무했다.

‘첫 번째 일격만 피한다.’

분명히 이쪽을 견제하는 공격이 들어올 터. 견제에 휘말리면 끝장이었다. 상대방은 리치의 우세를 지키면서 서서히 이쪽을 조여온다. 사자 무리가 느긋하게 상처 입은 동물을 몰아세우듯이. 결국 이쪽이 말려들어 괴사해버린다.

‘어?’

그러나 벨레드는 간단하게 파고들기를 허락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끼를 치켜들지도 않았다. 마치 재밌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듯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함정인가.’

순간적으로 그런 의심이 솟았다. 아니다, 하고 검의 주인이 빠르게 판단했다. 자신은 이미 상대방의 자세에서 다음 수, 그 다음 수를 읽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우거 같은 거한은 정말로 무방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속셈을 갖추고 있겠지. 그녀는 눈앞의 마왕을 경시하지 않았다. 허나, 몇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지금 자신이 검을 찔러넣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은 그녀의 칼날에 아무런 대비도 갖추지 않았다는 것.

망설일 필요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히야아아!”

그녀가 기합을 지르면서 장검을 비스듬히 찔러넣었다. 여전히 벨레드는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전하. 실례지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가 말했다. 바르바토스가 응? 하고 대답했다.

“뭔데? 말해봐.”

“어째서 소인이 아니라 벨레드에게 선봉을 맡기셨나이까?”

현재 월맹군 제6군단 본대는 월맹군 제2군단과 무사히 합류하여 진군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평원을 지나쳤다. 바르바토스는 특별히 군마나 흑랑이 아니라 백곰에 올라탔다. 새하얀 백곰과 역시 머리카락이 하얀 바르바토스는 잘 어울렸다.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뭐야? 얌생이처럼 삐졌냐? 사내 새끼가 원.”

“흠흠.”

제파르가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바르바토스 앞에서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 있었다. 삐졌다고 인정하자니 지나치게 부끄러웠고, 삐지지 않았다고 말하자니 맹세를 어기는 꼴이었다.

제파르의 심정을 잘 아는 바르바토스로서는 이 반백의 노장이 무척 귀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바토스는 제파르보다 서너 배는 더 오래 살았다. 그녀가 보기에 제파르는 아직 한참 어린 마왕이었다. 소년이라고나 할까. 그런 아이가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머뭇거리니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깔깔. 정말로 삐졌구나? 응? 야, 대답해봐. 우리 제파르 삐졌어요?”

“……전하. 소장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제파르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투조차 귀엽다고 생각하는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뭐, 내가 일부러 벨레드랑 너를 경쟁 붙이는 건 사실이야. 어느 조직에나 이인자는 있어야 하거든. 이인자가 한 명밖에 없으면 조직이 생기를 잃어버리니까. 너희 두 명을 경쟁관계에 놓아서 다른 평원파 애들한테도 말하는 거지. 봐라, 존나 열심히 뛰지 않으면 이인자도 없어.”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파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장이 군단장 각하께 이용될 수 있음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으에엑.”

바르바토스가 메스꺼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그 하녀의 마음가짐은. 모처럼 사나이로, 그것도 마왕으로 태어났는데 좀 기개를 가질 수 없냐? 이용될 수 있어서 기쁘다느니 그런 거 말고. 내가 세계를 재패해보겠다는 거 말야.”

“군단장 각하야말로 모든 마인의 소망을 등에 짊어지신 분. 말하자면 마인들의 염원을 체현하시는 분입니다. 각하께 봉사하는 것이 곧 마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요, 마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마왕된 자의 직분이라 생각합니다.”

“으으. 성실해, 너무 성실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조금 더 마왕다운 자세를 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탈리안은 특별했다. 단탈리안은 그녀에게 복종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이번에도 그래.’

마왕성에서 휴식하겠다는 녀석이 왜 난데없이 마계를 싸돌아다니는가? 보나마나 음험하게 흉계를 꾸미는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조금도 쉬지 않고 성실하고 착실하게 음모를 꾸미는 놈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차라리 단탈리안이 마음에 들었다. 벨레드나 제파르처럼 완벽하게 신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벨레드와 제파르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하로 머무르는 반면, 단탈리안은 주종관계를 뛰어넘어서 친구가 되었다. 각자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며 기꺼이 이용당해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바르바토스에겐 단탈리안 이외에 없었다.

예전에는……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설령 두 사람이 목적이 다르더라도 두 가지의 목적이 공존한다면 친구로 지낼 수가 있었다. 세상에는 그러나 공존할 수 없는 목적들이란 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허울 없는 친구란 한 순간에 적나라한 원수가 되기도 하는 사이였다.

혹시 단탈리안과도 그렇게 되는 것일까. 시간이 지난다면 단탈리안도 예전의 그녀처럼 자신을 배신할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녀와 갈라서고 단탈리안이라는 친우가 생겨날 때까지 천오백 년이 필요했다. 다음에는 또 어느 정도의 천 년이 필요할까…….

“그렇게 되면 존나 두들겨패서 내 하인으로 만들어버려야지.”

“예? 죄송합니다, 전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냐. 말 안 듣는 녀석에겐 매가 약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제파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르바토스는 그의 의문을 무시했다.

“흐으음. 벨레드랑 널 경쟁시켜야 하는 내 입장을 이해해줘. 제파르 너는 저번에 검은 산맥을 돌파하느라 공훈을 졸라 많이 쌓았잖아. 게다가 아우스테를리츠에서도 적군의 파상공세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고.”

“모두 군단장 각하의 은혜입니다.”

“네, 네. 대륙이 생겨난 것도 하늘이 푸른 것도 전부 내 덕택이지. 아무튼 넌 이번 월맹군 원정에서 너무 튀었어. 제1공훈자이니까. 심지어 제2공훈자인 단탈리안까지 표면상으로나마 제파르 네 부대 소속이잖아.”

바르바토스가 두 팔을 X자로 가로질렀다.

“더 이상 공훈을 세우면 곤란해. 평원파 내부에서 네 녀석 발언권이 지나치게 강력해져. 그럼 나는 제파르 너를 불합리한 방식으로 깔아뭉개야 해. 그러긴 싫걸랑. 벨레드한테 적당히 공을 주는 편이 훨씬 보기 좋지.”

“이해했습니다.”

제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어차피 바르바토스의 총애가 중요했다. 벨레드한테 선봉을 맡긴 까닭이 혹여나 자신보다 벨레드를 더 총애하셔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것이 제파르가 걱정하는 바였다.

제파르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걱정거리가 사라진 이상 벨레드가 선봉을 맡든 뭘 하든 상관없었다. 솔직히 바르바토스만 건재하다면 평원파 내부 정치적 질서 따위는 제파르의 안중에도 없었다.

“뭐, 그리고 벨레드가 너보다 선봉에 어울리긴 해.”

“예?”

“군사를 통솔하는 점에서야 제파르 네가 훨 뛰어나지만 말야. 뭐라고 할까.”

바르바토스가 히죽 웃었다.

“그 녀석, 생긴 거랑 다르게 음흉하거든.”

*  *  *

“…….”

검의 주인이 멈추었다. 그녀는 앞으로 발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뻗은 장검은 바로 벨레드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한 발자국.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장검은 오러를 휘두른 채 마왕의 머리를 파괴할 것이었다. 검의 주인은 바로 그 한 걸음을 나아가지 못했다.

“크, 흐으억.”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검붉은 핏물은 비단 입에서만 분출되지 않았다.

발등, 종아리, 허벅지, 허리, 흉부, 어깨――신체의 여섯 부위를 여섯 개의 대검이 찌르고 있었다. 대검들은 바로 땅 아래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여, 그림자에서 솟아나왔다. 검의 주인이 벨레드에게 일격을 먹이려는 순간 여섯 개의 대검은 기다렸다는 듯 용솟음쳐서 그녀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죽음의 기사.

그들이 평상시에는 그림자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검의 주인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고통을 참아냈다. 다만 참아낼 뿐이었다. 대검들은 교묘하게 그녀의 신체를 유린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비, 겁한……전사로서의 긍지가……네놈에게는…….”

“아아. 없지. 없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벨레드가 느긋하게 도끼날을 바로 세웠다. 그는 도끼를 치켜들고 씩 웃었다.

“요새는 개새끼 같은 남자가 대세라니까.”

그리고 장작을 쪼개듯이 도끼를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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