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5 폭군의 시대 =========================================================================
* * *
바르바토스 휘하 월맹군 제6군단이 진군했다.
꽤나 많은 병력을 떼어주었다지만, 군단장 바르바토스는 속도를 늦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전술 교리는 무척 간단했다. 적군보다 신속하게 움직여라. 이것 하나뿐이었다.
“다른 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진군하는 것은 어떨지요?”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가 진언했다. 그는 신중한 숙장(宿將)이었다. 드문드문 하얗게 탈색한 머리카락도 이 남자를 초라하게 만들지 못했다. 백발에는 수백 년 동안 거쳐온 격전의 향내가 서려 있었다.
“앞으로 사나흘만 더 기다리면 하다못해 제2군단이 합류합니다. 전력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나는 셈이지요. 인간군을 더 용이하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군이 채비를 갖추는 동안 적군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 아군이 미처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해 들어간다면 적군 또한 미처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지. 이때 아군과 적군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군은 자기가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아는 반면, 적군은 전투의 시기와 장소에 무지하다는 것이야.”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라. 인간놈들은 우리가 한 덩이로 뭉쳐서 진격해오리라 예상하고 있을 터. 그 무지가 틈새를 만들어. 제파르의 의견은 기각한다. 벨레드!”
“예, 군단장!”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벨레드는 신장이 오우거만큼 큼직한 사내였다. 그가 소리를 내자 담력이 약한 마왕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맹수와 같은 울림이 벨레드의 목소리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휘하 죽음의 기사 사백 명을 맡긴다. 나의 기사들한테는 군량도 휴식도 필요없다. 그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라. 그리고.”
바르바토스가 단검을 꺼내어 던졌다. 단검이 땅바닥에 꽂혔다. 땅에는 바르바토스가 마법으로 재현해놓은 작전 지도가 투영되고 있었다. 단검이 꽂힌 자리에는 크램스라고 적혀 있었다.
“크램스를 급습하여 함락하라.”
요새도시 크램스. 그곳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요새 뒤편에선 다누비우스 강줄기가 대륙 한복판을 길게 가로질렀다. 이 강줄기를 넘어가면 곧바로 빈드보나――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다.
“크흐으으.”
마왕 벨레드가 더운 숨결을 토했다. 벨레드의 구릿빛 근육이 마치 구렁이 살갗처럼 요사스럽게 번들거렸다. 그는 명백히 흥분하고 있었다. 다누비우스 강줄기. 지난 이천 년 동안 월맹군은 이곳을 고작 두 번밖에 넘어서지 못했다.
다누비우스 강을 처음 건넌 마왕은 현재 서열 제1위인 바알. 두 번째로 건넌 마왕은 다름 아니라 눈앞에서 군단을 지휘하는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였다. 이제 세 번째로, 서열 제13위 벨레드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군단장 각하……아니, 바르바토스 님. 보이십니까? 제 육체가 흥분에 떨고 있습니다.”
자그마치 바알과 바르바토스 다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서는 것이었다. 벨레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전멸. 격멸. 격퇴. 저 벨레드, 군단장께서 어떤 종류의 승리를 바라시든지 상관없이 바로 그 승리를 진상하겠습니다.”
“나 바르바토스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마왕인 소녀가 히죽 웃었다.
“전멸.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전멸을. 인간종이 다시는 우리 마인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우리의 발끝만 보아도 두려움과 공포에 절규하여 땅바닥에 쓰러지도록, 그들에게 이제 삶이란 오로지 잿빛 하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의미도 없도록. 바로 그러한 전멸을 나는 바란다.”
“그 명령――확실히 들었습니다!”
벨레드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구름이 가득 낀 회색하늘에 마왕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벨레드는 곧장 죽음의 기사 사백 기를 인솔했다. 본래 마왕에겐 많은 휴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투파인 벨레드는 더더욱 그러했다.
피로라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는 듯 벨레드와 죽음의 기사들은 사흘 밤낮을 내달렸다. 도리어 그들을 태운 늑대 몬스터, 흑랑(黑狼)들이 먼저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벨레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럴까봐 한 사람당 세 마리의 흑랑을 대동했다. 흑랑 한 마리가 지치면 다른 한 마리로 갈아타는 식이었다.
사흘 밤낮 달린 끝에, 그들의 시선에 대지에 우뚝 솟은 도시 크램스가 들어왔다. 강줄기를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해자까지 만들어놓은 요새였다. 벨레드의 군세는 실로 질풍처럼 진격한 것이었다.
“뭐, 마왕군이 벌써 나타났다고!”
요새 지휘관이 놀라 소리쳤다. 전령이 말했다.
“예! 적, 약 사백 기. 사백 기 전부 죽음의 기사들입니다.”
“죽음의 기사 사백 기…….”
지휘관이 침음을 삼켰다.
바르바토스의 예상은 적중했다.
제국군은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뒤에나 적이 도착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현 제국군 총지휘관인 제3황녀 엘리자베트는 전술의 천재였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라는 마왕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그것까지는 엘리자베트조차 몰랐다.
다만 황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를 써놓았다.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예기사들을 미리 요새에 집결시킨 것이었다. 그녀는 크램스에 실력 좋은 기사들을 배치하며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했다.
─ 어떤 적군이 휘몰아쳐도 사흘을 버텨라. 알겠는가. 그대들의 목숨을 바쳐서 사흘 동안 요새를 사수하라.
단 사흘.
그 시간을 벌기 위하여 요새에 집결한 기사들의 전력은 가히 화려했다.
제국 제1급 무사인 <검의 주인>이 두 명 있었다. 제2급 무사가 서른 명. 제3급 무사와 제4급 무사가 오백여 명. 전부 합쳐서 오백오십에 이르는 무사들이 요새에 주둔했으며, 이들은 숫자가 적을지언정 강력한 군세를 이루었다.
요새를 지휘하는 남자 또한 <검의 주인>. 단신으로 일개 군단에 버금간다는 최고급 전력이었다. 만약 요새 앞에 나타난 적군이 죽음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콧방귀를 뀌면서 여유롭게 대처했으리라.
지휘관이 이를 악 물었다.
“나흘……나흘만 더 있었다면, 지원군이 도착했을 터이거늘.”
계획이 모조리 일그러졌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지금 수도에서 한창 자신의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다. 수도 시민 전체를 옮기는 작업이었다. 어마어마한 병력이 치안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었다.
앞으로 나흘만 더 있었으면 엘리자베트 황녀는 요새에 지원군을 보낼 것이었다. 그러나 벨레드, 아니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 빨랐다.
요새는 오직 기사 오백으로 벨레드를 막아야 했다. 백 명에 이르는 경비병력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일반병사. 죽음의 기사가 내지르는 칼날 앞에서 단 일 초도 견디지 못하겠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지휘관이 빠르게 판단했다.
요새 전체에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막사에서 편히 휴식하던 기사들이 서둘러 갑옷을 챙겨 입었다. 이날 시종들은 평생을 통틀어서 가장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단단한 갑옷을 입기란 의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요새지휘관은 자기 이외에 또 다른 소드 마스터를 요새 바깥으로 내보냈다. 일대일 결투. 장군전(將軍戰)를 빙자한 지연책이었다.
“잡졸 마귀들아! 어디 내 검을 받아볼 놈이 있는가!”
검의 주인이 성밖의 너른 평야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요새지휘관이 노리는 바는 간단했다. 검의 주인을 출격시켜서 일기토를 유도한다. 저쪽에서 일기토에 응하여 차례대로 죽음의 기사를 내보내면 그만큼 인간군은 시간을 벌게 된다. 그래봤자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벌기란 요원했다. 지휘관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푸흐.”
그러나 요새지휘관의 속셈은 먹혀들지 않았다.
“제군들! 아무래도 인간놈들도 예의란 것을 아는 모양이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친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내와서 영접하니 말이다.”
마왕 벨레드에게는 인간군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는 전사였지만 동시에 장군이었다. 결투에 집착하여 전투를 망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벨레드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상대편에서 기껏 예의를 차려준 것이다. 누구보다 신사적인 마인들이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우리 마인들이 예의에 어떻게 대답해주는지 보여주지 않겠는가!”
벨레드 주위로 검붉은 마력이 요동쳤다. 직후, 공중에서 거대한 도끼가 소환되었다.
“가자! 마계의 신사들이여!”
죽음의 기사와 흑랑이 울부짖었다.
철이 철을 긁는 소리처럼 몬스터의 포효는 인간들의 두개골을 긁었다. 죽음의 기사는 구강이 아니라 마력을 통해서 소리를 냈다. 제국군 검사 역시 체내에 마력을 담아낸 자들. 몬스터의 포효에는 그 마력을 요동치게 만드는 불길한 무언가가 있었다.
─ 크후아아아아아!
벨레드와 죽음의 기사 사백 기가 돌진했다. 연설전도, 일기토도, 통상 전투에 따라오는 예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것 따위 한참 전에 잊어버렸다는 듯 죽음의 기사들은 야만족마냥 함성을 질렀다.
“이, 이건 전장의 예법에 어긋난다!”
검의 주인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마나에 담긴 목소리가 평원에 울렸다.
“무례한 놈들! 네놈들도 전사라면 마땅히 내 결투에 응하여――.”
“흐하하하! 인간의 아가씨! 우리에게 최대의 예의란 바로 상대방을 신나게 겁탈해주는 것이다!”
벨레드가 도끼를 치켜들면서 환호했다.
“어디 내 육봉의 맛을 친히 감상하시라!”
“이, 천하의 비겁한 개새끼가!”
“내 의형제가 알려준 바에 따르자면 개새끼 같은 남자가 요새 인기라더군! 크하하!”
검의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그녀는 성벽을 툭, 툭, 밟고 요새에 올라갔다. 일정한 경지에 이른 무사이기에 펼칠 수 있는 묘기였다.
“크윽.”
요새지휘관이 이를 빠득 갈았다.
지연책이 통하지 않았다. 저 마왕은 오우거처럼 생겨먹은 주제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지휘관으로선 당장에 별다른 수단이 없었다. 이제, 황녀 전하께 명령받은 대로 사흘 동안 이곳을 피와 땀으로 지켜낼 뿐이었다.
인간 지휘관과 벨레드의 고함이 교차했다.
“전원, 요새를 사수하라!”
“마음껏 유린하라!”
죽음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성벽에 접근했다. 그들은 서로가 지난 수백 년 간 파트너였다. 흑랑에서 뛰어내려 완벽하게 똑같은 순간에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온몸을 흑색 갑옷으로 두른 죽음의 기사들은, 역시 검은색인 망토를 박쥐 날개처럼 휘날렸다.
“막아내라! 옆의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라!”
“지형상으로 우리가 유리하다! 놈들에게 휘둘리지 마라!”
제국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들은 성벽에 의지하여, 사냥매처럼 자신들을 덮쳐오는 죽음의 기사들에 맞서 싸웠다. 인간계의 기사와 마계의 기사가 격돌했다.
“크으아아압!”
“뒈져버려!”
이곳에 실력이 무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 일합만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들은 성벽 위에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몇몇은 인간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깔끔하게 포기했다. 성벽에 올라가는 데 성공한 자가 너무 적었다. 그들은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성벽 아래로 재차 뛰어내렸다.
“막았다! 막을 수 있다!”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라! 잊지 마라!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라!”
기사들 사이에서 자그맣게 환호가 일어났다. 그들은 작은 싸움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전투의 초반이었다. 일부러라도 사기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기운을 돋아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환호한 것이었다.
요새지휘관의 머릿속에 황녀의 명령이 스쳐 지나갔다.
사흘을 버텨라!
‘할 수 있습니다. 황녀 전하, 사흘이고 나흘이고 며칠이든지 소인의 목숨을 다하여 막아내겠습니다!’
그는 약간 흥분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음의 기사들이 두 번째로 성벽에 오르는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문득, 그는 적군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마왕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때였다. 요새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요새지휘관은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면서도 어디서 진동이 발생했는지 신속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진동이 울려 퍼진 곳은――바로 요새의 성문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