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4 폭군의 시대 =========================================================================
* * *
─ 다행이야.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
아름다운 소녀였다. 아름다움이라든지 소녀라든지 남자는 그런 단어가 쑥스러웠다. 남자가 입에 담기에 적당한 낱말이 아니다. 다소 생각이 난폭했지만, 그만한 난폭함을 갑옷처럼 입고 다녀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였다.
남자는 마족 중에서도 긍지 높은 호족(虎族)의 일원이었다. 전쟁터에서 백 년을 뒹굴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기사의 칼날에 심장이 뚫려 즉사했다.……틀림없이 그랬을 터. 어째서 눈앞에 소녀가 비추고 있는가?
소녀의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고여 떨어졌다.
─ 살아나서……진짜, 다행이야.
눈물은 분명히 남자의 뺨에 떨어졌다. 그는 감촉이 낯설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무언가가 떨어지더니 자신의 뺨에 부닥쳤다, 그 정도 감상만이 남았다.
─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미안해…….
소녀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범벅되었다.
곤란하다, 하고 남자가 생각했다. 이제 슬슬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는 주군이었다. 아름다운 긍지를 가진 주군. 그 신념의 끝까지 함께 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안을 뛰어나와 소녀의 군기(軍旗)를 짊어지었다.
─ 소인 때문에 우시는 것입니까, 전하?
─ 아니야.
물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그녀가 웅얼거렸다.
소녀는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었다. 울음에 목소리가 잡아먹혔다. 곤란하다, 하고 남자가 재차 생각했다. 자신이 불민하여 그만 소녀를 울려버린 것 같았다. 군주를 울게 만들다니. 빼도 박도 못하고 신하 실격이었다.
─ 나, 너의 죽음을 욕보였어. 전사의 신념을 모욕했어.
─ 무슨 말씀이온지?
─ 넌 훌륭하게 싸우다 훌륭하게 죽었어. 그대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야말로 전사인 너에게 어울리는 최후였어. 하지만……나는 너를 되살렸어. 미안해…….
남자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일찍이 자랑스럽게 구릿빛을 흩날리던 오른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르게 썩어문드러진 시체의 손등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가, 하고 남자가 생각했다. 나는 죽었으며 다시 살아났는가…….
─ 너의 삶과 신념, 죽음까지 모욕했어. 미안해……정말로 미안해…….
가로되 전사란, 평생 우직하게 달려가다 한점 의혹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자. 소녀는 그런 자들의 군주였다. 전사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소인이, 다시 필요해지신 것입니까?
─ 응. 미안해. 지금까지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멍청한 꼬맹이였나봐.
소녀가 웃었다. 입끝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넘치는 얼굴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간신히 유지되었다. 엉망진창이었다.
─ 너희가 없으니까 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아. 너희의 함성과 너희의 웃음소리가 없는 대기는 나에게 그저 차가울 뿐이었어. 미안해. 내 이기심을 위해서……다시 한 번만, 살아줄 수 있을까?
눈앞의 소녀가 의외로 마음이 여리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다. 언젠가 동료들끼리 몰래 얘기한 적도 있었다. 매우 불경스러운 생각이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주군께선 차라리 마왕으로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 모른다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속일 줄 모르는 분이었다. 마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며, 마왕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이런저런 마왕들이 권력을 만끽할 때 소녀는 전투대낫을 치켜들고 오직 앞으로, 앞으로를 외쳤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산송장이 되었을 자신이 미소 같은 것을 지을 수 있을까. 자신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소녀에게 이제 그만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반하여 언제까지고 전사로서 살겠다며 다짐했으니까.
─ 백 년 전에, 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군을 보필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만……소인은 운이 좋군요. 삶이 끝나고도 주군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주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도, 두 번이 아니라 백 번, 천 번이라도. 소인 울라인은 오직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아달라고 남자는 부탁했다.
─ 저희의 자랑스러운 주군, 바르바토스이시여.
소녀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상이 구겨지더니 이윽고 소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까 전처럼 얌전하게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었다. 사방에 다 들리도록 처절하게 울어재꼈다.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서였다.
─ …….
남자는 자신의 손이 무척 흉측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관두었다. 그는 이제 좀비나 다름없었다.
반면에 소녀의 백발은 무척 찬란했다. 지고한 예술품을 더럽히는 짓 따위 사내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앞으로 영원토록, 자신은 소녀의 머리조차 쓰다듬지 못하겠지. 남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못내 씁쓸했다.
덥썩.
그때 무언가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소녀가 자기 손을 겹쳐온 것이었다. 남자가 놀랐다. 그러고보니, 주군께선 우리 마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아셨다. 소녀는 엉엉 울면서도 기어코 남자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곤란하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른손을 꾹 쥐었다. 여전히 온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온기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무런 손실 없이, 그대로 여기 이곳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정원 오백 명.
그들은 칠흑처럼 어두운 갑옷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진실은 달랐다. 산송장이 된 육신을 주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여린 주군은 자신들의 몸을 볼 때마다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싫었다.
같은 군주를 두 번 섬기게 된 이들은 자랑스럽게 검을 들어올렸다.
─ 자아. 나아가자 형제들이여, 발퀴레(Walküre)들이여.
─ 여기 우리, 불패하고 불사하는 군대이리니. 여기 우리, 죽었기에 죽을 도리 없으며, 죽지 않기에 패주 또한 영원토록 모를지어다.
─ 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발할라는 바로 이곳 지상에 있나이다.
주군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예전처럼 농담을 던졌다.
그것만으로 죽음의 기사들은 만족했다. 그렇다. 그들에게 또 다른 천국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군이 웃을 수 있다면. 그녀의 곁에서 싸울 수만 있다면 바로 이곳이 천국이었다.
여신들께서 운명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아니하여 주군께서 쓰러지시는 날, 주군의 마법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자신들도 먼지가 되어 사라지겠지. 동료, 더불어 주군과 함께 여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충분했다. 바랄 게 없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빌어먹을 애새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 *
“…….”
죽음의 기사 울라인이 침묵했다.
만약 자신이 진짜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겠지, 하고 그가 생각했다. 죽어서 다행이었다. 진심이었다. 그만큼 눈앞의 소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게……단탈리안의 손가락, 이라고?”
소녀가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대하여 죽음의 기사 울라인은 곧장 완벽한 대답을 떠올렸다.――예, 그렇습니다. 그 빌어먹을 개자식의 손가락입니다, 전하. 뭐 그리 화내십니까. 전쟁터에서 손가락 한두 개쯤 잃어먹는 것이야 일상다반사 아닙니까?
오히려 잘 됐습니다. 애당초 소인은 그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전하의 첩치고는 너무 유약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저는 처음 그 새끼를 봤을 때 그만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요. 나 참! 그래서야 어디 지 먹을 거나 챙기겠습니까? 어이가 없는 겁니다. 확 나가 뒈져버렸으면.
잘 잃어버렸어요, 손가락! 부상이 있어야 기생오라비처럼 생겨먹은 그 자식한테도 조금은 남자의 관록이란 게 붙겠지요. 내친 김에 소인이 놈의 면상에다 칼자국이나 거하게 쭈욱 그어주고 싶습니다. 그거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답이. 부디 소인에게 그 새끼를 진정한 남자로 만드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이렇게 답안이 완성되는 데 불과 2초가 걸렸다. 쉬운 일이었다. 죽음의 기사는 어떻게 하면 소위 빌어먹을 애새끼를 가장 효과적으로 족칠 수 있을까 맨날 고민했다.
울라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죽음의 기사들한테도 단탈리안은 공공의 적이었다.
자그마치 이천 년 동안 순결을 간직해온 주군이었다. 그런 주군을 접수하다니! 심지어 주군께선 겉모습이 열두 살, 열세 살에 불과했는데!
죽여도 평범하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오백 명의 기사 전원이 동의했다. 다만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튀겨 죽이자, 구워 죽이자, 살갗을 발라 죽이자, 오장육부를 능지처참해서 죽이자, 오크들한테 돌림빵을 시켜 죽이자, 심해에 빠트려 죽이자 등등, 모두 더해서 서른여섯 가지의 다양한 살인방법이 고안되었으나, 울라인은 그냥 얼굴을 죽을 때까지 패갈겨서 죽이자는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나 속마음과 다르게 울라인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 예, 전하. 틀림없이 단탈리안의 왼손 검지와 중지입니다.
바르바토스의 어깨가 자그맣게 떨렸다.
“어떤 개새끼가……이딴 짓거리를 벌였어?”
─ 단탈리안은 전하께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습격하도록 의뢰한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지옥의 대공들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스럽다고.
바르바토스가 책상을 내리쳤다. 나무로 된 각탁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그녀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는 분명히 선언했어. 단탈리안은 나의 측근인 동시에 애인이라고. 그를 습격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나 바르바토스의 비호를 무시했다는 뜻이야.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옥을 선사해주지.”
아아, 하고 울라인이 속으로 절망했다. 주군께선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런데 썩어빠진 기생오라비에게 걸리시더니, 주군께서……아아, 우리의 자랑스러운 주군께서…….
그는 당장 진실을 고하고 싶었다. 그 손가락은 습격자가 아니라 단탈리안 스스로 잘랐으며, 고로 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 버거지를 쓴 것이라고. 안타깝게도 그는 이제 단탈리안의 수하가 되었다. 아직까지 단탈리안을 진심으로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주인인 작자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울라인은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단탈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라는 방식으로 고했다. 단탈리안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울라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산악파 휘하의 대공들이 저질렀겠지, 후레 썅놈들. 수도공방전이 코앞에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내가 몸소 지옥에 강림해주었을 테지만……시발, 그래서 지금을 노린 거냐. 발정난 들개새끼들.”
바르바토스가 씩씩거렸다.
“기사 백 기를 내어주겠어. 범인을 조지고 와라.”
─ 전하! 너무 많습니다!
울라인이 항의했다.
현재 바르바토스는 오천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었다. 그중 죽음의 기사가 약 오백 명. 여기서 백 명을 차출한다면 사실상 전체 전력에서 일할을 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있으면 합스부르크의 수도를 걸고 인간군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이때 일할의 병력을 내주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됐어.”
바르바토스는 직언을 단호히 거부했다.
“어차피 이번엔 내 군단만 싸우는 것도 아니야. 다른 군단장들도 엉덩이에 불 붙은 개구리마냥 튀어오고 있으니 그거 머릿수 조금 줄어든다고 해서 패배할 일 없어.”
─ 하지만 전하, 만사에는 만약의 사태라는 것이…….
“야, 야. 너희가 단탈리안한테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건 나도 알아.”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새끼야. 생각 좀 해라. 응? 측근이 어디 가서 얻어터지고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내 체면은 어떻게 되냐? 다른 마왕들이 소식 들으면 씹을 거리 생겼다고 존나게 좋아할걸.”
─ …….
“물론 단탈리안이 다쳐서 화나기도 해. 인정할게. 하지만 내 체면이 더 중요한 거야. 벌레 새끼들은 적절하게 밟아주지 않으면 지들이 벌레인 줄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큼은 거 단탈리안이 아니꼬와도 늬들 원래 주군을 위해서 봉사한다 생각해주라. 응?”
─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울라인이 군례를 취했다.
주군이 옳았다. 군주의 위엄은 항상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했다. 단탈리안에 대한 사심 때문에 그걸 경시하다니 크게 질책을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주군은 질책 대신에 위로를 건네주었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울라인은 동료 백 명과 함께 지옥으로 향했다. 중요한 결전을 앞에 두고 바르바토스의 곁을 떠나게 되자 죽음의 기사들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주군의 위엄을 지키는 것 역시 전투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들은 명령에 충실했다.
바르바토스가 그들을 전송하면서 말했다.
“참. 혹시나 노파심 때문에 말해두는데. 너희 난전(亂戰)을 핑계로 단탈리안 죽여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너희가 나한테 죽어요.”
─ …….
칫, 하고 울라인을 비롯하여 죽음의 기사 전원이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단탈리안의 명줄은 꽤 긴 모양이었다. 매우 안타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