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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52화 (152/510)

00152 폭군의 시대  =========================================================================

압도적인 폭거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오백 년의 영광을 간직한 제도를 버린다. 그 영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수도의 시민들을――마치 들짐승을 내쫓듯이 이주시킨다. 더 나아가 역대 황제의 무덤을 파헤쳐서 재정에 보탠다.

폭군.

쿠르츠가 침을 삼켰다. 막사에 앉은 장군들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단어가 스치고 있었다.

싸늘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병사를 얼마나 현명하게 아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쿠르츠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료부총감, 비텐마이어 남작이 있었다. 아직 젊은데도 머리가 하얗게 탈색하여 유명한 자였다. 눈가에 항상 피로가 가득하여 거무튀튀했다.

‘범생이 장군님이잖아.’

쿠르츠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곳에는 황녀파만 자리하지 않았다. 황태자파였던 이, 제2황자파였던 이, 파벌싸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던 이까지, 각계각층의 인재가 모였다. 그중에서도 비텐마이어 남작은 열렬한 황태자파에서 황녀파로 전향한 청년이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아무래도 비텐마이어 남작이 껄끄러웠다. 남작은 조금 지나치게 도덕적이었다. 여태까지 여자를 한 명도 사귀지 않았다는데, 도대체 남자로 태어나 무슨 재미를 보는 것일까 쿠르츠는 의심스러웠다.

“전하께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시고 누구보다 늦게 주무십니다. 병졸들이 굶주림에 신음하는 이때, 타국의 지휘관들은 돼지를 구워삶고 향락을 즐기나 오직 전하께서는 병졸과 똑같은 음식을 입에 대십니다.”

“자그마한 위선이다.”

황녀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감탄했다. 자기가 베푼 선행을 당당하게 위선이라 칭한다. 세상에 어느 지도자가 그럴 수 있겠는가. 바로 자신의 위선을 위선이라 부르는 곳에서 진정한 선(善)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쿠르츠는 알고 있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말했다.

“예. 전하께선 화려한 군복을 거절하고 평사제처럼 헤지고 검은 옷을 입으십니다. 막사의 침구 또한 하급장교와 같은 종류……물론 소인은 그것이 일종의 보여주기식 군정(軍政)임을 압니다.”

“비텐마이어 남작!”

늙은 장수가 노호를 터트렸다.

“됐다.”

황녀가 오른손을 들어 장수를 제지했다. 계속 말하라. 황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나 모든 진실에 약간의 거짓이 섞였듯, 모든 거짓에도 약간의 진실이 섞였다고 소장은 믿습니다. 그 진실됨과 거짓됨을 능수능란하게 조정하는 것……전하께서는 그것을 위선이라 부르실지 모르겠어도, 소장은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군주의 덕목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아니, 범생이가 제법 좋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쿠르츠의 눈빛이 달라졌다. 범생이 비텐마이어는 황녀에게 수도를 버리면 안 된다느니 제국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느니 정론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남작이 말했다.

“제 견식이 짧을지언정 감히 단언합니다. 전하께선 누구보다 군주다우십니다. 그런 분께서 폭군의 행위를 당당하게 선언하셨다……틀림없이 어떤 이해득실이 거기에 담겨 있겠지요. 소장은 전하께서 이해득실을 어떻게 따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타 제장 여러분께서도 저와 마찬가지이리라 믿습니다.”

남작의 말에 막사 안 분위기가 일변했다. 황녀의 폭언을 성토하는 공기에서 어째서 현명하신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는지 들어보자, 하는 공기로 바뀌었다. 그들은 저마다 진지한 낯빛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와. 역시 범생이야.’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솔직히 감탄했다.

남작은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앞장선 것이었다. 먼저 황녀의 덕성을 비아냥거렸다. 약간의 무례를 저지르면서. 그러자 황녀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분노했다. 이것만으로 막사의 공기가 약간 변했다.

직후에 비아냥이 사실은 칭찬이었음을 밝혔다. 적절하게 진실을 보여주되 또한 적절하게 거짓을 감추는 것, 그것이 군주의 덕목이라고 말이다. 이곳에 모여든 자들은 전부 세상을 현명하게 바라볼 줄 알았다. 정말로 그것이 군주의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비텐마이어 남작한테 동의했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을 내던지게 되었다……왜 황녀 전하께서는 척 들어도 자충수에 불과한 작전을 천명했는가? 거기에 무슨 이득이 담겨 있는가?

‘너무 정석적이라 오히려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라니까.’

쿠르츠는 범생이 덕택에 분위기가 일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쿠르츠 역시 충격에서 이제 충격에서 헤어나와 황녀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말했다.

“비텐마이어 남작. 본녀의 질문에 답하라. 수도를 버림으로써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은 어떤 피해를 입게 되는가?”

“존명. 수도를 포기하는 작전에는 단기적인 피해, 중기적인 피해, 장기적인 피해, 총 세 가지 범주의 피해가 있습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먼저 단기적인 피해를 거론하자면 당장 민심이 이반하리라는 것입니다. 청야전술을 펼침으로써 이미 절반에 가까운 국토가 소거되었습니다. 고향을 잃은 백성 중 상당수가 수도 근처에 모여들어 난민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도 인근의 민심은 이미 극도로 불안정합니다……여기서 제국의 상징인 수도마저 버리겠다 공언하면, 더 이상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른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성의 반란이 가장 두려웠다. 평소에야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가히 좋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마왕군이 다가오고, 내부에선 백성들이 준동합니다. 거기에다 아직 적게나마 잔존하는 황태자파와 제2황자파가 편승합니다. 제국은 멸망합니다.”

“중기적인 피해는 무엇인가.”

“제국의 행정이 거의 완전히 파괴됩니다.”

남작이 진지하게 말했다.

“행정이란 단순히 신료와 신료 사이에서 처리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로 보고가 올라가야 하는가. 어디에서 일을 집단적으로 처리하는가. 어느 경로를 거쳐서 정책안이 펼쳐지는가. 그 모든 것이 정해진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수도를 버리고 떠날 경우……설령 반란군을 진압해낼지라도 제국은 한동안 지극히 혼란스러운 정황에 직면합니다.”

과연 군정을 맡은 막료부총감다운 발언이었다.

사람들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황녀가 물었다.

“장기적인 피해는 무엇인가.”

“인간이 더 이상 마왕군에 저항할 힘을 잃습니다. 그 저주받은 마왕이 연설을 한 이후 반년……우리 제국군은 그나마 사정이 낫습니다만. 타국의 군대에선 이미 공공연하게 장교와 병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항명은 분란 수준에도 끼지 못할 지경이라고.”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병사가 장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사태를 누구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들은 병사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최전선을 전전했다.

그 와중에 유시 따위에 맞아 전사한 장군도 적지 않았다……. 재능과 천운을 겸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곳에 앉는 일조차 불가능했으리라.

비텐마이어 남작이 자그맣게 숨을 쉬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이 수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천도인가. 백성을 지키고 수호해야 할 제국이 오로지 황실을 유지시키기 위해 도주한다……국가의 위엄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합스부르크만이 아닙니다. 대륙의 전 백성이 그 광경을 보고 실망할 것입니다. 어차피 귀족이란 그런 것이라 말이지요.”

마왕군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결국 인간은 명분에서 밀립니다, 하고 남작이 말했다.

“소장은 제장 여러분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고 건의하고 싶었습니다. 백성들은 대피시킵니다. 제국의 황실과 귀족은 전원 수도에 남습니다. 그중 도망치려는 귀족도 있겠습니다만, 강제로 붙잡아둡니다. 그리고 마왕군과 맞섭니다. 제국의 귀족은 모두 전사하겠지요. 제국도 멸망할지 모릅니다.”

“…….”

“하지만, 인류의 긍지는 남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쿠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최선의 한수라고 생각했다. 황제에서 기사까지 모든 귀족이 수도를 지키다 전사하는 것이었다.

그 숭고한 멸망에 다시금 귀족과 평민은 단합하겠지.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단지, 이번에는 살에 해당하는 것이 자신들……그뿐이었다. 이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있을까.

“훌륭한 의견이었다. 비텐마이어 남작.”

“황공합니다.”

“허나 세 가지 피해 모두, 본녀는 극복할 수 있다.”

제장들이 놀랐다.

황녀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좌중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눈앞이 아니라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마왕 단탈리안은 본녀가 패륜을 저질렀다 말했다. 본녀의 평판은 곤두박질쳤다. 그런데도 제장들은 본녀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주었다. 고로, 그대들에게는 진실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노라.”

“…….”

“본녀는 합스부르크의 제4황자……내 남동생인 로베르트를 살해했다.”

막사가 얼어붙었다. 다들 믿기지 않는 얼굴로 황녀를, 그리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그럴수가……전하, 그게 무슨…….”

누가 말한 것인지 쿠르츠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여기 모인 전원을 대변하는 목소리였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은 다섯 살 때였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녀는 볼 수 있었다. 허나 내가 보는 것을 대다수의 타인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판단했다. 제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막사가 조용해졌다. 불길하게 조용했다.

아직 합스부르크의 주인은 황제였다. 황제는 그러나 황녀파에 의해 유폐되었다. 제2황자도 외딴 탑에 감금되어 있었다. 현재 엘리자베트 황녀는 사실상 제국의 통수권자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가 입에 멸망을 담았다…….

“마왕 단탈리안이 한 말 그대로이다. 귀족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책임도 의무도 없다. 정책은 그저 자기 파벌에 이익이 되면 좋을 따름. 황실은 어떠한 기준도 없이 간신을 대우하며, 충신은 배척당하거나 시골 영지로 추방당한다. 호칭만 제국이지 그 실상은 썩어 문드러진 송장.”

황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나는 먼저 후계자 다툼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당시 황가에는 본인을 제외하고도 계승권자가 여섯 명이나 있었다. 지나치게 많았지.……그중 두 명을 내가 처리했고, 또다시 두 명은 루돌프 오라버니가 처리했다.”

“무슨……!”

다시 한번 막사가 경악으로 진동했다.

황녀가 자조했다.

“역시 같은 핏줄이었다. 오라버니는 나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한 가지는 똑같았다. 똑같이 패륜아였다. 오라버니도 나도, 필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져 신음할지언저.”

황녀의 자조 섞인 얼굴 너머에는 고독이 서려 있었다.

“로베르트……나의 동생은 외척이 강했다. 브라운슈바이크 대공이 뒷배로 서 있었다. 대공은 필히 로베르트를 앞장세워 황위쟁탈전에 뛰어들 터. 강력한 외척 따위 제국의 안위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고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로베르트를 죽였다.”

“…….”

“순수한 아이였다. 제국이니 외척이니, 그런 것을 아직 접하지 않은 아이였어. 로베르트에게 나는 단지 친절한 누이였다. 즉, 로베르트는 합스부르크의 제4황자로서 죽은 게 아니었다. 나, 엘리자베트의 남동생으로서 죽었다…….”

황녀가 메마르게 웃었다.

“실로 마왕이 옳게 말했다. 나는 역겨운 쓰레기 살인자이다. 오로지 산송장 제국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괴물. 그것이 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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