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50화 (150/510)
  • 00150 매국노  =========================================================================

    한참이 지나고 파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에 촉촉한 감촉이 머물렀다.

    “소녀는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입장이지만요.”

    그녀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한번도 이쪽에서 애원한 적은 없답니다. 서큐버스 여왕으로서 자존심이 달려 있으니까요. 단탈리안이 먼저 부탁한다면 기꺼이 소녀의 육체를 내줄 텐데……어때요?”

    “사양하겠습니다.”

    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컷놈이 가운데 다리 함부로 놀려서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뭐냐?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동시에 취하는 남자가 되라고? 미친 짓이었다. 단번에 정치적인 파국이 일어난다. 난 요단강행 특급열차 티켓을 자발적으로 끊고 싶지 않았다.

    “으음. 의외로 방어가 단단하네요.”

    파이몬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혹시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 같은 유아 체형이 취미인가요? 여긴 꿈입니다. 소녀가 체형을 바꿔줄 수도 있사와요.”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바르바토스와 라우라, 유아 체형의 여자애들이랑 애인이 되어버렸지만 결코 내가 의도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어떤 빌어먹을 운명이 작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성취향을 갖고 있다. 정말이다. 제기랄.

    파이몬이 입을 삐쭉였다.

    “뭐, 좋아요. 난공불락의 성채를 함락했을 때야말로 격조 높은 즐거움을 만끽하니까요. 바르바토스가 생애 처음으로 사귄 남자가 소녀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후후. 멋진 광경이와요. 기대하겠어요.”

    제발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이제 확신했다. 산악파고 평원파고 상위 마왕들은 죄다 제멋대로에다 뇌수를 핑크색 페인트로 물들인 색정광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변태적인 SM 로리년이었고, 무소속 마왕이자 서열 제4위인 가미긴은 금발 마조히스트였으며, 눈앞의 파이몬도 지 옛날 애인 못지 않게 변태였다.

    너희들이 왜 파벌이 갈렸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냥 다 같이 변태파라고 해서 새로운 당을 창설하지 그러냐? 장담해도 좋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마왕군이 통합될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마왕이란 년놈들은 죄다 그 모양 그 꼬락서니다……누누이 강조하건대 나처럼 착실하고 성실한 마왕이 어디 없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파이몬 님.”

    “예, 단탈리안.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요.”

    우리가 오른손을 마주잡았다.

    “더불어서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와요.”

    “……그거 참, 영광입니다.”

    끈질기구만! 난 성욕을 절제할 줄 아는 남자였다. 냉철한 이성을 갖추었다. 파이몬이 아무리 꼬리를 흔들어봤자 넘어가지 않겠다.

    다만 약간 궁금했다. 파이몬은 나에 대해 호감도가 낮았다. 성격을 보건대 그녀가 아무한테나 키스를 해댈 것 같지는 않았다.

    ‘상태창.’

    나는 혹시나 해서 파이몬의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아마도 호감도가 낮아서 가장 기본적인 체력/공격/방어만 표시되겠지. 그 경우, 정말 무서운 가설이지만, 파이몬은 나까지 속여먹고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용사한테 그러했듯이 지금 나에게 연기를 하는 것일지 몰랐다.

    하지만 나의 불안은 깔끔하게 깨졌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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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파이몬

    종족: 마왕   소속: 파이몬 마왕군, 산악파, 해방동맹

    속성: 악(-34)

    레벨: 349   악명: 5354100

    직업: 마왕(S), 던전운영자(A+), 대마법사(廢)

    통솔: 300  무력: 224  지력: 107

    정치: 448  매력: 572  기술: 349

    호감도: 44

    현재심리: ‘그냥 여기서 덮쳐버릴까요?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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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모르겠으나 파이몬은 호감도가 44씩이나 되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파이몬이 호감도 올랐다는 알림창을 본 적이 없는데?’

    그나저나 능력치가 참 편중되었다. 정치랑 매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본인 말마따마 모략이 아니라 정략에 특화되었다는 게 여실하게 보였다. 하긴, 이런 정치력과 매력이 있었기에 마왕군 최대 파벌을 일군 것이겠지.

    ……심리상태가 무척 불길했으나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계속해서 데자뷰가 느껴졌다. 나는 애써 진정하고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파이몬 님. 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겁니까?”

    “그건 또 갑작스러운 질문이네요.”

    파이몬이 흐음, 하고 말했다.

    “글쎄요. 월맹군에서 연설할 때 보고 강렬하게 느꼈어요. 당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소녀의 아군이 되어줄 사람이라고.”

    “아, 그때입니까.”

    연설전 도중이었나. 아마도 황녀를 깨부순 직후에 발생한 일이었다. 적어도 수천 개의 알림창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면서 저 사람 호감도가 올랐느니 이 사람 호감도가 올랐느니 떠오른 적이 있었다.

    홀로그램창 수천 개를 일일이 확인해볼 수도 없어서 나는 대충 한꺼번에 꺼버렸다. 그중에 파이몬의 호감도를 나타내는 알림창이 하나 있었는가…….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더 이상 질문은 없지요? 좋아요. 그럼 당신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예? 소개라니요.”

    “우리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지니.”

    파이몬이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단탈리안.”

    따악, 하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내가 눈을 떴다. 새하얀 공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눈앞는 마차의 천장이 까맣게 있었다. 밤이었다.

    상반신을 허겁지겁 들었다. 마차 맞은편에서 라피스가 잠들어 있었다. 조용한 마차 안에 라피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인가?

    이상했다.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짧은 찰나가 흐른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상쾌하게 숙면하고 일어났을 때처럼 머릿속이 청명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려 천천히 좌석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갔다.

    “어서오세요, 단탈리안.”

    그곳에는 단정하게 흑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파이몬이 있었다.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파이몬의 뒤로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로브를 입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사제와 같이 그들은 장엄하고 정숙하게 섰다.

    폐허가 된 성터. 모닥불이 꺼져 오로지 창백한 달빛만이 내리비치는 그 한가운데에서――파이몬은 마치 시간을 비껴간 성의 안주인처럼, 드레스 양끝을 공손하게 잡아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저희는 해방동맹(解放同盟). 유일무이한 인간계와 마계의 연합단체.”

    처억.

    파이몬을 따라 뒤에 기립한 자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세상에 살아숨쉬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 믿으며, 그리하여 이 세상을 근본의 형태로 되돌리기 위해 결의한 자들. 약속의 그날이 오는 순간까지 피와 땀을 다하여 혁명에 투신하겠노라고 결의한 동지들.”

    “…….”

    나는 넋을 놓고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바라보기에 오른쪽에 있는 사람부터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깨끗하게 녹아들었다.

    턱수염이 북실북실한 아인종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탈리안 전하. 소인은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 초원 엘프와 인간의 혼혈입니다. 해방동맹 모스크바 왕국 지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돈 코사크 기병대의 통수(統帥)를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으로 땅딸막한 난쟁이가 말했다.

    “소인은 자크 보놈. 녹색 턱수염 난쟁이족 출신이옵니다. 해방동맹 프랑크 제국 지부에서 지부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양날도끼 용병단을 이끌고 있습지요. 전하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사옵니다.”

    “반갑습니다. 소인은 와트 타일러라 합니다! 해방동맹 버니시아 왕국 지부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한 명씩 자신을 소개해나갔다.

    모스크바 왕국, 프랑크 제국, 버니시아 왕국, 브르타뉴 왕국, 카스티야 왕국, 사르데냐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튜튼 왕국, 칼마르 연맹국, 폴리투니아 왕국, 아나톨리아 제국……마지막으로 탁한 금발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소인은 안나 더 빗이라고 합니다. 해방동맹 총지부장이자 바타비아 공화국 지부장을 맡고 있지요. 바타비아 공화국의 13위원회 중 말석을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총 열두 명. 대륙에 현존하는 모든 왕국에 그들은 뿌리박고 있었다. 누구는 거대 유목민족의 수장으로. 누구는 왕국의 고위관리으로. 누구는 공화국의 핵심 권력층으로.

    “…….”

    파이몬이 말한 공화주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그것도 각 사회의 요직에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준동한다면 능히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지. 나는 그 위력을 상상하면서 할 말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파이몬이 입을 열었다.

    “소녀는 해방동맹의 수장. 서열 제9위의 마왕 파이몬입니다.”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입니다.”

    “단탈리안. 당신은 설령 죽음의 칼날이 목을 조여도 해방동맹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한 맹세 선언이 아니었다. 아마도 마법적인 계약이 걸려으리라. 파이몬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나는 게임에서조차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로 들어가겠지. 내가 여태까지 가진 정보는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즉 온전히 나의 실력에 따라 생사가 결정된다.

    그런 갈림길의 앞에서.

    “예. 맹세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파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해방동맹의 영원한 동지입니다. 단탈리안, 당신을 환영해요.”

    미리 준비해왔는지 술병과 술잔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피만큼 붉은 포도주가 잔을 채웠다. 나는 그들과 맹세의 건배를 나누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이젠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

    흑사병은 원래 역사보다 훨씬 기세가 약해졌다. 월맹군은 십 년이나 빠르게 발발했고, 역시 게임과 다르게 마왕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륙의 패자가 될 엘리자베트 황녀는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귀족과 농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혁명을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지니.”

    파이몬이 조용히 건배를 선창했다. 해방동맹의 구호였다.

    “혁명을 위하여.”

    사람들이 하나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혁명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나를 포함하여 열네 명이 단숨에 포도주를 비웠다. 그리고 유리로 된 술잔을 바닥에 내리쳐서 깨트렸다. 마왕군의 관습은 이 조직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쨍그랑, 하고 유리들이 맑게 깨지면서 달빛을 하얗게 반사했다.

    ‘평원파든 산악파든, 뭐든지 이용해주마.’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  *  *

    새벽이 다가왔다.

    혁명동맹의 당원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텔레포트 마법을 써서 저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파이몬은 끝까지 남아 있다가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주었다.

    “혁명동맹은 인간계에만 지부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마계에도 있군요.”

    “당신이 지옥의 대공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다니는지, 소녀는 알고 있어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즉, 지옥의 대공들에도 누군지 모르지만 공화주의자가 있었다.

    파이몬과 바알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파이몬을 배웅했다.

    나는 바윗돌에 앉아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새벽의 느긋함에 잠시 마음을 풀고 있자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탈리안 님.”

    라피스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지평선을 쳐다보았다. 라피스 역시 말없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도 지평선을 보고 있으리라.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아니, 이쪽이야말로 미안했다. 네가 감싸줘서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제 당연한 역할입니다.……라피스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었다.

    다만 한 마디.

    “고마워.”

    “예. 감사합니다.”

    그 정도 감사를 주고받으면 충분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새벽의 미약한 햇빛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 매국노 챕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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