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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49화 (149/510)

00149 매국노  =========================================================================

지금까지 나는 게임에서 얻은 정보를 아주 신뢰했다.

평원파라느니 산악파라느니, 하나로 보이던 마왕군이 사실은 여러 파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런 정보가 생소하긴 했다. 허나 생소할 따름이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게임 내용과 상반되지는 않았다.

<던전 어택>에 등장한 내용, 이곳에서 직접 체득한 지식. 두 정보는 서로 오류를 일으키지 않았다. 덕택에 흑사병을 이용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물을 먹일 수 있었다.

파이몬은 달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주인공 용사와 파이몬은 인간계의 도시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서열 제9위의 마왕이 어느 도시에 들렀고, 우연치 않게도 거기엔 용사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쳐서 친분을 쌓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우연이 있었는가. 정말로 우연이었는가…….

나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게임이니까, 시나리오니까. 그 정도 우연은 얼마든지 허용될 만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세계는 단지 게임에 불과하지 않았다. 현실이었다. 현실에서도 그같은 우연이 쉽게 벌어질까? 산악파의 수장이자 가장 유력한 마왕 중 한 사람이 어쩌다 인간의 도시에 마실을 나갔고 하필 어쩌다 용사를 만났다고?

파이몬이 만남을 의도했다. 의도적으로 용사에게 접근했다……이쪽 가설이 훨씬 더 그럴듯했다.

나는 다시금 등줄기가 싸해졌다. 게임 속에서 파이몬이 주인공에게 내던진 말들이 대략이나마 떠올랐다. 그녀는 용사한테 얼마나 달콤하게 속삭였는가.

─ 예, 소녀는 마왕이에요. 용사님을 속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뭐가 문제지요? 소녀는 용사님을 사랑합니다. 종족과 신분, 적군과 아군, 갖가지 은원을 뛰어넘어 당신을 일직선으로 사랑해요. 처음 당신을 본 그 순간부터 그랬듯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듯이.

─ 아휴, 정말. 소녀가 아니었으면 용사님, 벌써 죽었을 거랍니다? 하여간 인간들도 꼴불견이네요. 당신은 용사. 대륙을 구해낸 장본인입니다. 그런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인간이란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우둔하네요. 저희 마인은 적어도 동족을 배신하지 않사와요.

그게 전부 기만이었다.

─ 인간은 정말 멋져요! 대륙에는 공화국이란 게 있다면서요? 그곳에선 인간종과 요정족, 난쟁이족이 아무런 차별을 가하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평등하게 살아간다고 들었어요. 종족의 구별을 뛰어넘어 평등하다……언젠가, 마인과 인간도 그렇게 살아가는 날이 다가오겠지요. 분명히.

─ 죽는 순간인데……소녀에게 입맞춤 정도는 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결국 그녀는 용사의 첫키스를 차지했다. 주군인 황녀가 아니었다. 소꿉친구 역할의 마법사도 아니었다. 용사의 적, 마왕이었다.

파이몬은 죽는 순간까지 원수에게 사랑을 애원했다. 숨이 끊어지면서 그녀가 느낀 것은 용사의 입술이었겠지. 대체 어떤 심정이었는가.

사랑과 연모의 고백,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힌 모습, 최후의 입맞춤, 백 가지의 문장과 천 가지의 몸짓. 그것들을 연기하며 한 명의 서큐버스는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느꼈는가. 지금 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문제예요. 그 강한 인간을 이쪽 편으로 섭외하거나, 간신히 죽인다 가정하더라도 문제 자체가 사라지지 않아요. 어떻게든 둘 사이를 이간질해야……솔직히 소녀, 정략(政略)에 자신이 있어도 모략에는 자신이 없어서요. 문제네요.”

파이몬이 계속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전혀 모르겠지.

내가 웃었다.

“예. 확실히 파이몬 님은 모략에 둔해보입니다.”

“……소녀를 놀리는 건가요? 모처럼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는데.”

“아니요. 진심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공화국을 설립했다. 대단합니다. 하지만 뭡니까, 그 어수룩한 방식은. 지나치게 주변국과 마찰을 빚었지 않습니까. 저라면 대륙을 먼저 혼란에 빠트렸을 겁니다. 가령 월맹군 전쟁이 발발한 시기를 노리면 건국이 쉬웠겠지요.”

“하, 하지만.”

파이몬이 눈쌀을 찌푸렸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인간연합군에 노려질 거예요.”

“인간군의 돈줄을 잡아버립니다. 암스텔이 인간군의 군자금을 댑니다. 파이몬 님은 산악파를 통솔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끝없이 길게 이어지게 하는 거지요. 인간군이 점점 더 군자금에 압박을 받겠지요. 암스텔은 자금을 원조하는 대가로 여러 권리를 하나씩 얻어갑니다.”

“…….”

그래. 파이몬이 바알과 협조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혁명전쟁이라니? 그렇게 지난한 짓을 뭣하러 벌이는가. 도리어 전쟁을 이용해야 마땅했다.

“특히 기사단은 강력하긴 해도 돈 먹는 하마입니다. 기사단에게 빚을 지게 해서 적당히 이쪽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만들지요. 참. 보아하니 파이몬 님은 인간계의 신전들과도 인연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그걸 이용해야지요!”

이런, 이번에는 내가 재밌어졌다. 파이몬의 입장은 말하자면 나보다 훨씬 더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마계에도 권력이 충분하다. 인간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금도 넘치고 인맥도 탄탄하다. 그야말로 즐기는 기분으로 삶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신전들도 월맹군 전쟁을 후원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재정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그걸 노립니다. 신전들에게 면죄부를 발행하게 만듭니다.”

“면죄부요……?”

“당신의 죄를 사하겠다는 증명서입니다. 이걸 구입하면 당신이 그만큼 신에게 충실했다는 뜻이다. 사악한 월맹군을 막아내는 것은 신의 뜻, 그것에 동참하는 것 역시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대충 그런 식으로 광고하면 되겠네요.”

파이몬의 입술이 벌어졌다.

“신전들이, 그토록 부패할 리가.”

“인간이란 적당한 명분만 갖추어지면 얼마든지 부패합니다. 이건 인류를 위해서다. 대륙을 위해서다. 결코 돈이 탐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뭐, 간단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야 순탄한 법입니다. 하지만 점점 빠지겠지요. 신의 이름을 팔아먹으면 이토록 손쉽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

이 세계에는 신성력이 있었다. 신심이 두터울수록 신성력이 강해졌다. 사람들이 신의 권능을 직접 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제들이 강력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자들일수록 광신도로 만들기 쉽다.

사악한 마왕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한다. 이보다 더 고귀한 이념이 있을까? 사제들은 거리낌 없이 귀족과 민중에게 군자금을 내놓으라 요구하겠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돈의 마력에 빠질 것이다…….

전쟁이란 이토록 훌륭한 비즈니스이다.

“면죄부를 팔아봤자 끊임없이 군자금을 충당할 순 없습니다. 한계가 옵니다. 거기서 암스텔이 나서는 것입니다. 면죄부를 대량으로 구입합니다. 백만 골드건 천만 골드건 쏟아붓습니다. 아마 신전에선 이렇게 찬사하지 않을까요? 그대, 암스텔. 인류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도시여! 영원토록 축복받을지언저!”

내가 웃었다.

음, 또 조울증 끼가 도진 것 같다. 기분이 달아오른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던전 어택> 팬이다. 수많은 플레이어들 중에서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뒷사정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무진장 기쁘다.

독립전쟁. 혁명전쟁. 그리고 또 뭐였는가. 해방전쟁이라고 그랬는가?

“그럼 다 끝났습니다. 다 끝났어요. 아인종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종족해방전쟁을 펼친다뇨! 정말 최악의 수단입니다. 그냥 신전한테서 두 번째로 면죄부를 대량으로 구입할 때 이렇게 말하세요. 이번에는 도시 내의 아인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기부금을 냈다고요.”

“…….”

크으. 그래, 그러면 되겠지.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돈은 폭군이 된다. 아인종의 권리를 금화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한다.

인류를 도왔다는 명분과 신을 위해 일했다는 명분이 생긴다. 실질적으로는 암스텔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진 기사단들, 대륙의 정신적 지주인 신전들이 아인종을 인정하게 된다. 명분과 권력이라는 양날개가 있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게 없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 외교전을 펼칩니다. 아마 인간군 지도자들은 이때쯤 전쟁이 끝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할지도 모르겠는걸요. 빚을 전부 갚아야 할 때가 다가오니까요. 그때 속삭여줍시다. 고작 도시 몇 개만 독립시켜달라. 빚을 모두 탕감해주겠다.”

아아. 끝이다. 어차피 암스텔은 어느 국가 하나에 소속해 있었겠지. 프랑크 제국인가? 튜튼 왕국인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하나의 국가이다. 수많은 기사단과 신전이 독립을 줄기차게 요구해오면 그 국가로서는 반항할 수 없다.

무얼, 국가 권력층에 로비를 잔뜩 해두자……그들에게도 체면을 차릴 기회는 줘야 한다. 암스텔이 지금까지 사들인 면죄부를 공짜로 그 국가에 기부하면 어떨까? 그래봤자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대단하겠지.

인류와 신을 위하여 자신의 영토마저 기꺼이 포기한 국가. 그들도 뒷목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게 된다.

봐라. 누구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신전들은 돈을 모아서 좋고, 국가들과 기사단들도 군자금이 줄어들어 좋고. 무엇보다 암스텔은 대륙의 모든 권력층과 사이가 아주 좋아진다. 강력한 외교력을 발휘할 거다. 뭐,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겠지만……독립전쟁이니 해방전쟁이니 수십 년 동안 전쟁을 치루는 것이나 이런 방법이나, 소모되는 자금이야 엇비슷하겠지.

한번 시작하면 간단하다. 월맹군은 수차례나 있었다. 그때마다 군자금을 명목으로 도시를 하나둘씩 독립시킨다. 열세 개의 도시쯤이야 금방 채워진다.

아마도 역사서에서 파이몬의 공화국은 이렇게 불리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공화국, 인류의 수호자, 신의 봉사자――위대한 바타비아 연맹공화국. 남들은 싸우도록 놔둬라. 그대, 축복받은 바타비아여! 돈으로 사라!

“멋지군요……훌륭합니다. 아니, 여기서 그치면 곤란하죠. 대륙 곳곳에 질투와 불만을 심어둡니다. 귀족과 민중의 시기심이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이 면죄부를 샀다. 인류를 지키려고 희생했다. 왜 바타비아만이 독립하는가? 왜 바타비아 시민만이 자유를 만끽하는가?……멋집니다, 실로 훌륭해요.”

월맹군이 거듭할수록 인류의 단합은 서서히 무너진다. 틀림없다.

“시기심과 질투만큼 공화주의를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는 비료는 없습니다. 적당히 공화주의자들을 포섭해서 혁명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혼란이 대륙을 휩쓸겠지요. 인간계의 왕국은 결코 혁명을 좌시하지 않을 터……귀족이 내분하고 민중이 궐기합니다. 아, 여기서 월맹군 원정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모처럼 내분이 일어나는데 괜히 외부의 적이 초를 치면 곤란…….”

“단탈리안.”

차가운 손바닥이 살며시 내 양볼을 감쌌다.

“어?”

내가 퍼득 정신을 차렸다. 파이몬이 두 손으로 나의 뺨을 잡고 있었다. 그녀와 눈길이 직선으로 교차했다. 상대방은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몽롱했다.

“그거 아세요? 바르바토스와 소녀가 아직 친구일 무렵에 있었던 일이에요. 알다시피 바르바토스는 지독한 동성애자랍니다. 소녀도 그쪽 부류에 가까워요. 그래서 이따금 우리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지요.”

충격이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옛날에 커플이었다!

나는 파이몬이 공화주의자라는 걸 알았을 때보다 스물여섯 배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그, 그랬습니까? 뭐라고 할까, 무척이나, 무척, 의외로군요.”

“애인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웠어요. 살내음이 고플 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었지요. 그때 우리가 농담 삼아서 얘기했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말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과연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어라.

왠지 모르게 데자뷰가……?

“바르바토스가 남자 애인을 두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천하의 바르바토스가, 라고 생각했지만요. 후후. 설마 이런 곳에서도 맞수라니. 정말이지, 바르바토스랑 소녀는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요. 기이해도 이보다 기이한 운명이 없어요.”

“네?”

“눈을 감아주세요, 단탈리안.”

눈을 감을 틈조차 없었다.

파이몬은 쓰윽 뒷발을 들어올려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대항하지 못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몸짓이 엄청나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녀의 눈 감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경악했다. 아니, 마왕 년들은 진짜 내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가. 서로 원수원수 거리는 주제에 어떻게 하는 짓은 똑같은가! 네놈들, 사실 사이가 의외로 나쁘지 않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나마 파이몬은 혀를 집어넣지 않았다. 입술의 감촉만 즐기는 듯했다. 바르바토스에 비하면 양반이지 않은가.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아니, 파이몬은 서큐버스 퀸이다. 바르바토스가 색정 마법을 걸었듯이 이 녀석도 뭔가 수작을 부려올지 모른다. 제기랄. 제발 나에게도 체면을 차릴 기회를 달라……나는 별 저항도 못한 채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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