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48화 (148/510)

00148 매국노  =========================================================================

내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서열 제9위.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여 끝내 동족을 배신하고 만 마왕. 던전 어택의 플레이어들이 말하기를 희대의 창녀, 혹은 순진무구한 짝사랑의 여인. 마족 입장에서는 최악의 매국노. 그것이 내가 지금껏 생각해온 파이몬이었다.

바타비아의 건국에 그녀가 개입했다는 얘기 따위……게임 시나리오는커녕, 설정집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내가 간신히 목소리를 다듬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인간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야 당황해주는군요.”

파이몬이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여자는 누구인가. 나는 여태까지 누구를 상대하고 있었던 거냐.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어요. 모든 것이 새로웠지요. 과장해서 말하면, 소녀는 사실상 세상을 다시 창조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 정말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요.”

“…….”

“하지만 성공했어요.”

주변 풍경이 마을을 비추었다. 한적한 어촌이었다. 갯벌과 나룻배, 허름한 오두막 몇 채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파이몬이 손을 흔들자, 시간이 빠르게 가속했다.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부두가 세워졌다. 항구가 세워졌다. 높다란 건물들이 들어섰고, 하얀 성벽이 쌓였다. 그것은 도시가 되었다. 돌바닥이 평야와 늪을 덮었다. 십수 개의 수로가 도시 한복판을 지났다. 그 위로 사람들이 곤돌라를 띄워 오갔다.

대신전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푸른 바다 도시의 하늘에서 아득하게.

“비타비아 공화국의 수도, 암스텔이 세워지는 데 이백 년.”

“…….”

“그동안 축적한 재산과 정보력,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거기에 오십 년. 고대 공화국의 이념을 물려받는다는 명목으로 혁명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육십 년. 마지막으로, 아인종을 해방한다는 대의명분으로 해방전쟁을 부추겼습니다. 제4차 월맹군까지 가세, 여기에 다시 육십 년.”

파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눈앞의 풍경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수십 척의 거선(巨船)으로 이루어진 대함대가 암스텔 앞바다를 헤쳐 나아갔다.

“마침내 사백 년. 소녀는 열세 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도시연합체, 바타비아 연맹공화국을 만들어냈어요.”

그녀가 한동안 자신이 이루어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파이몬은 침묵함으로써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이상은 자신을 실현시키는 힘을 지닐 때 더 이상 망상이기를 멈춘다. 잭 올란드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파이몬은 이상을 가졌으며, 그것을 실현하고자 행동했으며, 심지어 정말로 성공했다.

왕과 기사가 판치는 이 중세 한복판에――오롯하게 혼자서 공화국을 세운 것이었다.

이 무슨 과업인가.

위대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한참 부족했다. 원래 세계의 역사를 어깨 너머로 배운 나조차도,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며 허무맹랑한 망상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걸 파이몬은 실제로 이룩했다.

‘……!’

그때 뇌수가 전율에 떨었다. 한 가지, 말도 안되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가정이 떠올랐다. 서열 제1위의 대마왕 바알. 그는 어째서 파이몬과 월맹군 제1군단에게 하필 튜튼 왕국-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을 맡겼는가.

최악의 가설. 지금까지 생각해본 그 어떤 가정보다도 흉악한 가설 한 가지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조직되었다.

목이 몹시 탔다. 내가 차를 마셨다. 최대한 침착하게 찻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바알 대왕과 파이몬 님은……어떤 관계입니까.”

파이몬이 시선을 바다에서 이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놀라워요. 하지만, 그래요.”

그녀가 면목없다는 듯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가 말해버리면 조금 주제가 넘는 것이랍니다.”

그 한 마디가 이미 거의 모든 것을 대답해주었다.

“…….”

나는 안간힘을 다해 평정심을 찾았다. 마왕군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서열 제1위의 바알. 마왕군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 서열 제9위의 파이몬. 두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모종의 협력관계에 놓여 있었다.

‘제기랄. 바르바토스, 너는 알고 있었냐.’

아니다. 바르바토스는 모른다. 그녀는 바알을 존중한다. 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기도 한다. 파이몬과 바알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태도가 달라지겠지. 평원파는 둘 사이의 동맹을 모른다……아마도, 산악파의 다른 마왕들조차 모른다.

이야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파이몬이 어떤 이상을 가졌는지 따위, 여기까지 와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파이몬은 실제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 산악파를 통솔할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계의 국가 하나를 막후에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 영향력은 바타비아 공화국을 넘어서서 대륙 이곳저곳에 암약하는 공화주의자들까지 포섭하리라.

심지어……정확히 어떤 동맹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대마왕 바알이 파이몬을 후원하고 있었다.

‘협력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침을 삼켰다.

‘반드시 협력해야만 하는 거다.’

이건 결단코 이용해먹어야만 했다. 사상에 설득력이 없다? 알 바 아니었다. 마왕군과 인간군 전체에 손길이 닿은 권력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녀에게 호의를 얻어내어 나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든 나의 이익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나는 이미 파이몬과 밀월 관계를 맺기로 마음먹었다.

“단탈리안. 당신은 아까 소녀에게 과연 마인의 공화정이, 더 나아가 인간과 마인의 공화정이 실현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지요. 이것이 소녀의 대답입니다.”

그녀가 팔을 벌려 도시를 가리켰다.

“예. 가능해요.”

파이몬이 단언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에서는 아인종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만 명의 엘프와 삼만 명의 난쟁이가 도시에서 인간과 섞여 살고 있어요. 이천 년 전에는 엘프와 난쟁이도 똑같이 마족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단탈리안, 오늘 우리가 현실이라 여기는 것이 한때는 꿈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노래하듯 말했다.

“이천 년을 살아온 소녀는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은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가서 때때로 우리의 눈을 속이지만 그것은 지금도 일초일분, 단 한뼘도 생략할 수 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혹자는 그것을 역사의 흐름이라 부르겠지요. 혹자는 그것을 여신이 자아낸 운명이라 칭송할 거예요.”

파이몬이 다소곳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그것을 꿈의 실현이라 부릅니다. 삶이란 가혹하고 비루하여 언제나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소녀와 당신이, 이윽고 모든 인간과 마인이 삶에 절망하고 더 이상 꿈꾸기를 포기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닙니다. 언젠가 이상이 천박한 농담거리로 전락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더 이상 소리높여 울부짖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닙니다.”

“…….”

“언젠가 모든 위대한 깃발이 쓰러지고 모든 전사가 죽어나가, 신들이 대지를 떠나고 오로지 복수와 기만만이 남아 대륙을 유령처럼 떠돌게 될지도 모릅니다. 산맥은 더더욱 가팔라지고 골짜기는 더더욱 낮아지며, 이윽고 만인이 만인의 노예로 전락하는 그날이 정말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닙니다.――오늘, 우리는 멸망의 그날이 결코 오늘이 아니며, 내일 역시 아닐 것이라 믿으면서 한 발자국 나아갑니다.”

파이몬이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발은 어디로 향하기 위해 있고, 우리의 손은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있어요. 소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니라면 어째서 마왕인 우리, 인간도 아니고 마인도 아닌 우리에게 여전히 두 발과 두 손이 있을까요.”

“…….”

“단탈리안. 소녀와 함께 오늘을 걸어주세요. 그리고 내일을 잡아주세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새하얀 손을 쳐다보았다.

몽마(夢魔). 사람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종족. 갖가지 쾌락으로 사람을 희롱하고 만족시키며 상대와 함께 꿈속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거주한다. 그러나 내 앞에 선 여인은 꿈속에서 안주하기를 버리고, 직접 현실에서 나아가고 있다. 현실 자체를 꿈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기에 그녀는 마땅히 서큐버스의 여왕이라 불린다.

“한 가지……질문이 있습니다.”

나에겐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입을 열었다. 던전 어택에서 파이몬은 마족을 배신했다. 어째서 그랬는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얼마든지 물어주세요.”

“약간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파이몬 님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무척 중요한 질문입니다. 되도록 진지하게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파이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심스레 단어와 문장을 골라가면서 말했다.

“예컨대……아주 강력한 인간이 있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강력하지요?”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보다 열 배, 백 배 더 강합니다. 제국의 제1급 검사, 소드마스터조차 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 인간이 나아가는 길에는 마인의 시체밖에 남지 않습니다. 바알 대마왕조차 그를 단신으로 격파할 수 없습니다.”

파이몬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뭐라 토를 달지 않았다. 되도록 진지하게 대답해달라. 나의 그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믿기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던전 어택의 세계에는 정말로 그 같은 용사가 생겨날 예정이었다. 그 칼날에 제파르 대장이 죽는다. 벨레드 형님이 죽는다. 바르바토스마저 목이 잘리고, 파이몬, 당신조차 싸늘하게 죽는다.

그리고 대륙에서 마왕군은 쫓겨난다.

“그 인간은 교묘하게도 우리 마왕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상대합니다. 우리는 차례대로 격파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마왕 전원이 전사하고 말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파이몬 님은……그러니까 만약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면, 파이몬 님은 어쩌겠습니까?”

“…….”

파이몬이 턱에 손을 괴었다. 그녀가 두어 번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마왕군이 연합해서 그를 공격할 수가 없나요?”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는 군대를 통솔하지 않습니다. 한 명. 아무리 많아봤자 열다섯 명 정도의 소부대를 이끌고 이쪽을 공격해옵니다.”

“즉……고작 열다섯 명만으로 우리들 전원을 차례대로 격파할 수 있는 집단. 그런 집단을 상정해보라는 얘기로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몬이 고심에 빠졌다.

“정치적으로 말살할 수는 없을까요?”

“인간계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가 그를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으음. 인간계가 통일되어 있나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단탈리안이 상정한 상황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는 어느 나라를 통치하고 있지요? 합스부르크 제국인가요? 아나톨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입니다. 지금처럼 월맹군에 패퇴한 제국이 아니라, 온전히 강대한 국가로 거듭난 제국이지요.”

파이몬이 입가를 씰룩이면서 흐으으음, 하고 신음했다.

“그럼 소녀라면 인간계를 분열시키겠어요.”

“…….”

“합스부르크 제국은 대륙의 중원에 위치하지요. 강대할 경우에는 그만큼 대륙 전역에 권력을 행사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주변에 적이 많답니다. 그래요. 가령 소녀라면 프랑크 제국이나 브르타뉴 왕국을 부추기겠어요.”

나는 조용히 감동했다.

파이몬은 어느새 내 시나리오에 열중하여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가 이대로 성장하면 위험하다. 그대들이 적극적으로 합스부르크를 견제해야 한다. 두 국가 중에 한곳은 걸려들겠지요. 잘만 하면 두 국가의 동맹을 유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인간들 간의 전쟁을 유도합니다. 인간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 강력한 인간을 해치워요.”

그런가.

<던전 어택>에서 인간계의 분열을 일으킨 배후의 장본인이 파이몬, 당신이었는가.

대부분의 마왕들이 속수무책으로 용사에게 당하고 있을 때――.

“어때요, 단탈리안. 이러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파이몬.

당신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용사의 정치적 말살을 계획하고 있었는가.

“……확실히, 훌륭하기 그지없는 한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법도 실패했습니다. 합스부르크를 통치하는 군주는 실로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막강하여,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단탈리안.”

파이몬이 이쪽을 흘겨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군주가 있겠어요? 바알 님보다 강한 인간이 있다는 것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전제인데, 대륙을 거의 통일시킬 정도로 고강한 군주라니. 불가능해요. 그거, 설령 그 강하다는 인간을 죽이더라도 오히려 군주 쪽이 무서운 거 아닌가요? 강한 인간을 죽여도 문제가 남을 것 같은걸요.”

“그 불가능을 전제로 받아 들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으음.”

파이몬은 몇 번이고 으음, 하고 신음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가 한숨을 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뭐, 그러면 소녀가 몸이라도 팔아야겠지요.”

“…….”

“그 인간이 남자든 여자든 이래봬도 소녀는 서큐버스의 여왕. 인간 한 명쯤이야 함락할 자신이 있답니다. 최대한 그 인간에게 호의를 배푸는 척해서 신뢰를 얻어요. 그런 다음에는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해서 소녀를 사랑하게 만들겠어요.”

그렇게.

“그것도 안 되면, 항복이와요. 후후. 소녀는 더 이상 수를 생각할 수 없겠는걸요.”

나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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