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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47화 (147/510)
  • 00147 매국노  =========================================================================

    모든 풍경이 사그라졌다. 몬스터의 시체도 평야도 전부 사라졌다.

    주변이 온통 하얘졌다. 남은 것은 바르바토스와 파이몬뿐이었다.

    끝없이 새하얀 공간. 그곳에 소녀가 쥐어짜는 울음소리만 나지막하게 깔렸다. 현실과 지독하게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마냥 하얗기만 한 공간이 파이몬에게 도리어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원초적인 형태의 기억이겠지.

    누구나 그런 기억을 하나쯤 놔두고 살아간다.

    “소녀는 저때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앞으로 다 잘 될 거라고, 바르바토스를 위로해줄 수 없었어요. 아마 어느 정도 직감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싸울 날은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나는 이때쯤 해서 파이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가 순전한 공화주의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구애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마왕이었다.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결코 완전무결한 신뢰를 얻지 못했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설득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꿈이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자신이 어떤 삶을 겪었는지. 거기서 무엇을 느꼈는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는지. 그걸 전부 꿈속에서 생생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정말 숭고한 태도네.’

    자신의 삶을 낱낱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재낀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묻는다. 이런 나에게 협력해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아, 파이몬.’

    내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보아라. 청문회에서 진 빚을, 너는 월맹군의 설전에서 날 구해줌으로써 충분히 보답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제 감정의 응어리 말고는 아무런 은원도 남지 않았다.

    ‘대등한 관계인 거다.’

    너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 얼마나 정교한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가. 거기에 한몫 보탤 경우 나에게는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가. 나는 쉬운 남자가 아니다. 제대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단탈리안. 당신은 아마 이유를 알고 있겠지요. 왜 월맹군이 계속 실패했는지.”

    “마왕이라고 한들 상위 마왕과 하위 마왕의 힘은 천차만별. 대륙이 통일될 경우, 상위 마왕은 하위 마왕을 압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는 인간과 마인이 아니라, 마인과 마인 사이에 대전쟁이 일어나겠지요…….”

    “정확해요.”

    파이몬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소녀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그 전까지는 단지 보급선이 인간군에 의해 파괴된 줄로만 알고 있었지요. 동족인 마왕이 설마 인간군에 몰래 정보를 흘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뒤늦게 그들을 추궁해보려 했지만, 역시라고 할까요.”

    증거가 전혀 없었다.

    하위 마왕들은 필사적으로 보급선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신출귀몰하게 몰아치는 기사단의 습격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끝까지 보급기지를 사수하려다 목숨마저 잃은 하위 마왕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월맹군에 충실했던 자들이겠지요. 인간군과 내통하기를 거절했다. 혹은 거절하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숙청당했을 거예요……아니, 차도살인지계에 당하여 인간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을지 몰라요.”

    상위 마왕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위 마왕들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인간군이 잘했다. 혹은, 대륙 깊숙이 진군해 들어간 상위 마왕들이 잘못했다. 그들의 작전 때문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졌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바르바토스를 비롯해 우리 상위 마왕들은 도리어 하위 마왕들에게 사죄했어요. 우리의 잘못된 작전 때문에 월맹군 원정을 실패해버렸다고요.”

    그러나 파이몬은 한 발자국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일개 서큐버스에서 마왕까지 올라선 그녀이기에 하위 마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위 마왕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하지만 파이몬 님. 저로서는 아직 왜 파이몬 님이 산악파를 만들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하위 마왕들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러면 제3차 월맹군, 제4차 월맹군에서 함정을 파놓고 기다려도 되지 않았습니까?”

    나라면 그랬을 거다.

    대륙 깊숙이 진군한 척하면서, 하위 마왕들이 배신하는 순간을 노려 급습한다. 하위 마왕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지. 저쪽에서 배신을 획책했다고 밀어붙이면 명분까지 거머쥔다. 이게 상책 아닌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와요.”

    “더 중요한 문제?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대륙 통일 이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파이몬이 말했다.

    “소녀는 대륙통일이야말로 마인 전체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어요. 인간계를 정벌하기만 하면, 마인들이 평화와 풍족을 만끽할 거라고 믿었어요. 그렇지만 대륙통일은 오히려 전화의 시발점. 지금까지 인간계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하나가 되었던 마인은 뿔뿔이 나뉘어서, 각자 자기가 신봉하는 마왕을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겠지요.”

    한 사람의 제왕. 한 사람의 마왕을 위해서 마계 전체가 전화에 휩싸인다. 무엇을 위한 대륙통일인가. 마인 전체를 위해서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말 따위,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과연. 파이몬은 월맹군 원정 자체에 의구심을 품은 것인가.

    “소녀는 깨달았어요. 인간은 필요악이었어요. 인간에게도 마인은 필요악이었습니다. 만약 세계에 인간이나 마족, 어느 한쪽이 없었다면 그 종족은 자신들끼리 끝없이 전쟁을 벌였을 거예요.”

    “…….”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대륙이 통일되지 않아도, 대륙을 통일해도 전쟁은 일어나요. 이상한 일 아니겠어요? 어느 백성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재산이 보장된다면 인간도 마인도 구태여 죽음의 전장에 발을 들이지 않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파이몬이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지배자들 때문입니다.”

    “…….”

    “만약 전쟁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려면 백성들이 찬성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백성들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모든 고난을 스스로 떠맡아야 합니다. 스스로 창칼을 쥐어 살인해야 하고, 스스로 전쟁비용을 지출해야 하고, 전쟁 때문에 쑥대밭이 된 도시와 마을도 스스로 복구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당연히 전쟁에 쉬이 찬동하지 않겠지요.”

    파이몬의 목소리에 열기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달라요. 그들은 백성이 아닙니다. 백성의 주인이에요. 더 큰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지금 가진 재산을, 백성의 목숨과 백성의 터전을, 마치 도박에서 돈을 거는 것처럼 내걸지요. 소녀는 깨달았습니다.――인간계이든 마계이든, 사회가 누군가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이상, 전쟁은 결코 단절될 수 없사와요!”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가 조용히 분노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우리 마왕은, 얼마나 우둔했었나요! 마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인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정작 죽어나간 것은 마왕이 아니었어요. 오직 극소수의 마왕만이 전사했습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것은――수만, 수십만씩 죽어나간 것은――마왕이 아니라 마인이었어요!”

    파이몬이 이빨을 으드득거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어요! 위선이고 기만이었습니다. 대륙이 통일되어도 위선과 기만은 끊기지 않겠지요. 더더욱 화려하게 불타올라, 인간계, 마계, 이윽고 세계 전체를 태워버릴 게 분명합니다. 단지 우리 마왕이 인간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단지 그들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멸망시키고자 했고, 수십만의 마인을 희생시켰습니다!”

    주변 풍경이 일변했다. 새하얀 공간이 사라지고 전쟁터가 펼쳐졌다.

    오크가 마을에서 인간을 학살하고 있었다. 비명과 신음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이 고블린 부락을 몰살시켰다. 어린 고블린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다 그 여린 가슴에 화살이 박혀 절명했다.

    학살, 끝없는 학살이 이어졌다.

    “우리 마왕의 잘못이었어요!”

    파이몬이 울부짖었다.

    “인간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마인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완벽한 군주가 만인을 통치하는 이상국가. 그 허울 좋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 마왕이 모두를 속였어요……!”

    지난 이천 년 동안 여덟 번의 월맹군 원정이 있었다. 제3차 월맹군 이후 산악파는 줄곧 월맹군 원정에 소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산악파 마왕을 따르는 마인들은 대부분 생존했다. 반면에, 평원파 소속의 마인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갔다.

    평원파는 산악파를 배신자라 불렀다. 산악파에서는 도리어 평원파야말로 마족에 대한 배신자라 비난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쪽이 잘못되었는가…….

    내가 말했다.

    “그래서 공화정을 세우기로 결심했군요.”

    “예.”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은 결국 모조리 사라져야 마땅해요.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들은 서로의 감정을 읽지 못해요.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처럼 사고하고, 우리처럼 행동합니다.”

    마왕은 잘못된 존재이다.

    파이몬은 그렇게 단언했다.

    “인간이, 마인이, 스스로 사회를 세우고 스스로 사회를 다스려야 해요. 그래도 다툼은 끊이지 않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해할 거예요.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이성적인 존재자라고.”

    그녀의 두 눈은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

    흥미 깊은 이야기였다. 원래 세계에서 역사가 어찌 흘러갔는지 아는 나로서는, 절반은 동의하고 싶었고 절반은 반대하고 싶었다.

    파이몬의 말이 옳다. 결국에는 공화정이 승리한다. 하지만 저 '결국'이라는 낱말 하나를 발음하기 위하여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가?

    수십만 단위가 아니다. 수백만 단위조차 아니다. 수천만이. 그것도 몇 번이고 학살하고 학살당한다……그 피의 무게를 '결국'이라는 단어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정적이었다.

    “파이몬 님. 실례지만, 저에게는 파이몬 님이 단순한 이상주의자로 보이는군요.”

    당신의 의견에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담겨 있지 않았다.

    “제가 단언하겠습니다. 파이몬 님의 이상대로 공화정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그것도 인간과 마인이 서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무수한 핏물이 필요합니다.”

    “……예. 소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인가? 정말로 어느 정도의 피가 흐를지 각오하고 있는가.

    내가 말했다.

    “대륙통일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마인들이 흘리는 피. 공화정을 이룩하기 위해 인간과 마인이 흘릴 피. 양자를 비교해보면, 아마 별반 다를 바가 없겠지요. 어느 쪽이든 마인들은 희생됩니다. 알겠습니까?”

    바르바토스의 이상을 쫓든 파이몬의 이상을 쫓든 어차피 마인들은 피의 대가를 치른다. 그럼 말이다, 파이몬.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왜 바르바토스는 안 되고 당신은 됩니까?”

    “…….”

    “그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저 또 한 명의 마왕에 불과합니다. 마왕이라는 이름의 불이지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세계 전체를 불태우며, 불빛에 눈이 먼 마인들이 부나방처럼 뛰어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이들을 괴물이라 부릅니다.”

    다른 말로 강자(强者)라 부른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자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고고한 이상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라고 스스로 속이는 자들.

    나는 아니다. 누군가를 살해할 때 변명하지 않는다. 어떤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서도 아니다. 호크, 잭 올란드, 리프……모두 순전히 나의 이기심 때문에 죽었다.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당신의 사상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솔직히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바르바토스 역시 똑같은 의미에서 숭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저를 설득하고 싶다면 단지 사상을 울부짖지 마십시오. 이득을 제시해주세요. 적어도 청사진을 제시하십시오. 공화정, 좋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룩할 생각입니까? 가능성이 있습니까?”

    파이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물끄러미 지켜볼 따름이었다.

    잠시 기다렸다. 역시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실망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으로 이상을 바라보되 현실에 발을 딛어주시길. 저는 당신을 속일 수도 있었지만, 당신은 지난 월맹군에서 절 구했습니다. 이번 습격에서도 저를 도와주었지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다음에도 제가 오늘처럼 솔직하게 말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여긴 꿈속이었다. 걸어봤자 어디로 나가진 못하겠으나, 나 나름대로 어서 꿈을 끝내달라고 말없이 요구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걸었을까.

    “청사진이라면 있어요.”

    파이몬이 등뒤에서 말해왔다.

    “소녀 역시 우둔하지만은 않사와요. 천칠백 년 전, 아직 공화정이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했던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소녀는 이것을 지극히 신중하게 실험해야만 한다고 결심했어요.”

    “호오.”

    나는 등을 돌리지 않고 맞장구 쳤다. 그래서?

    “소녀는 생각했지요. 마왕처럼 이질적인 존재가 있는 마인사회보다는 오히려 인간사회에서 공화정이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고. 공화정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아보려면 먼저 인간계에서 실험해보자고.”

    “……!”

    그 말에는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이몬은 여전히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이 확신이 넘쳤다. 설마, 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

    “바타비아 공화국.”

    파이몬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인간계에서 유일무이한 공화국이지요. 혹시, 그런 유별난 국가를 인간들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셨나요?”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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