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46화 (146/510)

00146 매국노  =========================================================================

*  *  *

눈앞에 파이몬이 있었다.

아래를 살펴보자, 나는 신발을 신었다. 그것만으로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찌된 일인가. 나의 머리가 재빠르게 해답을 찾아냈다.

- 서큐버스 퀸.

파이몬의 종족이다. 그녀는 마인으로 태어나서 마왕으로 각성한 부류에 속한다. 서큐버스는 인간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한다. 그 능력은 파이몬이 마왕이 된 이후로도 이어지고 있다. 게임에서도 용사가 몇 번 파이몬과 꿈속에서 대화했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 녀석, 암살자 집단에 숨어들어 있었군.’

서큐버스의 능력이 만능은 아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의 꿈까지 다룰 수는 없다. 근처에 있어야만 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파이몬은 암살자 집단에 몰래 섞여 있었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놈들 중에 그녀가 있었겠지. 그리고 평범한 암살자인 척 가장해서 나를 지켜보았다. 하늘색 여인과 내가 나눈 대화도 전부 들었으리라.

제기랄. 나의 실착이었다.

‘감정이 극도로 적은 암살자들 사이에 끼어서 자신을 숨겼어.’

마왕은 마왕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암살자들이 평범한 몬스터, 가령 오크였다면 나는 금세 파이몬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른 몬스터와 다르게 유독 한 녀석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상하다고 여겼을 테지.

암살자들은 감정이 매우 무미건조했다. 나뭇잎을 수풀에 숨긴 격이었다. 제법이다, 파이몬……. 나는 얼굴에 예의 바른 미소를 띄우면서 얼굴을 까닥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파이몬 전하.”

“역시, 당황하지 않는군요.”

파이몬이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소곳하게 웃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당신이 놀라는 얼굴을 한번쯤 눈앞에서 보고 싶었어요.”

“충분히 놀라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하루에 벌써 수십 차례 놀라버려서 말입니다. 더 이상 호들갑을 떨 여력이 없습니다.”

그녀가 드레스 끝자락을 들어올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요. 단탈리안.”

“예. 이런 식으로 재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리 둘 사이에 탁자가 나타났다. 하얀 탁자보가 깔렸고 도자기 다기(茶器)가 놓였다. 다가가서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고마워요, 하고 파이몬이 의자에 앉았다.

“꿈이란 놀랍군요.”

내가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엇이든 가능합니까? 예컨대 드래곤을 소환한다든지.”

“소녀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것만 재현할 수 있사와요.”

파이몬이 도자기 주전자를 잡아 잔에 찻물을 따랐다. 녹차였다. 잔에 천천히 찻물이 고여가는 동안 주변 풍경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황금빛 비늘의 드래곤이 탁자 바로 근방에 나타나서, 꼭 졸린 강아지처럼 땅에 턱을 박고 잠들었다.

“대단하군요!”

내가 감탄했다. 진심을 다해 놀란 것이 아니었다. 왜 파이몬이 꿈속에 침입했는가, 나는 그것을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다. 파이몬에게 이리저리 말을 건 까닭은 생각할 틈을 벌기 위해서였다.

- 하늘색 여인은 내 속마음이 어떠한지 떠보았다.

- 십중팔구, 파이몬이 여인에게 그러하라고 지시했다.

- 나는 거기에 대뜸 걸려버렸다.

만약 내가 진짜 공화주의자였다면 여인의 말을 반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파이몬 입장에서는 내가 정말로 공화주의자인가, 혹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상을 이용한 것 아닌가, 충분히 의심할 법했다.

“서큐버스가 밤의 종족이라 불리는 이유가 다 있었군요. 제 부하도 서큐버스입니다만, 이런 재주를 보여준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서큐버스의 피를 강하게 타고나지 않았을 거예요.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순혈 서큐버스만이 꿈을 거닐지요.”

그런데도 나에게 접촉해왔다. 사상적 동지가 아니라며 실망하고 떠났을 수 있었는데, 굳이 꿈속에 들어와서 나와 얘기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자신과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것만 의도하지 않았다……목적이 무엇인가. 그걸 알아내야만 했다.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사와요, 순혈이 아니라는 것은.”

“호오. 어째서 그렇습니까?”

“가정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무슨 뜻일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파이몬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보다시피 서큐버스는 아주 많은 것을 꿈속에서 만들어요. 남자들은 거기에 매력을 느끼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서큐버스와 짝을 짓게 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거기에 빠진답니다.”

풍경이 바뀌었다. 드래곤이 사라지고 주변을 수십 명의 미인이 채웠다. 하렘의 광경이었다. 하늘거리는 옷자락 하나만 걸치고 여인들이 농염한 살색을 드러냈다.

“결국 남성은 현실을 등지게 되지요. 완전무결한 꿈과 비루한 현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명약관화……아내도 무시하고, 아들딸도 무시합니다. 꿈속에는 현실의 아내보다 아름다운 아내가 있고, 현실의 자식보다 완벽한 자식이 있는걸요. 그래서 대다수의 서큐버스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지 않사와요.”

어차피 배신당하니까요.

파이몬이 찻잔을 내 쪽으로 놓았다. 나는 공손하게 잔을 들여올렸다. 녹차의 맛은 훌륭했다. 적당히 씁쓰름하고 따뜻했으며, 혀에 묻은 때를 말끔하게 벗겨주었다.

“소녀는 오래 전에 생각했사와요.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있다. 가장 맛있는 음식도 있다. 그럼 어쩌면――가장 완벽한 사회를 꿈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완벽한 사회라.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설마요.”

파이몬이 웃었다.

“불가능하겠지요. 적어도 그때는 불가능했고, 지금도 여전히 불가능해요. 하지만 소녀는 서큐버스. 한밤의 꿈을 사람들에게 파종하는 종족. 소녀 자신에게 하나의 꿈을 허락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는 일은 아니라고 믿었어요. 단탈리안. 소녀도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꿈이 필요했답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래요. 이천 년 전이지요. 마왕이 다스리는 세계야말로 가장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사와요.”

또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 우리는 병사들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탁자 주위를 오크, 오우거, 트롤이 쉴 새 없이 지나쳤다. 수만 마리의 대군. 그들은 대열을 이루었고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을 맨 앞에서 이끄는 자 세 명이 있었다. 소녀와 여인, 초로의 남성이.

─ 군대여! 마인이여! 그대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중 백발의 소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은빛 투구와 갑옷을 입었다. 햇빛이 그녀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파이몬이 그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바르바토스예요. 지금이랑 별로 다르지 않죠?”

“저때는 갑옷을 입고 있었군요.”

“저 당시 바르바토스는 흑마녀가 아니라 무사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소녀의 양옆에 선 여인과 남자는 각각 파이몬과 마르바스일까. 지금은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로 갈라진 세 사람이 이천 년 전에는 같은 곳에서 군대를 지휘했는가.

바르바토스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외쳤다.

─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우리는 정복의 귀신이다. 그러나 승리를 이용해먹지 못하는 멍청이 새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군인이여. 사탄의 위대한 후손들이여. 다시 무기를 들어라. 안락한 휴식 따위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 우리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잃어버릴 수 없다. 나약한 인간은, 겁쟁이 마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충분히 싸웠다. 이제 쉬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종족과 신분을 뛰어넘어 오직 진정한 전우애로 하나가 된 우리는, 입을 모아 소리친다.

─ 더 많은 전투를! 더 많은 피를!

─ 영원한 영광이 아니라면 차라리 영원한 죽음을!

몬스터들이 함성을 지른다.

제멋대로 뿔나팔을 불어재낀다. 북이 울린다. 발을 구른다. 대지가 진동하고, 멀리 평원 너머에서 인간들이 그 진동을 느끼며 공포에 질린다. 월맹군 제1군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전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는 군단이다. 불멸의 바르바토스와 승리의 파이몬 그리고 고귀의 마르바스――세 마왕이 이끄는 정예군단에 인간들은, 심지어 기사조차, 심장이 질겁하고 무릎이 떨린다.

─ 내가 약속한다. 우리가 약속한다. 그대들과 함께하는 마왕은 결코 뒤에 숨지 않으리라. 우리는 겁쟁이와 다르다. 우리는 전사이며, 따라서 전사인 그대들과 함께 살며 함께 죽는다.

─ 우리는 최전선에 있다!

─ 그대들이 기사의 오러에 쓰러져서 절망하며 고개를 올려 들었을 때, 그곳에 우리가 서 있으리라. 그대들이 무릎을 땅에 처박고 도저히 어찌할 도리 없는 무력함에 시달릴 때, 그대보다 바로 한 걸음 앞에 우리가 서 있으리라.

─ 전사들이여! 우리는 최전선에 있다!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치켜든다. 검은색 마력이 요동치며 그녀의 손에 전투 대낫이 소환된다. 마력은 그대로 공중으로 용오름치며 울부짖는다. 그와 동시에 여인과 남자, 파이몬과 마르바스도 손을 들어올린다. 파이몬의 손에는 백색 지팡이가. 마르바스의 손에는 장검이.

─ 인간들에게 보여주라! 누가 이 대지의 진정한 죽음인지!

수만의 몬스터들이 팔을 들어재낀다. 창칼이 하늘 높이 찌른다. 햇빛이 날붙이를 반사하여 수천수만의 빛무리가 해일을 이룬다. 고블린은 고블린의 언어로, 오크는 오크의 언어로, 트롤은 트롤의 언어로 고함을 지른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이 동료의 말을 알아들을 필요가 없다.

주군이, 위대한 마왕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아줄 테니까.

─ 사탄의 후예들이여――전군, 전진하라!

바르바토스가 등을 돌린다. 붉은 망토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녀는 더 이상 남길 말이 없다는 듯,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뛰어간다. 일개 병사처럼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고 뛰어간다. 그 뒤를 따라 몬스터 수만 마리가 노도처럼 밀어닥친다.

인간들은 장창을 들이밀며 대열을 짠다. 그러나 어딘가 어수선하다.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대열과 대열 사이를 불길하게 오간다.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위대한 전투였어요. 우리는 완벽하게 승리했지요.”

파이몬이 찻잔에 입을 갖다댔다. 소리없이 찻물이 그녀의 입술 틈새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빈 잔을 조용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십이만 명의 군단으로 인간군 약 이십오만 명을 전멸시켰어요. 전투 한 번으로 인간계의 왕국 두 곳이 멸망했답니다.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 그리고 저는 확신했지요. 우리는 무적이라고. 절대로 패배할 일 없고, 대지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그렇지만 제2차 월맹군은 실패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월맹군 원정으로 기록되었다.

“동족이 우리를 배신하기 전까지는.”

“…….”

“우리는 왕국 두 곳을 점령하고 곧바로 대륙 깊숙이 진군했어요. 인류의 연합군이 궤멸한 직후였습니다. 인간들이 연합군을 미처 재조직하기 전에 전광석화와 같이 대륙을 휘젓는다. 그것이 작전 개요였어요. 아마도, 우리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후방에서 보급 업무를 담당하던 마왕들이 배신했다.

그들은 주로 하위 마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위 마왕은 병력이 적었다. 선두에 나서기보다는 보급에 전념해주는 편이 좋았다. 상위 마왕들이 선두에 서고, 하위 마왕들이 뒤를 받쳐준다. 지극히 합리적인 배치였다. 하지만, 하위 마왕들은 배신했다…….

풍경이 바뀌었다.

위엄에 가득 찬 군대는 온데간데 없었다. 보급이 끊겨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군대.

십만 대군이라는 덩치는 오히려 짐짝에 가까웠다. 식량은 금세 동나버렸다. 인간들은 철옹성에 들어가 굳건하게 버텼다. 철옹성을 깨드려도, 그 다음에는 무한정의 청야전술이 펼쳐졌다. 이미 대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해버린 제1군단은 최악의 후퇴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기사단들이 게릴라처럼 물어뜯었다. 그것에 대항했다가는 또 후퇴가 늦어버린다. 바르바토스는 피눈물을 삼켰다. 그녀의 입술은 이미 마나부족 현상으로 인해 부르텄다. 입술을 이빨로 꽉 물자 피가 새어나왔다.

─ 후퇴……무시하고, 후퇴하라.

아군이 기사단에 물어뜯기는 것을 바라보며 바르바토스가 등을 돌렸다. 파이몬도, 마르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최대한 많은 아군을 살려보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탈리안. 십이만 중에 몇 명이 살아남았을까요?”

“…….”

“지금도 정확히 기억해요. 이천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이만육천팔십사 명. 십이만 대군 중에서 오로지 이만육천팔십사 명의 전사만이 살아남아서 고향땅을 밟았사와요.”

풍경 속에서 바르바토스는 울고 있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헤질 대로 헤져서 구멍이 뚫린 망토를 뒤집어쓰고, 소리내어 울었다. 옆에서 파이몬이 고개를 숙인 채 바르바토스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정말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요…….”

서큐버스 퀸은 탁자에 앉아 이천 년 전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때 친우였던 소녀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