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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44화 (144/510)

00144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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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고꾸라졌다. 라피스와 내가 짐짝처럼 튕겼다.

마차의 벽 너머에서 마부가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은 빠르게 멀어졌는데 아마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날아간 모양이었다.

─ 끼이이익!

마차가 옆으로 드러누워 길바닥을 긁었다. 몸이 뒤집히면서 마차벽에 부닥쳤다. 라피스가 안아준 덕택일까. 나는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라피스의 얇은 등은 고스란히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짧게 비명을 토해냈다.

“라피스!”

젠장! 얼른 몸을 일으켜서 그녀를 안았다. 혹시 크게 다친 것은 아니겠지.

“단탈리안, 님.”

라피스는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눈빛만큼은 뚜렷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그렇게 말했다. 놀랍도록 차가운 시선. 가슴이 순식간에 진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마차에서 벗어나야 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적은 마차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발로 마차의 바닥문을 차서 열어재꼈다. 라피스가 내게 몸을 기댄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단탈리안 님, 먼저…….”

“닥쳐.”

먼저라니! 들으나 마나 나 먼저 빠져나가라는 얘기였다.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었다. 라피스가 내게 부축된 채 뭐라 계속 지껄였다. 들리지 않았다. 논외였다. 그딴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니 차라리 다른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서둘러 마차에서 벗어나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밥값을 해라, 덩치 큰 멍청이들아!’

죽음의 기사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녀석들은 평소엔 영체(靈體)가 되어 내 그림자에 머물렀다. 내가 외치자마자 그림자에서 꼭 검은 점액질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그것들은 곧바로 그림자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열 마리의 흑기사들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었다.

─ 곤란한 모양이군, 임시 주인.

죽음의 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나의 <마왕> 직업레벨이 E급에서 D급으로 올라간 이후, 죽음의 기사들은 더 이상 짐승처럼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이따금 말을 걸어오곤 했다. 하나같이 건방진 어조였지만.

“습격이다. 나와 라피스를 지켜라.”

지금은 위급상황이었다. 말투를 지적할 틈이 없었다.

죽음의 기사가 뒤집어쓴 검은색 투구 너머로 비웃음이 들려왔다.

─ 바르바토스 주군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단지 임시 주인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비천한 서큐버스 따위를 수호하고 싶지는 않군. 우리를 용병으로 취급하지 마라.

“명심해라, 멧돼지 새끼들아. 네놈들의 썩어빠진 머리통에도 구멍이 뚫려 있으면 알아쳐먹어라. 만약 라피스가 죽으면 나는 곧바로 자살할 거야. 멧돼지 새끼들아, 알겠어? 내 명령에 토를 달지 마. 나와 라피스를 지켜.”

흑기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녀석은 더 이상 군말을 씨불이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저편에서 화염구들이 날아왔다. 습격자들이 쏘아낸 것이 분명했다. 기사들은 대검을 꺼내들어 화염구를 일도양단했다.

“죽음의 기사들이다!”

“거리를 벌려라! 가까이 접근하게 내버려두지 마!”

멀리서 호통소리가 오갔다.

마차는 마침 인적이 적은 황무지를 지나치고 있었다. 일부러 노린 것이겠지. 습격자들은 죄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썼는데, 어림잡아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끊임없이 소리쳤다. 적어도 서른 명은 되어보였다.

죽음의 기사가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 어둠의 엘프인가. 마법의 일족이지. 짜증나는 놈들이다.

죽음의 기사는 물리공격에 강력하다. 마법공격에는 내성이 붙지 않는다. 제기랄. 이것까지 노린 것은 아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라피스를 눕혔다. 라피스는 자꾸 미약하게 신음을 뱉었는데 아마 어디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녀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습격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씹어죽일 새끼들!

내가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들었다. 마족 전용 포션이었다. 마개를 열어서――좀처럼 열리지 않아서 짜증났다――와인빛 포션을 천천히 라피스의 입에 흘려넣었다. 라피스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

걱정하지 마시길. 눈길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분노가 더 거칠어졌다. 어떤 쳐죽일 새끼가 라피스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와 생사를 함께한 동료를, 감히.

죽음의 기사가 얼마나 피해를 입든지 상관없었다. 우리를 습격한 저놈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겠다. 배를 갈라서 내장을 한땀씩 꿰어버리겠다.

“기사들. 돌파할 수 있겠나?”

─ 우둔하기는. 돌파는 답이 아니다. 놈들에게 원군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이 지역을 벗어나는 편이 낫다.

벗어난다. 다시 말해 도망치라는 뜻이다. 도망친다. 라피스를 다치게 만든 새끼들을 눈앞에 두고.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가…….

입을 열어 후퇴를 지시하려는 때였다. 우리 마차가 지나온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숫자는 약 마흔! 다가오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설마 적의 원군인가. 심장이 덜컹했다.

옆에서 죽음의 기사가 말했다.

─ 우리가 목적이 아니다.

“뭐?”

─ 임시 주인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군. 아쉽게도, 앞으로 당분간은 임시 주인을 따라야 하는 듯하다.

흑기사가 한 말 그대로였다. 새롭게 출현한 무리는 마차를 지나치더니 곧바로 습격자들이 위치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죽음의 기사들도 거기에 합류했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당장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군이 적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원군이라니. 어디에서 원군이 솟아났는가. 나는 의구심과 불안함에 시달리며 잠자코 전투를 지켜보았다…….

소요는 금방 진정되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마흔 명의 원군, 거기에 죽음의 기사 열 마리가 더해지자 어둠의 엘프들은 별다른 저항을 못해보고 쓰러졌다.

─ 상당히 정예로 훈련받은 암살자들이다.

죽음의 기사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녀석은 오른손에 엘프의 머리를 쥐고 있었다. 목 아래가 싹둑 잘라진 머리를. 고통과 경악으로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자,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더 타올랐다.

고통과 경악만으로는 부족했다. 놈들에게는 세계에서 제일 참혹한 죽음을 선사해야만 했다.

─ 포로로 잡았는데 자살해버리더군. 무영창 마법으로 자살한 것이다. 가슴을 째보니 심장이 박살나 있었다. 심장에다 마법을 설치했다는 소리인데, 흥. 이 정도로 악랄한 수법을 써대는 암살자 집단은 그리 많지 않지.

“어떤 놈들인지 짐작이 가는가.”

입에서 무척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흑기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 암살자 집단이 어디인지는. 하지만 의뢰주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다. 임시 주인이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은 의뢰주 아닌가. 하긴, 암살자 집단이든 의뢰주이든 임시 주인에게는 버겁겠지. 복수할 힘조차 없으니.

“상관없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땅바닥에 왼손을 갖다대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거기에 호신용 단검이 꼽혀 있었다. 그것을 꺼내들었다. 흑기사가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임시 주인? 대체 무슨 짓을――.

단검으로 내 왼손을 찍었다. 정확하게는 검지 손가락을.

목구멍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튀어나갔다. 끔찍한 격통이 온몸의 신경을 달구었다. 내가 이빨을 악 물었다. 고통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단검을 찍어내렸다. 이번에는 중지의 뼈가 박살나며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비명.

“후우, 흐으읍……! 후우우…….”

눈물이 흘렀다. 마치 눈가에서 용암이 터진 것 같았다. 나는 아득한 고통에서 겨우 숨소리를 유지했다. 격통을 억지로 쑤셔넣은 숨소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옷소매로 눈물을 대충 닦았다.

─ …….

전투의 흥분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죽음의 기사들, 그리고 누군지 모를 원군들이 멍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빨을 으드득 씹었다.

“건방진 새끼야. 지금 당장 텔레포트를 타고 바르바토스한테 가서 전해. 단탈리안이 암살자 집단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그 와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손가락도 두 개나 잃었다고.”

─ 서, 설마……그걸 위해 일부러 자해를.

“닥쳐. 내 말을 끝까지 들어.”

흑기사가 침묵했다. 나는 왼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의뢰주는 아직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지만 지옥의 대공 중 한 명으로 예상된다고 말해. 바르바토스가 네놈에게 군사를 떼어줄 거다. 암살자 집단을 진짜 지옥에 빠트리라면서. 그 군세를 이끌고 나한테 와라. 최대한 빨리. 알겠냐?”

나는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좀처럼 원하는 물건을 잡지 못했다. 겨우 내가 바라는 물건, 텔레포트 두루마리가 손에 잡혔다. 그것을 흑기사한테 던졌다.

그리고 여전히 떨리는 오른손으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손가락, 나의 왼손 검지와 중지를 녀석한테 집어던졌다.

“바르바토스한테 꼭 보여줘라.”

─ …….

흑기사가 허리를 굽혀 두루마리와 손가락을 집었다. 녀석은 어딘지 멍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눈을 부릅 떴다.

“씨발 새끼야. 두개골에 구멍 하나 더 뚫어줘야 말을 알아처먹을 거냐?”

─ ……분부대로.

죽음의 기사가 허리를 숙였다. 그는 두루마리를 펼쳐서 시동(始動)어구를 속삭였다. 검은색 마법진이 나타나서 죽음의 기사를 뒤덮었다. 곧, 녀석이 사라졌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내가 원군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너희는 누구냐?”

“존안을 처음 뵙나이다, 단탈리안 전하.”

무리에서 한 명이 걸어나왔다. 여자 목소리였다. 머리에 회색 로브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나에게 지극히 공손하게 예를 차렸다.

“저희는 니블헤임에 터를 잡고 운영하는 암살 길드입니다. 의뢰주에게 명을 받아 일곱 개월 전부터 단탈리안 전하를 몰래 호위하고 있었나이다.”

“일곱 개월?”

젠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일곱 개월 전이라면 아직 내가 월맹군에 몸을 담고 있을 때였다. 누가 의뢰했기에 그때부터 나를 호위했다는 말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행히 마왕의 변태적인 생명력 덕택인지 출혈은 금세 멎었다. 여기서 대화를 조금 나눈다고 해서 출혈과다로 죽을 일은 없었다.

“의뢰주가 누구야. 바르바토스냐?”

“본래 의뢰주를 밝히는 것은 금기에 해당하나 이번엔 특별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의뢰주 본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닥칠 경우, 단탈리안 전하께 자신의 이름을 알리라고 요구했으니까요.”

여인이 로브를 벗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외모가 아름다웠으나 얼굴의 반쪽에 화상이 심하였다.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당장 왼손의 고통에 휩싸인 나로서는 상대방 얼굴이 불에 구워졌든 기름에 튀겨졌든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덤덤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인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소인의 얼굴에 놀라시지 않는군요.”

“관심없다. 의뢰주가 누구인지나 어서 고하라.”

“……바르바토스 전하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앙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분이 저희 길드에 의뢰를 넣었습니다.”

암살자 여인이 고개를 한껏 숙이면서 말했다.

바르바토스의 앙숙이라고?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시트리냐?”

“시트리 전하도 아닙니다. 단탈리안 전하. 저희는 다름 아니라 파이몬 전하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파이몬!”

내가 경악했다.

파이몬. 그 창녀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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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가 종이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시중에 1권, 2권이 배본되었습니다. 모두 독자 여러분께서 응원해주신 덕분입니다^^

<던전 디펜스> 종이책은 인터넷 연재본과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문장을 조금 더 말끔하게 다듬었고, 연재본에 등장하지 않은 조연이 등장했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출판될 3권, 4권에서는 인터넷 연재본에서 다소 루즈했던 부분을 깔끔하게 다잡을 예정입니다.

<던전 디펜스>는 대여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제 글이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다면 저에게 그보다 기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종이책 출판과 상관없이 인터넷 연재는 계속됩니다!

궁금하신 점은 언제든지 쪽지로 물어주세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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