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43화 (143/510)
  • 00143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  *  *

    무도회에서 돌아가는 길.

    “크흐흐.”

    나는 마차에 올라타고 줄곧 히히덕거렸다. 라피스가 맞은편에 앉아서 이쪽을 뚱하게 쳐다보았다. 드레스가 불편한 것일까. 라피스는 자꾸 가슴골의 옷섶을 만지작거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이야아. 메모리아를 펼칠 때 그놈 얼굴이 말이야. 그때까지 점잖은 신사인 척 굴었으면서 확 표정이 깨지더라니까.”

    “…….”

    라피스가 말없이 질색했다. 그러건 말건 나는 손가락으로 셈하는 데 열중했다.

    어디 봐보자. 바르바토스가 대략 열다섯 명의 여자 마왕한테 '놀이'에 대해 까발렸다. 내가 지금까지 지옥의 대공을 열일곱 명 만났다. 그중 일곱 명한테 메모리아 영상을 풀었으니까…….

    “앞으로 딱 여덟 명한테 유출하면 되겠구나.”

    내가 키득거렸다. 내 귀에도 웃음소리가 실로 사악하게 들렸다. 무얼. 마왕이란 대저 사악해야 마땅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만큼 성실하고 착실한 마왕이 없었다. 성실과 착실의 대명사, 가로되 단탈리안이라. 만인에게 칭송을 받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딱 받은 만큼만 돌려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지나치게 양심적이야.”

    “……예?”

    라피스가 혼란에 빠졌다.

    “실례했습니다. 방금 양심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제가 알기로 단탈리안 님만큼 양심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들었어. 생각해봐! 얼마든지 받은 것보다 많이 돌려줄 수도 있거든. 하지만 나는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받은 그대로 상대방한테 돌려주지.”

    감탄스러웠다. 나 자신의 공명정대함에 스스로 반해버릴 것만 같았다.

    “정의로운 집행자, 현명한 재판관, 신실한 파트너. 내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정도 칭호가 필요하겠지.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새로운 칭호를 개발해야 할 판국이야.”

    나는 감탄하는 와중에도 약간 씁쓸했다. 마치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으나 미처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낼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한 사람과 같이, 이윽고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여 쓸쓸해진 사람과 같이.

    내가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겠지.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다. 몇 번이고 시도해보아도 도저히 전부 표현해낼 수가 없다. 도전과 진부함을 끊임없이 오가는 좌절……나 역시 사람들에게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함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비극이로군.”

    “…….”

    라피스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혼돈과 빡침이 칵테일 된 얼굴이었다. 그녀는 무척 답답하다는 듯이 드레스 목깃을 펄럭였다.

    내가 마차 창문에 손을 갖다대면서 물었다.

    “왜, 답답해? 창문 열까?”

    “창문으로 단탈리안 님이 뛰어내릴 것이라면, 예. 부디 열어주시길.”

    “아니. 그건 좀 싫은데.”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뭐라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둥, 언제부터 뻔뻔해진 것인지 모르겠다는 둥,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할 넋두리였다.

    장난은 이쯤으로 해둘까.

    내가 옷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 ‘독사대공, 200만, 6개월’이라고 한글로 적었다. 종이에는 독사대공 이외에 원조를 약속한 대공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제 천만 골드를 약속받았다.”

    “……당초에 목표했던 금액이 달성되었군요.”

    돈 이야기가 나오자 라피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라피스는 분위기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다.

    “앞으로도 대공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실 생각입니까?”

    “생각보다 잘 먹혀들고 있으니까.”

    나는 순전히 거짓말로 대공들을 협박했다. 상위 마왕들이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인간계를 정벌하기에 앞서 마계를 손봐주기로 합의했다, 바르바토스가 이의를 제기했다……전부 거짓말이었다.

    동맹이라니. 그런 것이 성사될 리 만무했다. 월맹군의 상태가 불가능한 가정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어째서 군단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가, 어째서 평원파는 산악파의 이반을 두루뭉실 넘어갔는가, 어째서…….

    대공들에게 현재의 사태는 예상에서 벗어났다. 정보에 민감한 자일수록 무엇이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왔는지 파악하고 싶어 안달복달하겠지. 그때 내가 그럴듯한 답안을 제시해주었다. 현재의 사태는 사실 너희 대공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대공들이 유능해서 다행이었어.”

    “유능해서 다행이라니요? 상대측이 유능하면 곤란한 것 아닙니까?”

    “뭐,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달라. 대공들이 자기네의 유능함에 스스로 발이 걸려 넘어진 꼴이거든.”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는 모른다. 이럴 때 유능한 사람은 사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마치 바둑과 비슷하다. 두 고수가 서로 맞붙는다고 해보자. 그때 상대편이 전혀 뜬금없는 한 수를 둔다.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가 모르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방심했다가는 언제 큰코 다칠지 모른다. 주의하자.

    “만약 대공들이 무능했더라면 어디 쳐들어올 테면 쳐들어와라, 하고 배짱을 부렸을 거야. 내 책략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지. 대공들이 유능해서 다행이었다.”

    “유능함은 때때로 독이 된다.”

    라피스가 약간 멍하게 혼잣말했다. 그녀는 평생 유능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내 말이 와닿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사람은 유능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을 믿어야 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다름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같은 자신만만함이 함께해야 한다. 상위 마왕들이 동맹해서 쳐들어온다고? 헛소리! 그렇게 일갈해버리는 면모가 이따금 필요하다.

    내가 슬쩍 헛웃음을 지었다.

    ‘정작 나는 그런 인물이 절대로 못 되지만.’

    난 안타깝게도 대공들 쪽에 가깝다. 무엇이든 의심해버린다. 똑같은 부류이기에, 대공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예측해냈다. 내가 부릴 수 있는 묘기란 기껏해야 이 정도에 불과했다.

    진정한 영웅이라는 수식어는 저 엘리자베트 황녀에게나 어울렸다. 그녀는 유능함과 대범함을 모두 갖추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재능이었다.

    부럽다. 그러나 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의심해버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도 따로 있다. 황제에게 단검을 쑤셔넣는 자는 언제나 가장 비천한 노예일지어니.

    “단탈리안 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지 물어봐. 내 속옷 색깔만 빼고 다 말해줄 수 있어.”

    “……단탈리안 님이 항상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뭐시라.

    “그, 그걸 어떻게.”

    “여태까지 단탈리안 님이 입은 옷을 누가 준비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걸친 옷. 망토. 바지에다 조끼까지 전부 제가 마련했습니다. 유독 속옷만은 주문하지 않으시더군요.”

    라피스가 정말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물론 마왕이 선천적으로 신진대사를 적게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아예 땀이 흐르지 않는 날도 수두룩하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 한 벌의 속옷도 주문하지…….”

    “죄송합니다. 질문을 해주세요.”

    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냥 순순하게 질문을 받았으면 됐을 것을, 괜히 한번 놀리겠답시고 농담을 던졌더니 어마어마한 반격이 들어왔다. 독사대공한테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반격을, 라피스는 거의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낸 것이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여자인가.

    “단탈리안 님은 지금까지 열일곱 명의 대공을 만났습니다.”

    “음.”

    “하지만 그중에서 여섯 명에게만 원조금을 요구했지요. 저로서는 이유를 짐작하기 힘듭니다. 열일곱 명 전원에게 원조금을 요구하는 편이 단연 좋지 않습니까?”

    “안돼.”

    내가 즉답했다.

    “라피스 네 말은 열일곱 명한테 백만, 이백만씩 뜯어내면 더 좋다는 얘기이지?”

    “네. 여섯 명한테 받았을 뿐인데 벌써 천만 골드를 모았습니다. 열일곱 명에게 받았다면 얼마나 많은 금액이 모였을지…….”

    “흐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대공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야.”

    “경각심……?”

    “그래. 대공들은 바보가 아니야. 자그마치 백만에서 이백만 골드이다. 그만한 거금을 나한테 내야 하는데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을 리 없지.”

    대공들은 정보력을 총동원할 것이다.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더 확실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주변의 다른 대공들을 탐색하겠지.

    그리고 깨닫는다. 단탈리안에게 원조금을 바친 자가 있는가 하면――아예 원조금을 내놓으라는 말조차 듣지 못한 대공들도 있다는 사실을.

    “무슨 뜻인지 알겠어?”

    “죄송합니다.”

    이런, 라피스는 역시나 맹한 구석이 있었다. 재정적인 부분에서 지극히 유능하면서 본격적인 권력 놀이에는 약했다. 약간 힌트를 줘볼까.

    “대공들에게 원조금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봐. 녀석들은 분명히 이렇게 여기고 있을 거야. 나는 거금을 투자하여 나의 '안전'을 사들였다고.”

    “……!”

    라피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마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설마, 골라내기가 있었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마왕들은 모든 대공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소수의 대공에게만 충성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충성을 요구받지 않은 대공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왜 어떤 대공에겐 돈을 받고, 어떤 대공에겐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을까…….”

    내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원조금을 약속한 대공들이 어떻게 판단할지 상상이 가?”

    “본보기……입니까.”

    라피스가 숨을 간신히 토해내듯 말했다. 정답이었다.

    “마왕들은 결코 마계 정벌을 완전히 단념한 게 아니다. 그저 충신과 간신을 가려냈을 뿐이다. 단탈리안은 원조금을 거둬들이러 파견된 세금징수원이 아니다. 그 진짜 모습은, 어떤 대공을 죽이고 어떤 대공을 살릴지 골라내는 사신……. 대공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리고 공포에 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숙청의 칼날에서 빗겨났다는 사실에.

    “그걸 깨달은 순간에는 모르긴 몰라도 목덜미가 좀 서늘할걸.”

    내가 작게 웃었다. 광경을 상상하니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위해서 좀 수고했지.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놓고 적대적인 대공들은 일부러 제외했어. 그냥 적당히 협박만 들려주고 밀담을 끝냈거든. 마왕에 온순한 무리한테만 원조금을 뜯었다.”

    “혹시, 지난 한 달 동안 세작을 고용해서 마계의 정보를 끌어모은 것도.”

    “대공들의 평소 태도를 알아보는 게 목적이었지.”

    그 결과 겨우 아홉 명의 대공만이 마왕을 비교적 존중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머지 대공들은 죄다 마왕에 비협조적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월맹군 원정에 비협조적이었다.

    그중 몇몇은 아예 하위 마왕들한테 금전적인 원조를 해주고 있었다. 산악파 마왕들이 기세등등한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적나라해서야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뭐, 내 목적은 이것뿐만이 아니야. 다른 대공들도 곧이어서――.”

    그때였다. 전방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진동이 전해지더니 마차가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마차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라피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덮쳤다.

    “단탈리안 님. 고개를 숙이십시오.”

    내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었다. 라피스는 나의 얼굴을 최대한 자기 품에 감싼 뒤, 일부러 마차 바닥에 뒹굴었다. 그 직후에 또 한번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바로 마차 근처에서 터진 것이었다.

    나는 라피스의 몸에 덮힌 채로 직감했다.

    ‘테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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