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42화 (142/510)
  • 00142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

    독사대공이 침묵했다.

    하얗지만 노인의 머리카락과 다르게 생생하게 윤기 있는 백발, 머리색만큼이나 새하얀 살결, 마지막으로 작은 몸집. 영상에 등장하는 소녀는 틀림없이 마왕 바르바토스였다. 그러나 소녀의 얼굴 표정은 독사대공이 아는 바르바토스와 너무도 달랐다.

    굴욕과 굴복, 그러면서도 쾌감을 억누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르바토스, 언제나 자신만만한 마왕은 얼굴이 온통 모멸감으로 일그러졌다. 입술의 자그마한 틈새에서 연신 갸날픈 신음이 새어나왔다.

    ‘주인님이라니.’

    독사대공이 침을 삼켰다. 그가 조심스럽게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은 무표정했다.

    ‘설마 두 사람의 관계……바르바토스가 위쪽인 것이 아니라, 단탈리안이 위쪽이라고?’

    대공도 이래저래 수백 년을 살았다. 성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 않게 해박했다.

    특별한 놀이에서 주인 역할을 하는가 노예 역할을 하는가, 실제 관계는 그것과 상관없다. 놀이에서 노예처럼 행동할지라도 실제에선 상대보다 우위에 서 있다.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성관계에서나마 우위를 점한다면…….’

    아마도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은 동등한 관계. 엄청난 신뢰가 두 사람 사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으리라.

    “전하. 메모리아는 이쯤이면 충분하올 듯싶습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잠자코 지켜보라.”

    여기서 더 무엇이 등장한다는 말인가?

    독사대공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단탈리안에게 완전히 기세를 제압당했다. 그러나 어떻게 저항하고 싶어도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영상에서 남녀가 놀이를 끝냈다. 둘은 침대에 누웠다. 아니, 누웠다고 표현해야 할까. 바르바토스는 아직 여운이 남은 듯이 침대에 벌러덩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여린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 바르바토스.

    ─ 으응…….

    ─ 네 사신의 대낫 있잖아. 그거 정확히 어떤 무기인 거냐?

    바르바토스가 몹시 피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독사대공은 자기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서열 제8위가 서열 제71위와 반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은 파벌의 수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파벌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자인데도. 두 마왕은 서로 대등하다……적어도, 당사자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

    ─ 상대방의 마나를 흐트러트리지. 인위적으로 마력을 폭주시켜.

    ─ 세상에. 파이몬이 그런 것처럼? 완전 사기네.

    ─ 뭐, 그 화냥년처럼 실력 있는 마법사나 검사라면 크게 영향을 주긴 힘들지만. 으으. 야, 시발놈아. 오늘 너무 지독했잖아. 아무리 나라도 네놈 오줌으로 몸을 씻기는 싫거든? 썅.

    오줌이라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을 또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메모리아로 저장하기 이전에는 그런 짓도 했지. 자네가 성적으로 어디까지 관대한지 몰라서 말이야. 그 부분은 제외했네.”

    “…….”

    아무래도 아티팩트에 담긴 것은 변태짓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모양이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 단탈리안에게 전부 승복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이쪽 방면으로는, 대공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 윗구멍은 그렇게 말하지만, 글쎄.

    ─ 닥쳐.

    ─ 알겠습니다요.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렇지만 독사대공이 보기에도 아기 고양이가 우는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바르바토스의 눈가에는 아직도 물기가 마르지 않았다. 남성의 가학심을 건드리는, 무언가 간드러지는 부분이 소녀에게 있었다.

    ─ 다른 마왕들도 사신의 낫처럼 사기스러운 물건을 갖고 있냐?

    ─ 흐응, 뭔가 착각하는데. 사신의 낫은 나랑 동떨어진 물건이 아니야. 내 능력이 물체화된 거지. 나에게 '영혼을 잘라버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사신의 낫도 소환되는 거야.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검은색 마나가 울렁거리더니 그곳에 전투 대낫이 나타났다.

    ─ 설명하기는 좀 거시기하지만. 뭐라고 하지, 끄응. 감각? 그런 게 있어. 너처럼 존나게 약한 놈과 다르게 나같이 존나게 잘나면 제6감 비스무리한 게 생기거든.

    ─ 존나게 약해서 죄송합니다.

    ─ 아무튼, 그 감각을 펼치는 거야. 더 이상 표현하긴 어려운데. 딴 놈들도 그럴걸. 잘나가는 마왕들한테는 그런 제6감이 저마다…….

    영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대공은 왜 단탈리안이 잠자코 구경하라 말했는지 이해했다. 메모리아가 거짓일 가능성을 더더욱 낮춘 것이었다.

    영상에 등장한 소녀는 익명의 인물일 수도 있다. 폴리모프 마법을 써서 바르바토스로 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방금 영상에 등장한 사신의 낫으로 인해 그 가능성이 깨졌다.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의 교섭 능력에 감탄했다.

    ‘철두철미하군.’

    모든 마법은 발동될 때 마법진이 그려진다. 무영창 마법도 똑같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소녀가 대낫을 불러들이는 순간에 마법진이 나타나지 않았다.

    소환마법을 쓰지 않았는데도 대낫이 출현했다……소녀가 진짜 마왕이라는 증거였다. 대공은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진품임을 확신했다.

    “이거 원. 팔불출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적이 부끄럽군.”

    “두 분 전하의 비밀스러운 광경을 훔쳐본 것 같아 황송하옵니다.”

    “훔쳐본 것 같은 게 아닐세. 훔쳐본 거지.”

    단탈리안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입을 단속하는 게 좋을 거야. 본인이야 상관없지만 말이지, 자네가 이 메모리아와 관련해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것을 바르바토스가 알게 되면……과연 어떻게 될련지.”

    “…….”

    “자네가 잘 이해하리라 믿네.”

    적나라한 협박이었다.

    영상에 대해서는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해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무덤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단탈리안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이옵니다.”

    굳이 협박해오지 않아도 독사대공은 그럴 셈이었다. 당연했다. 도대체 이걸 누구한테 말하라는 말인가?

    월맹군의 상위 마왕들이 죄다 동맹하여 호시탐탐 지옥을 노렸다. 그중에서 바르바토스는 유일하게 지옥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생명의 동아줄이었다. 메모리아의 광경을 흘리고 다니는 것은 독사대공 스스로 동아줄을 싹둑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제 단탈리안과 독사대공은 공범이 되었다.

    “좋네. 이만하면 본인이 자네에게 충분히 증거를 보여주었는가?”

    “이보다 더 확고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하게 보여주셨나이다. 전하, 감히 소인이 의구심을 품은 것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훌륭한 무도회를 열었으니 용서해주겠다고.”

    단탈리안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대공은 황송해하며 두손으로 마왕의 오른손을 잡았다.

    무도회가 끝났다. 마왕과 대공이 밀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상당수의 손님이 나가버린 뒤였다. 몇몇 영애들은 마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단탈리안이 나타나자 활짝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마계는 인간계에 비하여 성(性)에 너그러웠다. 멋진 남성, 그것도 자신보다 신분이 고귀한 남성과 즐기는 것쯤이야 여자에게 흠집이 안 되었다. 영애들은 정말로 단탈리안을 마음에 들어했든, 아니면 모종의 목적이 있든 간에 그와 하룻밤을 보낼 속셈이었다.

    “미안하네.”

    단탈리안이 깔끔하게 거절했다.

    “안타깝지만 오늘 본인의 파트너를 너무 홀대해서 말이다. 밤까지 그랬다가는 후일이 두렵군.”

    “파트너라면……저 서큐버스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한 영애가 눈쌀을 찌푸리며 뺨을 부풀렸다.

    단탈리안이 데려온 라피스는 무도회장 구석에 홀로 서서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다른 한손으로는 두꺼운 책을 들었다. 자그마치 대공의 무도회에서 대놓고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등장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저런 여자의 눈치를 보다니 마왕 전하답지 않아요! 차라리 제가.”

    “영애.”

    단탈리안이 말했다. 그의 눈빛이 단호했다.

    “본인의 파트너를 욕보이는 것은 좌시하지 않겠다.”

    좌중이 싸늘해졌다.

    방금 불만을 표시한 영애는 호족(虎族) 귀족의 딸이었다. 마계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에 속했다. 그런 영애보다 자신에게는 일개 하급 서큐버스가 중요하노라고, 단탈리안이 단언한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영애가 바로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독사대공은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도 저 아가씨는 아비한테 밀명을 받았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탈리안과 친해지라고.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겠지.

    영애는 아비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무도회가 시작하고 네 시간 동안 단탈리안에게 갖은 애교를 부렸다. 어쩌면 단탈리안의 초라한 겉모습에 실망했을 텐데 터럭만큼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단탈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다소 무례할지라도 단탈리안에게 다가섰다. 훌륭했다. 대담했다. 마계의 귀족다운 현명함이었고 용기였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독사대공은 지금에 이르러서 확실히 깨달았다.

    단탈리안은 호색한이 아니다. 단지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서 호색한인 척했을 따름이다. 안타깝게도 영애는 단탈리안의 연기에 놀아났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귀족 아가씨 전원이…….

    그렇지만, 하고 독사대공이 의문을 품었다. 지나치게 면박을 주었다. 조금 더 좋게 말해서 거절할 수도 있었을 터. 어째서 거의 모욕을 주다시피 딱 잘라서 거절했는가?

    “…….”

    그때 단탈리안이 독사대공한테 눈짓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저 서큐버스를 존중하라는 의미였군.’

    다름 아니라 대공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앞으로 대공은 반년에 걸쳐서 이백만 골드를 단탈리안에게 보내야 한다. 그때 창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하급 서큐버스, 라피스 라줄리이다. 이제 독사대공은 단탈리안과 직접 만나지 않고 라피스와만 상대한다.

    이에 단탈리안은 영애한테 면박을 줌으로써 말없이 경고했다. 신분이 미천하다고 해서 얕보지 마라. 나는 그녀를 더없이 신뢰한다. 그녀를 무시할 경우 내 분노를 사게 되리라.

    이쯤 되자 독사대공은 아예 헛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이 자, 철저해도 너무 철저하지 않은가.

    도대체가 틈새라는 것이 없다.

    행동 하나와 말투 하나에 전부 정치적인 의도가 배어 있다. 단순히 승리를 거두려고 하지 않는다. 적당히 승리하려고 든다. 이쪽의 입장을 훤히 꿰뚫어보고 네가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일일이 알려준다.

    아까 전도 그러했다. 계속해서 상납금을 받는 대신에 딱 한번의 진상만 요구했다. 증거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증거를 사이에 두고 공범의 관계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단탈리안은 서큐버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서큐버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곧 단탈리안에게 잘 보이는 것과 똑같다.’

    이제부터 독사대공이 어찌해야 하는지 지시한 것이다.

    아무리 공범 관계가 되었을지라도 면대면으로 만나는 일이 사라져서야 신뢰도 금세 식어버린다. 여기서 단탈리안은 서큐버스를 자신의 대리자로 내세웠다. 서큐버스에게 잘 대해라. 그러는 한 우리의 관계는 굳건할 것이다…….

    ‘이 정도로 계획적이어서야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겠군.’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을 배웅했다. 그는 단탈리안을 태운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제서야 대공은 안심하고 자신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대공은 한 영애가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단탈리안에게 모욕을 당한 바로 그 소녀였다. 대공은 흥미가 생겨서 영애한테 다가갔다.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독사대공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듯 잔뜩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

    “아아. 예는 되었다. 그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전하!”

    영애가 다짜고짜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름다운 드레스에 흙이 묻는데도 상관치 않는 기색이었다.

    “소녀가 감히 죄를 저질렀다면 부디 이 목숨만을 거둬주시옵소서! 소녀가 못났을 뿐, 소녀의 아비와 가문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호오.”

    대공은 흡족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귀족들 중에도 쓸 만한 가문이 있었다. 이런 딸을 키워낼 정도라면 아비도 틀림없이 유능하겠지.

    “걱정을 거두라. 영애를 칭찬하고자 함이니.”

    “예?”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예사로운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린 이가 내 수하에 있었다. 이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대공 전하…….”

    영애가 감격했다.

    “저에게도 가문에게도 지고의 칭찬이옵니다. 소녀는 게른하이트 백작가의 둘째 딸입니다.”

    “호오. 게른하이트에게 둘째 딸이 있었는가. 언제 한번 나를 찾아오라 전하게나. 훌륭한 딸을 두었다는 말도 전하게.”

    영애는 다시 한번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가며 예를 표했다.

    독사대공은 만족해하며 처소로 돌아갔다.

    그가 밤길을 거닐며 생각했다. 확실히, 단탈리안은 강대한 적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은 완패했다. 그렇다고 이 내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마계는 약하지 않았다.

    “얕보지 마라, 인가.”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얕볼 수 없다.

    ‘……게다가 아래쪽 물건도 상당히 우람했다.’

    독사대공은 메모리아 영상을 떠올렸다. 역시나 그 정도는 되어야 바르바토스 같은 마왕을 함락할 수 있는 것인가. 정말로, 얕볼 수가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