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41화 (141/510)
  • 00141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고금 이래……마왕이 마계로 칼날을 향한 적은 없나이다.”

    독사대공은 자신의 목소리가 메마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단탈리안의 얘기가 어디까지나 흥미를 돋군다는 식으로 여유롭게, 탁자 위에 놓인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얘기는 실로 포도주 한입거리에 어울리는 안주이다. 그런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대공은 필사적이었다.

    “전무후무한 사건에 마인들이 많이 동요하지 않을련지요. 도리어 대륙의 월맹군까지 혼란이 퍼질지 모릅니다. 월맹군의 후방을 안정시키자는 계획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사옵니다.”

    “호오. 상당히 월맹군을 걱정해주지 않는가, 대공?”

    단탈리안이 비아냥거렸다. 독사대공은 표정이 변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소인 역시 미천하나마 마인의 일원이므로.”

    “다소 혼란스러워져도 상관없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군을 미리, 철저히 깨부순다. 어차피 바알 전하의 군대는 건재하다. 마계를 정벌하기에는 충분하겠지.”

    그렇다. 바알의 군대는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 최강이다. 무엇보다 바알은 마인들 사이에서 드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그럴듯한 명분……예컨대 마계를 해방한다는 명분 따위를 들고 공격해오면 어찌될 것인가.

    독사대공이 포도주를 한모금 마셨다. 안 된다. 이쪽이 필패한다. 대공들의 철권통치에 마인들은 언제나 불만을 가져왔다. 서열 제1위 마왕의 강림에 두 손 벌려 환호하는 자들이 넘쳐나리라.

    애당초 마인은 기본적으로 마왕한테 반항할 수 없다. 사력을 다해 저항해본들 어디까지 버틸련지. 아무리 잘해봤자 2년, 3년이겠지. 마계는 마왕의 아래에 통일된다. 거기까지 상상하고 독사대공은 참담해졌다.

    “무얼.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게. 마인은 마왕이 통치한다. 당연한 진리 아닌가? 본래 마계도 응당 마왕의 것이어야 했다. 다만 잠시간 그대 대공들에게 맡겨두었을 뿐이지. 맡은 물건을 주인에게 되돌려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할 것도 없을걸세.”

    단탈리안이 유쾌하게 웃었다.

    ‘감히, 최약체 주제에.’

    독사대공은 부아가 치밀었다. 뭐가 맡은 물건을 되돌려줄 뿐인가!

    마계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황량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박토(薄土)에 불과했다. 밀알 하나를 심으면 두세 개를 얻기 힘들었고, 지하를 파도 우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족이 고향을 증오하며 가로되 지옥이라.

    마왕들은 이 땅을 버렸다. 세계를 등졌다. 보다 비옥한 세계로, 대륙으로 나가겠다며 떠났다. 수많은 마인이 그 뒤를 따랐다. 현재 대륙에 무수하게 퍼진 몬스터들은 바로 이주민의 후손이었다.

    반면에 남은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든 지옥에 적응했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끔찍한 사회원리가 거의 영원으로 느껴질 정도의 긴 시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굴러갔다. 지옥의 대공들은 바로 톱니바퀴를 필사적으로 헤쳐나온 장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마계를 되찾겠다고? 원래 자신의 물건이었으니 돌려받아 마땅하다고?

    독사대공이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장난하지 마라!’

    대륙에서 월맹군이니 뭐니 쓸모없이 희생만 거듭한 주제에 어디 감히 마계의 진정한 주인을, 살과 뼈를 다해 황무지와 함께 굴러온 이들을 부정하는가.

    바알의 군대, 좋다. 얼마든지 와봐라. 기꺼이 멸망해주마. 그러나 우리에게 비장의 패 한두 개조차 없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세계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저주를 퍼부어주겠다. 세상 온 천지를 지옥으로 만들어주마…….

    독사대공이 여유로운 낯빛 아래에 최악의 사태에 대해 마음을 준비했다.

    그런데 결사항전을 부르짖기 이전에 확인해야만 하는 점이 있었다. 바로 단탈리안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상대편에는 실제로 마계를 토벌할 힘이 있다. 명분도 있다. 헌데도 냉큼 공격해오는 대신 지옥의 대공인 자신과 교섭해왔다.

    어째서인가. 만약 상대편에 이쪽과 타협할 의지가 있으면 최고이다. 최악의 경우는 목적이 단지 최후통첩일 때……그러면 멸망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

    단탈리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대공, 분위기가 너무 굳었군. 긴장을 풀게.”

    “허허. 송구하옵니다. 너무도 뜻밖의 소식을 접하여 그만 놀랐사옵니다.”

    “그대들에게 섭섭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라네.”

    이제 본론인가. 독사대공이 긴장했다.

    “……그 말씀은?”

    “말했지 않은가. 자네가 제일 잘 알다시피 마왕군에는 여러 파벌이 있다네. 마계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저 권고의 수준에 그치자는 입장도 있지.”

    “……!”

    독사대공은 시야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마계에 대해 한없이 우호적인 마왕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르바토스가 그러할 터. 우연치 않게, 눈앞의 사내는 바르바토스의 측근이었다.

    ‘그런가! 그랬는가!’

    대공은 순식간에 사건의 전말이 이해되었다. 상위 마왕들이 모종의 동맹을 맺었다. 목적은 단순했다. 월맹군의 실패를 몰래 조장하는 지옥대공들을 처리하자.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 방법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의 의견은 비교적 온건하지.”

    단탈리안이 다시 우리라는 단어를 썼다. 대공은 그 단어가 아까 전과 또 다른 의미로 쓰였음을 직감했다. 달리 말해 평원파의 의견, 바르바토스의 의견이다.

    “대공이 마왕에게 변함없이 충성한다는 증거를 보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마는.”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믿네.”

    “월맹군의 성공을 기원하며 백만 골드를 기부하겠습니다.”

    대공이 즉답했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기회가 닿는대로 충심을 다해, 단탈리안 전하를 전력으로 도와드리겠나이다. 전하라면 백만 골드를 틀림없이 현명하게 처리하시겠지요.”

    독사대공은 유독 단탈리안 전하를 강조해서 발음했다. 백만 골드는 순전히 당신에게 전달하겠다. 중간에 얼마든지 마진을 떼어먹어도 좋다. 이쪽에서 상관하지 않는다. 그같은 의미였다.

    단탈리안이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물통을 들어 입을 축였다.

    독사대공은 단탈리안의 몸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충분한가? 부족한가? 눈앞의 남자는 도저히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대공. 걱정이 팔자로군. 우리는 그대들에게 세금을 떼어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군주에게 매일마다 충성을 맹세할 필요는 없다. 안 그런가?”

    즉 상납은 이번 한번을 끝으로 다시 없을 것이라고.

    독사대공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과연, 상위 마왕들은 현명했다. 협박이 여러 번 중첩되면 효과가 약해진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지옥의 대공이라고 해서 백만 골드 같은 거금을 무한정으로 뱉어낼 수는 없었다. 빠른 시일 안에 상납금은 큰 부담이 되어버린다. 대공들은 겉으로 순종해도 점점 더 불만에 차겠지. 반란이 일어난다. 폭발해버리고 만다.

    ‘이건……진심으로 우리와 협력하려 든다고 봐도 좋을까.’

    만약 지옥대공들을 멸살할 계획이었다면 차라리 연달아 상납금을 요구했으리라. 일부러 폭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반란군을 정발한다는 명목으로 지옥에 침공했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단 한 번의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

    단탈리안은 신뢰할 수 없다. 바알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라면, 하고 독사대공이 생각했다. 대륙 정벌을 평생의 염원으로 안고 살아가는 그 마왕이라면 믿음직스럽다. 아마도 그녀는 후방의 안정이니 대공들에 대한 보복이니 하는 소리가 오가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모처럼 인간계를 토벌할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동족과 싸울 때가 아니다……마왕 바르바토스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그러니까 심복인 단탈리안을 파견했다.

    “백만 골드를 추가로 후원하겠나이다.”

    “훌륭하군.”

    그제야 단탈리안이 흡족하게 웃었다.

    “허나 전하. 이백만 골드는 소인에게도 꽤 버거운 금액입니다.”

    “흐음? 설마 아깝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물론이옵니다. 다만 소인이 비루하게 사백 년을 살아오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세상만사 확실을 기한다고 뭐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사대공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만일 소인의 충심이 만족스러우시다면 감히 청하옵건대, 전하께서도 최소한의 증거를 보여주시옵소서.”

    “요컨대 바르바토스와 내가 정말로 한속인지 증명하라?”

    “……예, 전하.”

    대공은 등줄기에서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소름을 느꼈다. 눈앞의 사내는 거리낌 없이 대화를 비약한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쪽의 속내를 파악한다. 서열 제71위, 그런데도 실질적으로는 평원파의 최고 참모. 이것이 단탈리안인가.

    “뭐, 좋겠지.”

    단탈리안이 선뜻 대답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탁자에 올렸다. 독사대공은 오래된 안목에 의지하여 그것이 마법 아티팩트임을 알아보았다.

    “이것은?”

    “메모리아 주문이 걸린 아티팩트이다. 위조물인지 확인해보도록. 검증 마법쯤이야 꿰고 있겠지.”

    “분부대로.”

    독사대공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부하는 많았다. 그는 오른손에 착용한 반지들 중에서 약지에 낀 반지를 아티팩트에 갖다대었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시동구어(始動口語)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반지에서 초록빛이 새어나왔다.

    “…….”

    반응이 전무했다. 아티팩트에 마법적인 흔적이 없었다. 여기에 담긴 영상이 어떤 종류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실이라 믿어도 무방했다. 독사대공이 반지의 마법을 거둬들였다.

    “실례했사옵니다, 전하. 틀림없이 위조품이 아니옵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럽게 히죽거렸다.

    “정말로 확신하는가? 꽤나 자극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서 말일세. 나중에 놀라지 말고 지금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걸 추천하네만.”

    “허허. 소인을 기대하게 만드시는군요.”

    독사대공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띄웠다.

    “황송한 제안입니다만, 이 반지는 마계에도 몇 없는 8서클 마법사가 제작한 도구이옵니다. 구태여 전하의 시간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좋네. 모쪼록 만끽해주게나.”

    “예.”

    대공이 아티팩트를 가동시켰다. 부으응, 하고 아티팩트가 진동했다. 물건에서 영상이 투영되려는 순간 단탈리안이 말했다.

    “본인은 분명히 경고했네.”

    밀실에 영상이 펼쳐졌다. 어떤 풍경이길래 저리 경고하는가, 하고 독사대공이 긴장했다. 마침내 영상에서 첫 소리가 터져나왔다.

    ─ 아흣, 흐으으윽!

    “…….”

    독사대공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깨졌다. 여태껏 단탈리안의 맹공에 함락되지 않은 표정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그도 그럴 것이.

    ─ 하윽! 싫어! 안돼! 제발, 흐으윽! 그만……!

    ─ 닥쳐, 더러운 암퇘지 년. 내가 언제 언어를 말하라고 허락했냐. 돼지는 돼지답게 꿀꿀거려라.

    아티팩트가 정사 장면을 담고 있었으니까.

    대공이 당황하여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저, 전하. 이게 대체.”

    “조용히 하라.”

    단탈리안은 지극히 싸늘한 얼굴이었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다, 집중하라. 그런 기세가 살기처럼 내풍겼다.

    독사대공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여기까지 와서 단탈리안이 자신을 우롱할 리 없었다. 이 영상에 어떤 의미가 담겼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언인가. 독사대공은 비록 아티팩트에서 연신 울려대는 신음이 귀에 거슬렸지만, 고개를 돌려 영상에 집중했다.

    ─ 꿀……꿀꿀, 꾸울…….

    ─ 그래. 그거다, 더러운 암퇘지 년아! 네놈은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쓰잘데기 없는 육노예이다. 알겠냐, 더러운 암퇘지 년아. 네 년은 바닥에서 뒹굴기 위해 태어난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독사대공은 곧바로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영상에는 남자와 소녀가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눈앞의 사내, 단탈리안이었다. 그는 폭군처럼 군림하여 소녀를 희롱했다. 발가락을 핥으라. 자위하라. 자기는 천박하게 발정이 난 암퇘지라고 스스로 말해라. 끊임없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소녀는――.

    ─ 좋아. 나는 뭐냐? 더러운 암퇘지 년아. 아랫구멍이 허벌창인 네 년한테도 입구멍이 있겠지. 어디 그 음란한 혓바닥으로 지껄여봐라. 나는 네 년의 무엇이지?

    ─ 주인……단탈리안 님은, 흐읏. 저 암퇘지 바르바토스의 주인님입니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이자 평원파의 수장. 바르바토스였다.

    ============================ 작품 후기 ============================

    둘이서 저러고 놉니다.

    무척 오붓하고 다정하지요.

    [리리플]

    TheDaybreak// 다시 첫코를 탈환하셨군요.

    시크리트으// 아니나 다를까 라우라가 월등한 차이로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

    asd메이지// 기만에서 시작해서 기만으로 끝나는 단탈리안입니다.

    woomee9// 예, 그 부분을 후술할 생각입니다.

    루니엔ㅁ// 안 늦었습니다!

    의욕제로// 단탈리안이 자기 집 마련하겠다며 여리고 착한 대공들을 삥 뜯고 다니고 있습니다.

    할레데임// 이 세계에 오고나서야 자기 재능을 깨달았습니다.

    로나프// 일단 참고 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나중에 표지를 제작할 때 영향이 있을지도 몰라요!

    헬룬// 감사합니다.

    창공까마귀// 처음부터 끝까지 구라일 확률도 높습니다.(...)

    설문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곧 소설 표지가 바뀔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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