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9화 (139/510)
  • 00139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독사지옥(毒蛇地獄)의 대공은 요즘 들어 소문을 들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자. 서열 제71위의 최하위 마왕……허나, 기세가 좋은 모양이지 않은가.’

    최근 마왕 단탈리안이 지옥의 대공들을 차례대로 만났다. 그것만 보면 대수로울 게 없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을 만나고 난 이후로 대공들이 이상하게 조심스러워졌다.

    소문의 그 단탈리안과 만났다고 들었다, 실제로는 어떠한가, 그렇게 물어봐도 대공들은 하나같이 침묵했다. 말하고 싶지 않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런 분위기였다.

    지옥의 대공들은 마인을 통치하는 명실상부 최고 권력층이다. 그런 자들이 얘기하기를 꺼려한다. 보통 일이 아니다.

    ‘흥미롭군.’

    독사대공은 더더욱 궁금해져서 대공들을 캐물었다. 그러자 대공들은 장시간 침묵하며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구체적인 어조는 다르지만 그들은 한결처럼 이렇게 말했다.

    얕보지 마라.

    솔직히 독사대공은 그 한마디에 흥이 떨어졌다. 단탈리안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얕보지 마라――달리 말해, 다른 대공들은 처음에 단탈리안을 얕보았다는 얘기이다.

    ‘어리석은 놈들.’

    서열 제71위라서 방심했는가. 오히려 서열 제71위 주제에 돌풍을 몰아치며 월맹군의 핵심으로 떠올랐으니 더더욱 방심하면 안 되겠지. 대공들이라는 작자가 그것조차 몰랐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독사대공은 생각했다. 자신은 단탈리안을 얕보지 않는다. 틀림없이 무언가 '한 수'가 있을 터.

    자신에게는 그 한 수가 무엇인지 파악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현재 그러하다. 한 수를 알아낼 때까지 사자와 같이 경계심을 가져야만 한다.

    자아, 그렇다면 상대방의 격을 시험해보자.

    “가장 성대하게 무도회를 열어라.”

    아마도 다른 대공들은 단탈리안과 일대일 독담을 나누었다. 어리석었다. 마왕은 마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혼자서 상대해서야 이쪽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들킬 따름이다. 최대한 인원을 많이 준비한다. 이쪽의 감정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독사지옥에서 이름난 영애들을 모조리 불러들여라.”

    호족(虎族), 묘족(猫族), 사슴족, 엘프까지. 독사대공의 휘하에는 수많은 백작과 자작이 있다. 그들의 딸내미 중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들을 소집한다. 설마 단탈리안이 여인들의 미색에 홀려 어리버리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성은 기본적으로 여성에 약하다.

    주변에서 미녀들이 끊임없이 재잘재잘 떠든다. 그런 상황에서 냉정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설령 유지한다 하더라도 작게나마 빈틈을 보이게 된다. 그 빈틈을 십분 이용해준다.

    “가장 뛰어난 음악가를. 요리사를, 광대를 모아라.”

    청각, 미각, 시각,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정신은 결국 육체에 영향을 받는다. 육체가 풀어지면 정신도 풀어진다.

    독사대공은 이번 무도회를 준비하면서 무려 5천 골드를 쏟아부었다. 대공 자신이 직접 무도회 준비를 주도했다. 대공 아래의 휘하들이 어쨌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사실상 대공가 전체가 무도회에 주력했다.

    단 한번의 함정을 마련하는 데 5천 골드를 아끼지 않는다. 토끼를 잡을 때도 사자가 전력을 다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무도회 날이 다가왔다. 독사지옥 전역에서 유력 마족들이 모여들었다.

    무도회의 명분은 '월맹군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십시일반하는 모음회'. 마왕 단탈리안은 월맹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왔다, 그런 설정이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대공 전하. 그동안 안녕하셨사옵니까.”

    “오오. 롬바흐 백작. 무도회에 참석해주셔서 고맙소.”

    “전하! 건강하신 것 같아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바뤼흐 자작도 날이 갈수록 훤칠해지니 부러울 따름이오.”

    식상한 인사치레. 덧없는 웃음과 말소리.

    독사대공은 모처럼 열리는 대규모 무도회에 들떠하는 귀족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저들은 이번 무도회의 진정한 목적을 모른다. 이 기회에 단탈리안에게 잘보이고 싶어하는 부류는 극히 희박하리라.

    마계는 마계. 대륙은 대륙. 마계에서 권력을 향유하는 귀족 마인들한테 월맹군은 어차피 남의 이야기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영원히 너희가 백작과 남작 따위에 머무는 것이다.’

    얼마나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주었을까. 마침내 문지기가 높은 목소리로 기다리던 이름을 불렀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마왕 전하 납시오!”

    사람들의 이목이 무도회장 입구에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을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서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에스코트를 받았다. 분홍빛 머리카락. 저 여자가 단탈리안의 측근이라는 서큐버스인가.

    ‘이런 자리에 하급 마인을 데려오다니.’

    독사대공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고급 인사들이 모이는 무도회이다. 작위도 명성도 없는 하급 서큐버스를 파트너로 삼는 것은 예의도 아니었고 상식도 아니었다.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판단해야겠지……독사대공은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단탈리안 전하.”

    그가 한껏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소인의 조촐한 무도회에 발걸음을 해주시니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없나이다.”

    “본인이 조촐함이라는 단어를 지금까지 미처 잘못 알았소.”

    단탈리안이 마주 웃었다.

    “입구를 들어서는 데도 화려하며 깊은 멋이 있으니 감탄할 도리밖에 없었소. 대공! 이런 자리에 초대해주어 본인 또한 기쁘기 그지없소.”

    “황공하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하고 독사대공이 생각했다.

    ‘예상보다 평범하군 그래.’

    마왕이라기에는 위엄이 부족하다. 풍채가 미덥지 못하다. 어깨가 좁아 듬직하지 못한 느낌이 들고,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여 보기에 썩 좋지 않다. 귀족적인 예법에도 익숙치 않다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런 자가 월맹군의 새로운 핵심이라고?

    독사대공이 마음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과연. 얕보지 마라고 신신당부한 까닭이 있었군.’

    겉모습이 이리 비실해서야 저절로 얕보게 된다. 아마도 다른 대공들은 단탈리안의 외관에 방심하여 그만 한방 먹었겠지. 한심한 이야기이다. 외면에 속지 않고 내면을 주의하라. 정치의 기본 중 기본 아닌가.

    독사대공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나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왕.’

    그가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전하. 부디 마음껏 무도회를 즐겨주십시오.”

    “환대에 감사한다.”

    단탈리안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럼, 어디 즐겨볼까.”

    *  *  *

    무도회가 시작하고 네 시간.

    독사대공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가 무도회 한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단탈리안이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하하 웃고 있었다. 영애들도 무언가 재미난 농담을 들었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저 자……정말로 대단한 놈인가?’

    네 시간 내내 단탈리안은 진심으로 무도회를 즐겼다. 파트너인 서큐버스와 첫 춤을 추더니 이윽고 영애들에게 차례대로 권유하여 무도회를 만끽했다. 매번 파트너를 바꾸었다. 한 파트너와 춤을 연이어서 추는 법이 없었다. 절조 없는 녀석이었다.

    ‘언제까지 여자들이랑 놀아재낄 셈이냐!’

    호색한에도 정도가 있었다.

    지금 무도회에는 마계의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마왕이라면 여자들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려 들 것이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영애들에 푹 빠져서 도통 마계의 실력자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남자들이 단탈리안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마치 저 모습은 정말 무도회를 즐기는 것처럼…….

    ‘아니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것도 술책이다. 이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계략……그런 것에 넘어갈까보냐.’

    독사대공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언젠가 여자들에서 벗어나 독사대공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리라 믿으면서.

    무도회가 시작하고 여섯 시간이 지나도 단탈리안은 꿈쩍하지 않았다.

    ‘제기랄! 저건 연기가 아니다!’

    독사대공이 이를 악 물었다. 이제는 무도회를 파할 시간이 다가왔다. 귀족들도 영애들도 지쳤다. 설령 지금 와서 단탈리안이 무언가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실례하겠소.”

    결국 독사대공이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단탈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영애들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다급하게 예를 갖추었다. 단탈리안은 뒤늦게야 독사대공을 발견했다.

    “오오. 대공, 실로 훌륭한 무도회요.”

    “황공하옵니다. 소인이 혹여 전하를 방해하지 않았는지 염려되는군요.”

    “그럴 리가. 자아, 대공도 여기 앉으시오.”

    대공이 미소 지었다. 머저리가! 내가 새파란 여자애들이랑 환담이나 나누겠다고 행차한 줄 아는가.

    “그거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전하. 소인이 긴히 말씀드릴 바가 있나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조금 더 흥미로운 곳에 안내해드리고자 합니다만…….”

    “그렇소? 흐음. 어쩔 수 없군.”

    단탈리안이 영애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들. 즐거웠소. 언제 대륙에 들리면 내 마왕성에 놀러오시오. 멋진 밤을 선물해주지.”

    영애들이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단탈리안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 광경을 보면서 독사지공은 속이 뒤틀렸다.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서큐버스를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정말로 '그런'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을 밀실로 안내했다. 사방 십 미터 정도 되는 방이었다. 사치품이 전혀 없고 나무탁자와 의자만 덩그러니 놓였다. 방음마법이 철저하게 걸려 있어서 밀담을 나누기에 제격이었다.

    “누추한 곳입니다만.”

    “아니. 본인도 마침 휴식하고 싶었네.”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전하, 이번 모금회에서 족히 6천 골드를 모을 듯싶습니다.”

    “잘됐군. 그대들이 쾌척한 자금은 내 필히 유용하게 쓰겠네.”

    “…….”

    그게 전부인가?

    마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자신을 눈앞에 두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는가.

    독사대공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먼저 치고 들어갔다.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마계의 귀족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무도회에서도 줄곧 영애들과 함께하시니……허허. 제 주변에서 많은 귀족들이 아쉬워했습니다. 다들 전하와 대화를 나눠보기를 기대했습니다.”

    “아아. 그런가?”

    그거 미안한 짓을 저질렀군, 하고 단탈리안이 말했다.

    “하지만 본인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어차피 죽을 자들이니 말이다.”

    “……예?”

    단탈리안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목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가 너무도 평범한 어조였기에 독사대공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죽을 자들이라 말했다, 대공.”

    그 순간, 독사대공은 공기가 순식간에 적막해졌음을 느꼈다.

    바로 전까지와 전혀 달랐다. 미소는 똑같았다. 한없이 느긋한 어조도 똑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의 질이 바뀌었다. 독사대공은 놀랄 틈도 없이 표정을 관리했다.

    “어차피 죽을 자들이라니……하긴 마인들은 언젠가 죽습니다. 수명이 길다해도 마왕 전하들에 비하면 필멸자나 다름없지요.”

    단탈리안이 씩 웃었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뭐, 아무래도 좋다마는.”

    그가 손수건으로 목을 계속 닦았다. 그후로 아무런 말을 잇지 않았다.

    독사대공이 속으로 속삭였다.

    ‘침착해라.’

    허장성세이다. 협박이다.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예상대로 단탈리안은 무도회장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 사실이 드러났다. 단지 그뿐이다.――그러나 어차피 죽을 자들이라는 얘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전하. 혹여 소인에게 노하신 부분이 있다면 말해주시옵소서. 사죄하겠나이다.”

    “대공은 현재 월맹군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가?”

    갑작스러운 질문. 독사대공은 당황하지 않았다.

    “영광스럽게도 우리 마왕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경축드리옵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예?”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명백히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마왕군은 이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 마왕군이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무엇을 경축한다는 것인가.”

    “송구하오나……소인, 미진하여 전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마왕군은 결코 경의 한편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대공.”

    단탈리안이 독사대공을 흘낏 노려보면서 말했다.

    “마왕군이 대륙을 정벌하고 나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마계이다. 마왕군은 마계를 정벌하여 세계에 유일무이한 통치권자는 오로지 마왕밖에 없음을 천명할 것이노라. 가장 먼저 토벌될 경이 '우리'라고 말하다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

    독사대공의 심장이 경직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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