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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38화 (138/510)
  • 00138 풍요의 가을  =========================================================================

    모처럼 십 만 골드를 얻었다. 시트리가 빌려주기로 약속한 백 만 골드에 비해 한참 적은 액수일지라도, 던전을 공사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계획이 앞당겨진다.

    초기 자금, 비유하자면 장사 밑천……그걸 돌려주라니 말도 안 된다. 애당초 나는 일단 한번 받은 것을 남한테 돌려준 적이 없다. 침을 발랐으면 내 것이겠지!

    ‘하지만, 일을 하기는 싫다……!’

    섹스하고 싶을 때 섹스한다. 놀고 싶을 때 논다. 농사가 하고 싶을 때는 농사를 하고, 오늘은 기분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몬스터한테 맡겨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천국. 제아무리 십만 골드라는 돈이 좋다고 해도, 천국에서 제 발로 걸어나가라니 언어도단이다.

    내가 몹시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받아먹고 생까는 것은 어때?”

    라피스의 눈이 싸늘해졌다. 이런 음식물 쓰레기 같은 놈, 하는 눈빛이었다. 크으.

    역시 무리였는가. 당연하지만 말이다. 마계의 실력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해오겠지. 젠장.

    “애당초 왜 내 허락없이 마음대로 움직인 거야.”

    “제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단탈리안 님께서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셨을 테니까요. 어차피 평원파의 실세가 되신 이상, 마계와 관계를 맺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숙였다.

    “얼마든지 저를 책망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 간언을 들어주시기를. 단탈리안 님. <미네르바 작전>에서 단탈리안 님께서는 분명히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적들이 수동적이라면 감사할 일이다. 저쪽에서 방어적으로 나오면 이쪽에서 공격할 따름이다.”

    미네르바 작전. 바르바토스를 끌어들여 제8차 월맹군을 봉기하게 만드는 계략. 나는 라피스와 모략을 짜내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다른 이들이 잠잘 때 오직 나만은 날아오르겠다는 의미를 담아서.

    “실로 단탈리안 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허나, 작금에 단탈리안 님께서는 어쩌고 계십니까? 휴식을 빌미로 음란하고 방탕한 나날을. 아직 자금이 모이지 않았다는 핑계로 소일거리나 하고 있습니다.”

    처억, 하고 라피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지금 수동적인 자는 다름아니라 바로 단탈리안 님입니다. 대륙의 모든 세력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마왕군은 마왕군 나름대로, 인간군은 인간군 나름대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마음이 덜컹했다.

    라피스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정작 사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영지에 눌러앉아 소위 평화로운 한때를 보냅니다. 제 눈에는 그것이 평화가 아니라 폭풍전야의 고요로 비춥니다. 단탈리안 님께서도 아시겠지요.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 여유가 찾아오면 필시 인간계의 세력은 단탈리안 님을 본격적으로 적대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

    내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미래를 대비하겠다고 던전 건축을 계획했다. 돈이 모이지 않았다고 해서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가하게 지냈다. 정말로 미래를 대비했던 것인가? 영지민의 민심을 얻었고, 영주로서 지위를 다졌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최선이었는가?

    아니다.

    누구보다 내가 진실을 잘 알고 있다.

    “어리광부리지 마십시오. 단탈리안 님의 세력은 여전히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르바토스 전하의 신뢰가 없다면 당장에 무너질 만큼 허약한 세력입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라고, 단탈리안 님께서 말씀하셨을 터입니다.”

    그것은 내가 라피스에게 일 년 전에 한 말이었다. 내 편이 되어달라고 설득하면서, 하급 서큐버스 따위는 도움이 안 된다며 거절하는 라피스에게, 나는 분명히 그리 말했다.

    ─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다, 라피스 라줄리!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했으면서 지금 나는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그 모습이 라피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추었을지.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탈리안 님. 부디 스스로 일어서주십시오.”

    “…….”

    내가 침묵했다.

    백 번 옳은 지적이었다. 리프의 모험대에 사로잡혀 죽을 뻔 했던 게 고작 일 년밖에 안 되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에 떨며 반드시 생존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은 고작 일 년이 지나서 물렁해졌다. 모략이 성공했다고 해서 자만했는가. 조금은 쉬어도 상관없겠지, 하고 방심했는가.

    한심하다.

    “네 말이 맞다, 라피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를 멸시한 자들.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들. 그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것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지.……다른 누구도 아니라 이 내가 그걸 까먹을 줄이야. 마음에도 군살이란 게 생기는 법이네.”

    라피스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숙였다.

    “주제를 뛰어넘어 간언했습니다. 벌해주십시오.”

    “네가 없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고, 앞으로의 나도 없을 거야.”

    나는 그 말로 라피스를 용서했고 또한 그녀에게 감사했다. 라피스는 한층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적막하지만 더없이 가열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무언가가 시작된다. 아니, 시작하게 만든다. 흑사병을 이용하자고 결심했을 때도, 대륙을 지옥에 떨어트리자고 결의했을 때도 이런 공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시작하는 자에 속했다. 어느새 이 공기에서 멀어졌다. 그걸 라피스가 되찾아주었다……그녀에게 고마워할 것이 계속 쌓여만 간다.

    라피스가 바라는 것은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지.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행동으로 보여준다.

    “마계의 권력자들이라 했어? 내 얼굴 한번 보겠다고 십만 골드를 내준 거다. 기대에 응해주지 않으면 섭섭해하겠지.”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라피스. 누가 돈을 더 많이 냈는가를 알려줘. 차례대로 접선해보자.”

    “그렇게 말씀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라피스가 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란 미소였다. 라피스는 품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재화를 투자한 자들을 적어둔 목록입니다. 마계에 현존하는 스물여섯 명의 대공(大公) 중에 총 스물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우선적으로 만나셔야 합니다.”

    “훌륭하군.”

    나는 그녀의 수완을 칭찬했다.

    마계에는 스물여섯 개의 지옥이 있다. 여기서 지옥이란 단순한 비유로, 단순히 영지를 가리킨다. 즉 마계는 기본적으로 스물여섯 개의 영지로 이루어져 있다.

    라피스가 건네준 양피지에는 지옥의 명칭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에게 투자한 자들이 다스리는 영지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흑승지옥(黑繩地獄).

    규환지옥(叫喚地獄).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초열지옥(焦熱地獄).

    무간지옥(無間地獄).

    그외 이십 개의 영지명이 주르륵 이어졌다. 지옥을 다스리는 자를 대공이라 부르며,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이름에 칭호를 붙인다. 예컨대 초열지옥을 다스리는 대공은 초열대공이라 부르는 식이다.

    인간계인 대륙에 거점을 둔 일흔두 명의 마왕. 마계를 다스리는 스물여섯 명의 대공. 이들이 마족을 이념적으로,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최고위층이다.

    마왕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태어날 때부터 마왕일 수도 있고, 평범하게 마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왕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줏대가 없다. 반면에 대공이 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적자생존.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대공이 된다. 출신도 상관없다. 신분도 상관없다. 끊임없는 무한경쟁의 틈바귀 속에서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대공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당연히 배신과 계략, 합종연횡이 들끓는다.

    마왕 중에는 서열 제72위의 안드로말리우스처럼 정신머리가 썩어빠진 놈도 있다마는……지옥의 대공들은 다르다. 순전히 실력파이다. 언제 자세를 굽혀야 하는지, 언제 뒤통수를 후려갈겨야 하는지 본능으로 승화시킨 녀석들이다.

    지금 그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일 때라고 판단했다. 어째서인가. 내가 강력해서가 아니다.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시트리 등, 마왕군 파벌들 한가운데에 내가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생각했겠지.

    그만한 핵심 인물이 아직까지 어느 대공과도 연줄이 없다.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서 단탈리안과 인맥을 쌓아두어야 한다. 나를 포섭하기만 한다면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까지 영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이 정도 계산이 있었을까. 발 빠른 대처이다.

    라피스는 이걸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시간을 질질 끌면서 대공들을 초조하게 만들었으리라. 대공들은 그걸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다 다른 대공보다 뒤처지면 안 되니까. 유능한 권력자일수록 경쟁자에게 뒤떨어지는 것을 극심하게 경계한다. 이번에는 그 유능함이 도리어 이용되었다. 제 발에 자기들이 걸려 넘어졌다.

    과연 라피스이다. 돈이 관련된 일에 한해서 라피스는 틀림없이 일급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안목은 둘째치더라도, 하급 마족 태생으로서 지옥 최고의 권력자들을 감히 등쳐먹다니 보통 배짱이 아니다.

    ‘어쩌면 날 배려한 걸지도 몰라.’

    라피스는 어리석은 워커홀릭이 아니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왕증후군에 한창 시달릴 때 니블헤임으로 휴가를 가라고 권유한 이가 다름아니라 그녀 아니었는가.

    그러니까 단 한 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쉬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동안 라피스는 나를 대신하여 물밑에서 움직였다. 약간의 휴식을 인정했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준비했다. 이쯤 쉬었으면 괜찮다 판단하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를 독촉했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나는 양피지를 차근차근 읽다가 문득 라피스를 쳐다보았다. 청금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하신 점이라도?”

    틀린 걸 틀리다고 판단할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고한다. 나에게 체력을 재충전할 시간을 주고, 어떻게 해야 내가 설득될지 계산하여 움직인다. 그처럼 현실적으로 행동하기에 하급 마족에서 여기까지 출세한 것이리라.

    “아니, 그냥.”

    내가 웃었다.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참 좋다 싶어서.”

    “…….”

    라피스가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처럼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평소대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확인하셔야 할 서류는 그거 한 장이 아닙니다. 각 지옥대공의 성향, 대공들 간의 관계를 조사해왔습니다. 그중에는 평원파와 친밀한 대공도, 산악파에 협조적인 대공도 있습니다. 정치적인 사항을 확실하게 파악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어이구야. 나 죽네, 나 죽어.”

    앓는 시늉을 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감사했다.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할 점들이었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서류를 검토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라피스의 보고서는 핵심적인 부분만 짚고 있었다. 자기가 이만큼 조사했고 이만큼이나 알고 있다, 라고 자랑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만 중요한 사항을 논리적으로 착착 썼다.

    “좀 이상하네. 아무리 그동안 산악파가 강세였어도 친산악파 대공이 너무 많은걸.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예. 거기에는 대다수의 지옥대공이 인간계 정벌에 회의적이라는 뒷배경이…….”

    게다가 궁금한 점을 물으면 바로 대답해준다. 이보다 더 유능하기란 힘들겠지.

    덕분에 나는 단 하루 만에 마계의 권력구조를 통달했다. 중간에 라우라가 들어와서 우리 둘의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금방 질렸는지 침대에 가서 곯아떨어졌다. 라피스와 나는 촛불을 켜가면서까지 밤새도록 얘기를 주고받았다.

    “좋아.”

    새벽쯤에 내가 말했다.

    “이 정도면 계획을 실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이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라피스가 또 옅게 웃었다. 저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디 지옥의 대공 나으리들을 영접해볼까.”

    어디까지나 '단탈리안'에게 어울리는 수단과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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