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7 풍요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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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루 만에 수확을 끝마쳤다. 다음날, 나는 느긋하게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어디든 흥겨운 풍년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라우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백성들이 기뻐하니 소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다 제 재산이지요.”
“……삐딱하기는.”
라우라가 동태눈깔로 나를 쳐다봤다.
“그거 아는가? 주군은 가끔 일부러 고약하게 말한다. 위선은 경멸받을 것이지만 위악(僞惡)도 그만큼 한심스럽다. 자신의 진심을 위장하고 변명하기 때문이다.”
“크흥.”
내가 멋쩍어져서 입가를 실룩거렸다. 최근 들어서 라우라가 날 비판하는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섹스러운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 것과 정확히 때가 겹쳤다. 보통 남자가 힘을 쓰면 여자의 잔소리가 줄어든다는데 어째 우리는 완전 정반대야…….
“헌데 주군. 왜 골렘을 농민들에게 빌려주지 않았는가?”
라우라가 주제를 바꾸었다. 얄미운 것!
라피스와 다르게 라우라는 잔소리를 길게 끌지 않는다. 한 마디 촌철살인을 던져두고 마치 잊어버렸다는 듯 다른 얘기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도리어 이쪽에서 뭐라 반항할 수가 없다.
“농사에 관해 골렘이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준다는 게 증명되었다. 농민들에게 대여해주면 그만큼 수확량이 많아질 터인데.”
“물론 효율은 좋아지겠죠.”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형평성이 안 맞습니다.”
“형평성?”
“예.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부농(富農)이 거금을 들여 제 골렘을 빌립니다. 놀랍도록 농사가 편해지겠지요.”
거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농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영주님은 돈 있는 자를 우선시한다, 돈이 있고 없고가 영주의 판단 기준이다……그렇게 받아들이겠지.
“곤란한 일입니다. 효율만 추구해서야 정작 영지의 단결력이 떨어지니까요. 영지민을 두 집단으로 나눠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돈 몇 푼 벌겠다고 영지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다니, 도저히 군주가 할 짓이 아닙니다.”
“으음.”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영주의 힘이 곧 영지의 힘 아닌가? 어차피 주군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은 빈민이 아니라 부농이다. 그렇다면 부농에게 약간 유리한 정책을 펼치는 편이 오히려 장차 주군에게, 영지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다만.”
그럴 수도 있다. 공화주의자를 제외하고 이 시대 사람들은 영지가 곧 영주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우라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사색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공화주의니 뭐니 사회와 관련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 한 사회를 책임지는 재상이 될 인물이었는데 말이지―.
<던전 어택>에서 브르타뉴 왕국이 패망해버린 데 다 이유가 있다니까.
내가 말했다.
“뭐. 사실 뭐든지 효율의 문제입니다. 사회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있습니다. 이때 지배하는 자가 많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저 지배자를 따르고, 또 이 사람은 다른 지배자를 따르고……겉모습만 하나이지 실상 여러 사회가 있는 셈입니다.”
여차할 때 국론이 분열해버린다.
나의 영지에는 단 한 명의 지배자, 마왕 단탈리안만 있으면 된다.
“부농이 대접받는다고 해보십시오. 당장 여러 개의 부작용이 떠오릅니다. 먼저, 영지민들이 무엇이든 돈이 출세의 수단이라 생각해버립니다.”
저수지를 만들거나 성벽을 쌓을 때 모두가 함께한다. 외적이 침략해도 모두 동등하게 목숨을 걸고 싸운다. 왜 부농만이 혜택을 받는가.
우리 영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충성이 아니다. 헌신이 아니다.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
“결국 저에 대한 헌신이 적어지고 재산을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어버립니다. 라우라, 알겠습니까? 영지에 두 명의 군주가 생겨버리는 것입니다. 마왕 단탈리안과 '돈'이라는 이름의 군주가.”
그래서야 안 된다.
재산이 많고 적음은 순전히 개인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재산을 많이 모았는가? 축하한다. 마음껏 즐겨라. 하지만 그것이 군주인 나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데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는 일개 영지민이고, 나는 유일한 군주이므로.
“저는 절대적인 군주가 되고 싶습니다. 딱히 제가 만사에 개입하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영지민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도 편하거든요!”
“과연.”
라우라가 감탄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얼마나 주군을 위해 헌신했느냐, 오직 그뿐이군.”
“저는 곧 영지이니까요. 얼마나 영지 전체를 위해 헌신했는가. 그렇게 표현해도 좋습니다.”
“으음.”
라우라는 내 말에서 무언가 단초를 찾았는지 말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멀리 밀밭 사이에서 아낙네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오른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것이 뭐 그리 좋은지 아줌마들이 저들끼리 와락 깔깔거렸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풍경이었다.
우리가 길을 따라 다가가니까 아낙네들이 낫질을 멈추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어우, 왕비님 너무 예쁘세요!”
“두 분이 있는 거 보면 정말 천생연분이라니까!”
라우라가 퍼뜩 놀랐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와, 왕비라니……그런 게 아니다.”
“아니라뇨? 마왕 나으리의 아내시잖아요. 그럼 왕비 전하이죠.”
주변에서 여자들이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쳤다.
“아, 아내라니…….”
라우라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손을 마구 흔들면서 변명했다.
“소녀는, 단지, 뭐라고 할까. 아내가 아니라 신하라고 해야 할까……아니, 주군의 동반자라 해야 할까……. 아, 아무튼 아내가 아니다! 왕비라니 당치도 않다!”
“예에? 저희는 지금까지 아씨가 마왕 나리의 부인인 줄 철썩처럼 믿고 있었는데.”
아낙네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어디 한번 설명해주십시오, 하는 눈빛이었다.
“…….”
라우라도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슬그머니 날 쳐다봤는데, 눈길이 마주치니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오호라.
굳이 상태창에서 심리를 읽을 필요도 없다. 라우라는 꿈많은 열일곱 살 소녀. 특유의 죽음관(觀)으로 세상사에 시니컬했다지만, 누군가의 부인이 되는 것은 라우라에게도 큰 의미를 갖겠지.
실제로 우리 둘이 부부인가 아닌가를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부부로 보였다……그것만으로도 라우라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실로 나이에 걸맞게 귀엽지 않은가.
“라우라. 여길 보십시오.”
“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오른팔을 둘렀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목 뒤를 받쳤다. 라우라가 뭐지, 하고 표정에 물음표를 띄웠을 때――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우읍!?”
기습적인 키스에 라우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은지 계속 웁웁거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녀의 반항에 상관하지 않고 아예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딥키스.
“어머나, 어머나!”
“꺄아아악! 세상에나!”
아낙네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움이 한 가득 배어묻은 경악이었다. 남사스럽다고 타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소리 지르면서 이벤트를 만끽했다.
라우라가 양손을 휘저으면서 반항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을, 이라고 초록색 눈동자가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남들이 보는 앞이라서 하는 거다, 소녀여. 나는 더더욱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쑤기고.
“으프읍, 으읍, 프흣!?
어루만져주고.
“으읍, 으브븝, 큽……으으으읍, 흐아, 흐읍, 읍!”
빨아주고.
“흐아아앙, 주군, 으읍! 흐으으읍……아, 하아, 으읍, 아, 흐프으!”
섞어준다.
“우으읍, 흐으읍……으응, 흐으으응……주군, 아……싫, 으으으읍, 하읍, 안돼, 으으으으읍……!”
라우라가 무릎에 힘을 잃고 내 가슴팍으로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그녀는 호흡곤란에 걸린 것처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숨을 색색거렸다. 나는 라우라를 한팔로 안은 채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
“…….”
아낙네들은 더 이상 꺄악꺄악 거리지 않았다. 나이 많이 먹은 아줌마도 부끄러운지 볼이 빨갰다. 다들 내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했다. 그중에 처녀처럼 보이는 아가씨는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본디 왕이란 삼첩, 사첩을 거느리는 법. 이 여자는 과인의 것이다. 다른 말이 또 필요한가?”
아낙네들이 쥐죽은 목소리로 아닙니다 전하,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무안했는지 농기구를 챙겨서 부리나케 달아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일거리를 놓고 도망친 것이었다.
농민들의 순수함이 재밌어서 내가 키득거리는데 라우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주, 주군…….”
그녀가 내 옷가슴을 잡고, 물기 섞인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숨결에 열이 담겨 있었다. 이런, 조금 지나치게 놀려먹었나……아무래도 스위치가 켜진 모양이었다.
“하고 싶군요?”
“…….”
라우라가 딱 0.1cm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창 때의 소녀. 격렬한 키스 탓에 발정해버렸다고 할지라도 그걸 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내 책임이 아니겠는가.
“벗으세요.”
“흐에?”
라우라의 눈이 왕방울이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별장에 가서…….”
“저는 여기서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 하지만 여기는 바깥…….”
“지금 당장.”
내가 라우라를 살짝 끌어안았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여기서, 곧장, 일직선으로. 라우라의 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시, 시, 싫다!”
라우라가 내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전혀 없어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짐승! 오크! 발정난 개! 어, 어떻게 바깥에서 그런 짓을……믿을 수 없다!”
“허어. 방금 전까지는 하자고 졸랐으면서 알겠다 말하니까 화를 내다니, 앞에서 하는 말이랑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군요.”
나는 그녀를 더욱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나오면 아무리 관대하고 상냥한 저라도 화가 납니다!”
“흐, 흐아아앙.”
그녀가 정말로 울상을 지었다.
“안 된다, 주군……그러면 정말로 짐승이 교미하는 거랑 뭐가 달라지는가. 부디 마왕으로서 체통을 지켜달라!”
“인간이든 마인이든 본디 짐승. 짐승처럼 교미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절대 아니다――!”
라우라가 절규하든 말든 내 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그대로 라우라를 발가벗겨서 밀밭 한 가운데서 뒤치기했다. 밀대가 땅을 푹신하게 덮고 있어서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처음하는 야외 플레이에 흥분하여 그만 노을이 지고도 주변이 깜깜해질 때까지 해버렸다. 석양에 빛나는 라우라의 하얀 맨살이 무척 아름다웠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이번만큼은 라우라가 완전히 대노하여 기분이 풀리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훔쳐봤을 거라나 뭐라나. 훔쳐봐서 더 기분이 좋은 것 아닌가, 하고 내가 내심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 * *
온 마을에서 수확이 끝날 즈음해서 라피스가 찾아왔다.
슬슬 올 무렵이라 생각해서 반갑게 맞이했는데, 이게 웬걸. 라피스는 몸만 들고 오지 않았다.
“……이게 뭐냐?”
“단탈리안 님의 것입니다.”
눈앞에는 그야말로 보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보석함, 금화상자, 각종 값나가 보이는 장식구와 무구까지. 세상에, 이게 대체 뭐야?
“정확히 10만 3천 504골드입니다.”
“…….”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자니까 라피스가 서류를 건넸다. 서류에는 뭔지 모를 이름들이 짜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이, 이건 또 뭐야?”
“단탈리안 님께서 앞으로 만나보셔야 할 마계의 주요인사 목록입니다.”
라피스가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동안 평안하게 지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단탈리안 님께서 지루해하실까봐 염려되어 일거리를 만들어드렸습니다.”
이 년이?
“나 조금 더 쉴 거야!”
“유감이로군요.”
전혀 유감이 아닌 어조였다.
“이 10만 골드는 단탈리안 님과 만나게 해드리겠다는 걸 빌미로 받아낸 것입니다. 이제 와서 만나지 않으시겠다니 전부 돌려줘야 합니다만……돌려줄까요?”
라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왔다.
실로 악랄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너 같은 강적은 처음이다.
============================ 작품 후기 ============================
라피스: 동생, 일하지 않는 남자는 이렇게 다루세요.
라우라: (눈을 반짝거리면서) 언니…….
단탈리안: …….
전 편에 100만 골드라 적은 것을 10만 골드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