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6화 (136/510)

00136 풍요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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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탈리안과 라우라에게 올해 여름과 가을은 행복했다.

겉보기에는 하루에 몇 번 자느냐 따위로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만족스러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정쟁과 전쟁을 전전하면서 그토록 얻고자 했던 평온을 손에 넣었다.

그렇지만 이 평화는 폭풍의 핵이었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겨우 작년에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함으로써 모습을 드러낸 신출내기 마왕은, 불과 일 년 사이에 마왕군의 핵심 인물로 급부상했다.

물론, 이따금씩 서열을 뛰어넘어 힘을 발휘하는 마왕이 생겨나곤 했다. 지금은 몰락하고 있는 마왕 파이몬도 서열상으로는 제9위에 불과하나 영향력으로 따지면 마왕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하지만 서열 제71위……서열 제72위인 안드로말리우스가 격살 당한 이상, 사실상 최하위. 그 정도로 하찮은 마왕이 월맹군 전체에 손을 뻗은 사례는 드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신진 세력이 등장한 것이었다.

마계사회는 언제나 마왕군의 행보에 촉각을 기울였다. 단탈리안은 꽤나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단탈리안이 대체 누구야?”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동안 서열 제71위에 관심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단탈리안에 대한 정보는 극히 희귀했다. 약간의 진실, 대다수의 거짓, 여기에 뒷소문을 빙자한 음모론이 뒤섞였다. 마계사회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듣자하니 바르바토스 전하의 오른팔이라던가. 단순한 수하가 아니라, 보다 내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머저리 같은 놈! 바르바토스 전하는 동성애자야. 남성을 애인으로 삼을 리 없어. 그보다 평원파의 최고 참모라고 하던데. 사실상 평원파의 두뇌야.”

특히 지난 이천 년 동안 처녀성을 지켜온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의 열애설에 마계는 후끈 달아올랐다. 바르바토스는 원래부터 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누구보다 마계를 위하여 헌신한 마왕으로 유명했을뿐더러, 비록 동성애자이긴 해도 처녀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뭇 남성에게――그리고 소수의 여성에게――마니악적인 지지를 받았다. 여느 평민 집에도 바르바토스의 초상화는 심심치 않게 걸려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마침내, 드디어 남성과 사귀는 것인가?

서열 제8위와 서열 제71위. 사랑이 이루어질래야 이루어질 수 없는 격차. 그런 두 마왕의 로맨스가 마인들의 심장에 명중했다. 세기의 사랑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하는 부류가 있었다.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도둑놈!”

“감히 우리 모두의 바르바토스 전하를 농락했겠다!”

“그 새끼 거시기의 껍질을 식칼로 도려버리겠어.”

한 마인 작가는 이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나, 바르바토스의 첫 남자>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집필했다. 저잣거리에 흔하게 널린 기사도물을 약간 변형한 물건에 불과했으나 이 이야기책은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다. 마계사회의 모든 필사가들이 <나, 바르바토스의 첫 남자>를 배껴서 팔아재끼느라 한동안 끼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인들은 가십거리에 흥분할 따름이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사태를 바라보고자 한 이들은 로맨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생각했다.

“제71위가 거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겠지. 잘 생각해봐라. 단탈리안이 부각된 이후로 평원파와 산악파가 정면으로 대결하기 시작했어. 이게 뭘 뜻하겠냐.”

“……마왕 단탈리안은 평원파가 산악파의 공격을 집중시키기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라고?”

“암.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공교롭지. 아마도 단탈리안은 머지않아 희생될 걸세. 산악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평원파에서 선심 쓰듯 건네주겠지. 결국 부나방에 불과해.”

이들에게 현명함이란 대다수의 대중과 다른 의견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다. 즉, 그들은 일반 대중과 의견이 다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논리로든 간에 특이한 주장을 만들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자기만족이 중요했으며, 더 정확히 얘기해서, 자기를 만족시켜주는 진실만을 원했다.

오로지 극소수의 마인.

그들은 권력자였다. 진실을 추론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을 직접 입수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이 정말로 월맹군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바르바토스뿐만이 아니다. 벨레드, 제파르와도 친밀하다. 의형제까지 맺었다더군. 사실상 평원파 내부에서는 최고위급 인사로 대접받는다고 한다.”

“게다가 마르바스까지 한편인가. 허! 말이 안 되는군.”

“평원파와 중립파뿐만이 아니다. 전해 듣기로는 가미긴도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고…….”

“아니, 심지어 시트리까지…….”

초유의 신진이었다.

단순히 무력이 어마어마해서 급부상했다면 얘기가 간단해진다. 그런 마왕은 드물지만 가끔 있었다. 당장 현재 서열 제1위를 차지하는 대마왕 바알도 삼천 년 전에는 하급 마인이지 않았던가.

이 신진은 달랐다. 무력이든 재력이든 그런 것은 별 볼 일이 없었다. 경악스러운 것은 그 정치력. 정치적인 파장이 무시무시했다.

단탈리안은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 무소속의 마왕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었다.

“하, 하지만 그래봤자 서열 제71위이다. 대단한 권력은 행사할 수 없겠지.”

“멍청하기는. 단탈리안 본인이 권력을 행사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단지 각 파벌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면 돼. 그것만으로 마왕군의 판도는 180도 달라져!”

“독자적인 힘은 미약하지만 정치력은 비할 데 없이 광범위……앞으로, 마왕군의 행보는 단탈리안에서 시작하여 단탈리안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맥을 쌓아두어야 한다.

마계사회의 권력자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곧이어 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단탈리안과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어떻게 단탈리안과 안면이 있는 자가 없는가!”

“작년에야 데뷔한 마왕이다. 안면이 있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단 한 명도 행방을 알지 못하다니, 이건 조금 심각하군…….”

“정보부를 총동원해라! 무능한 놈들! 제1순위로 해결하란 말이다!”

권력자들의 집념은 집요했다.

한여름이 될 즈음해서, 그들은 단탈리안이 쿤쿠스카 상회와 전속 계약했으며 상회의 대리인이 라피스 라줄리라는 일개 하급 서큐버스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수천 년에 걸쳐서 상회의 보안을 철통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더라면 권력자들은 이틀 만에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그리하여.

“라줄리 공! 독사지옥의 대공께서 전하시는 말씀이오. 부디, 올 가을에 열리는 추수제에 단탈리안 전하께서 참석해주시기를 바라며…….”

“월맹군의 드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후원회 행사에 꼭 단탈리안 전하를 초청하고 싶습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라줄리 님을 위해 준비한 수고비입니다.”

“니라부타 지옥의 후작 각하께서 친히 둘째 따님을……!”

“아니, 그보다 올발라 지옥의 공작 각하께서.”

라피스에게 온갖 청탁과 뇌물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반인반마로 태어나 평생 따돌림을 당한 라피스는 하루아침에 신세가 바뀌었다.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순한 양이 되어 라피스에게 달라붙었다.

1년 전만 해도 하급 서큐버스 따위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을 권력자들, 그들의 대리인들이 이제는 갖은 아양을 떨어가며 다가왔다. 그중에는 남작 작위를 내려주겠다고 꼬시는 이들까지 있었다. 단탈리안의 측근이라는 것만으로 단숨에 신분이 상승해버린 것이었다.

“…….”

라피스는 짜릿함을 느꼈다.

비천하게 태어났다. 비루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 끝마저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피와 땀으로 살아왔다. 마침내 자신의 노력이 보답을 받았다…….

만약 여기서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버렸다면 라피스 라줄리는 그저 그런 인물로 남았겠지. 그러나 라피스는 그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에 단탈리안이 그녀를 기용한 것이었다.

라피스는 먼저 권력자들의 청탁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했다. 뇌물을 잔뜩 받아챙겼다. 모처럼 저쪽에서 공짜로 주었다. 사양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권력자들은 곧 있으면 단탈리안과 만날 것이라 기대하며 기꺼이 막대한 뇌물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들이 단탈리안과 대면할 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라줄리 공. 분명 이번 달에는 단탈리안 전하와 만남을 주선해주겠다 약조하지 않았소외까!”

“죄송합니다.”

라피스가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월맹군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마계에 방문하실 여유가 도저히 생기지 않습니다.”

“저번 달에도, 저저번 달에도 그리 말씀하셨소!”

어느 지옥의 대공이 대리인으로 보내온 은랑(銀狼)이 붉그락푸르락 표정을 구겼다.

“이제 초가을이오. 벌써 가을이 되었다는 말이외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단탈리안 전하를 접견할 수 있겠소?”

“9월 중순에는 반드시 자리를 마련하지요.”

“크으.”

은랑이 입가를 벌렁거렸다.

만남을 부탁한 게 6월이었다. 어느새 세 달이나 약속이 미루어졌다. 지금 단탈리안을 노리는 마계의 세력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다른 곳보다 빠르게 단탈리안과의 인맥을 선점해야 하는데, 눈앞의 서큐버스가 중간에서 자신을 농락하고 있었다.

‘얼굴만 무표정하지 속에 독사를 수백 마리 키우는 년이다!’

감히 비천한 반인반마 주제에 고귀한 은랑족을 멸시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가리를 벌려 저 년의 모가지를 씹어먹고 싶었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칼은 저쪽에서 쥐고 있으니까.

은랑이 분노를 삼키면서 겨우 말했다.

“알겠소. 9월에는 반드시! 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를 만나뵙겠소!”

“예. 너그럽게 양해해주셔서 단탈리안 전하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라피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동작이 또 어찌나 공손하고 깔끔한지, 은랑은 다시 한 번 살의가 치솟아오르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그가 미리 준비해온 금속상자를 내밀었다. 금속상자에는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것은 대공이 단탈리안 전하께 바치는 작은 성의요.”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재화를 앞에 두었으면서도 라피스는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상자를 넘겨받을 뿐이었다.

은랑은 내심 이 서큐버스의 담력에 질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라피스의 사무실에서 나갔다. 9월이 되어도 결코 단탈리안을 만날 일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왠지 모르게 들었다…….

라피스는 은랑을 배웅하고 보물상자의 값어치를 매겼다. 최근 들어 보석을 접하는 일이 부쩍 늘었기에 안목이 덩달아 높아진 라피스였다. 라피스가 장갑 낀 손으로 보석들을 하나씩 감정했다.

“사파이어, 다이아몬드……거기에 약간의 금화입니까. 2천 골드는 되겠군요.”

이 정도면 그럭저럭 중박이네요, 하고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마계의 권력자들과 한창 밀당을 하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단탈리안과 만나기를, 그것도 경쟁자들보다 빠르게 만나기를 열망했다. 라피스는 그런 열망을 이용했다. 그녀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그대들을 단탈리안과 연결시켜줄 수 있다. 하지만 맨입으로는 안 된다. 간단하게 만남을 주선해주지 않겠다.

돈을 내놓아라.

가장 돈을 많이 낸 자에게 선착순 1번을 부여하겠다. 1만 골드를 냈다고? 부족하다. 이번에는 2만 골드를 가져왔다고? 그래도 부족하다. 돈, 더 많은 돈을 진상하라.

요컨대 라피스는 감히 마계의 권력자들을 경주마로 삼아 경쟁시키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그녀의 속셈을 깨달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경쟁자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뇌물을 갖다바쳤다.

라피스가 보물상자를 봉인하고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녀는 깃펜을 놀려 종이에 액수를 적었다.

“이제 팔만 골드……이 정도면 되겠지요.”

지난 세 달 동안 권력자들로부터 강탈한 금액이 자그마치 8만 골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단탈리안을 위하여 모으고 있었다.

‘지금이 돈을 벌어야 할 때입니다. 단탈리안 전하에 대해 너도 나도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라피스는 단탈리안의 허당끼를 익히 알았다. 월맹군 전쟁으로 인해서 단탈리안의 가치가 실재보다 한없이 높아져버린 현재가 기회 중의 기회라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즉, 지금 벗겨먹어야 합니다.’

라피스의 푸른 눈이 빛났다.

그녀의 상인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뒤, 또 다른 권력자의 대리인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이번엔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우락부락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라줄리 님! 이번 달에는 틀림없이 단탈리안 전하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잖소!”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현재 월맹군의 밀명을 받아서…….”

능수능란하게 드워프를 구워 삶으면서 라피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딱 2만 골드만 더 모으죠.’

그렇게 마음먹는 와중에도 라피스는 더없이 덤덤했다.

마계의 모든 권력자는 이 하급 서큐버스의 사악함에 부들부들 떨었다.

============================ 작품 후기 ============================

라피스: 혼수로 적어도 10만 골드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자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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