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5화 (135/510)

00135 풍요의 가을  =========================================================================

온 대륙이 흉년에 앓고 있는 와중, 나의 영지는 풍년을 맞이했다.

밀밭이 바람에 부끄러워하며 황금빛을 흩날렸다. 그 위로 농부들의 웃음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성스러운 종소리처럼. 아낙네들이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낫을 휘둘렀다.

마치 노란 바다를 헤엄치는 돌고래들 같다……이런, 지나치게 감상적이게 되었나. 요즘 농삿일을 하더니 독기가 많이 빠졌다. 생애 처음으로 '내가 길러서 수확한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마음이 조금 물렁물렁해져도 이상하지 않겠지.

자그마한 밭.

텃밭보다 조금 크다, 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밭이지만 이래봬도 순전히 나의 힘으로 일군 곳이다. 이삭이 빽빽하게 들이차서 넘실거리고 있다.

가슴속이 찡― 하게 울렸다.

“흐흐흐.”

말없이 감동하고 있자니 옆에서 파르시가 웃었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소인도 첫 수확 때 무진장 감동했지.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오. 나리도 똑같구만.”

“아아. 밀알들이 꼭 고블린처럼 사랑스럽군.”

파르시가 으엑,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낫을 건네주었다.

“……그 미의식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아무튼 수고했소, 나으리. 이제 마지막으로 수고할 차례요.”

“후, 내 농부력은 이미 천원(天元)을 돌파했다.”

내가 코웃음 쳤다.

실제로 나는 자신만만했다. 처음에야 어리버리했지. 파르시한테 이것저것 배운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농부야말로 내 천직이 아니었는가, 그런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참고로 능력창에 농부 직업까지 생겼다.

단순히 생긴 정도가 아니었다. 모든 직업 가운데 월등하게 등급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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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36    악명: 4543

직업: 농부(C), 마왕(D), 던전운영자(F)

통솔: 34/37  무력: 11/22  지력: 32/37

정치: 35/35  매력: 20/20  기술: 8/17

*칭호: 1.공포의 마왕 2.천부적 농사꾼

*능력: 농기술(C), 전술(E), 사격술(E),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3개]

[부하: 54개체/26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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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1. 공포의 마왕.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마인에게 경의를, 인간종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통솔 한계치+10, 지력 한계치+10, 매력 한계치+10, 부하개체 한계치+100, 악명+500

2. 천부적 농사꾼.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직업(농부)과 능력(농기술) 레벨을 상승시킨 자에게 부여된다. 해당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무력 한계치+10, 기술 한계치+5, 직업 <농부>를 가진 이들에 한하여 호감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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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던전운영자, D급 마왕에 비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그 이름. 입에 담기도 차마 거룩하여 조심스러운 등급……레벨 C.

제아무리 석궁을 쏘아대도 사격술은 죽어라고 E급에서 꿈쩍하지도 않았는데, 농기술은 고작 여름이랑 가을에 고생했을 뿐인데도 F급에서 C급까지 수직선을 그리며 상승했다. 덕택에 무력 능력치까지 요 몇 달 사이 무려 4나 올랐다.

실로 농삿일에 타고난 자. 천재, 아니 귀재(鬼材)……그렇게 표현해도 무방하겠지.

심지어 칭호까지 생겨났다. 이 세계의 시스템마저 나를 천부적인 농사꾼이라 인정했다. 세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라니. 소름이 돋는다. 나 자신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무시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마왕 단탈리안!

후후후.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옆에서 파르시가 '얘는 왜 또 이럴까'라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무얼, 그래봤자 우민이다. 중세의 머리로는 과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통치자의 관용으로 너그러이 이해해주겠다.

“그거 아쇼? 나리는 가끔 무척 재수없소.”

“너 너무한다!”

설령 그렇게 느끼더라도 그냥 넘어가주는 것이 영주에 대한 예의잖아!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재수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하지만……잘난 척 좀 하는 게 어때서!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일 년 반이 흘렀는데도 가장 높은 능력의 한계치가 37이다. 40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요 몇 달 사이에 무력의 한계치를 20대까지 높인 것이다. 속도가 엄청나다. 조금쯤은 자랑해도 괜찮잖아!

“성장이 빠르다고 말해본들 말이외다. 나리, 올해로 춘추가 어찌되오?”

“어……다음달이면 딱 스물다섯 살인데. 그게 왜.”

“소인이 열일곱 살이오.”

파르시가 콧방귀를 뀌었다.

“소인보다 자그마치 여덟 살이나 많은 양반께서 성장이 빠르니 뭐니 해봤자 솔직히 공감하기가 어렵구료. 스물다섯 살이면 못해도 일 정(町)은 수확해야 사나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수?”

“…….”

그래, 나 늙었다. 이 곰보다 곰 같은 곰탱이 새끼야.

“네놈이나 많이 개간해라. 네가 땅을 경작하는 동안에 나는 사람을 경작할 테니.”

“지금 속으로 '나 멋진 말했다'라고 생각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솔직히 하나도 안 멋있으니까 그만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소외다.”

“너 진짜 너무하는구나!”

안 그래도 라피스랑 라우라가 만날 구박하는데 이젠 파르시까지 나를 씹어댄다. 나 이래봬도 마왕인데……영주인데…….

뭐, 서열 제71위에다가 영지라곤 마을 일곱 개에 부락 여덟 개밖에 안되지만.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흥. 누가 뭐래도 나는 이제 숙련된 농사꾼이야. 밀을 키우는 게 어렵지 거 낫질하는 게 어렵겠냐? 이따위 수확이야 하루 만에 해보이마.”

“소인이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하겠구랴?”

“물론이지.”

“오호라.”

어째서인지 파르시가 재밌다는 듯 짖궂게 미소를 지었다.

“모쪼록 기대하겠수다, 숙련된 농부 나으리.”

“암. 뒤에서 지켜나봐라!”

나는 오른손에 낫을 꽉 쥐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밀밭을 향하여 용감무쌍하게 나아갔다.

파르시의 미소가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고작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잠시 뒤――.

“드, 등이! 나의 등이!”

나는 등허리를 부여잡고 밀밭을 굴렀다.

장난이 아니었다. 허리를 숙여 밀을 베고, 대충 모였다 싶으면 꽁꽁 묶어서 한곳으로 옮기고. 이런 작업을 세 시간 반복하니까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런 내 모습을 곁에서 몬스터들이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았다. 골렘은 밭을 가는 데엔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수확과 같이 섬세한 작업에서는 영 손을 쓰지 못했다. 그나마 블링이가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도와준다고 할까……블링이가 나보다 작업효율이 더 좋았다. 고블린은 인간보다 키가 작다보니 보다 편하게 낫을 휘두를 수 있었다. 내가 밀단을 다섯 개 쌓는 동안에 블링이는 무려 열 개나 쌓았다. 비교할 수가 없었다.

“안 돼, 주인으로서의 위엄이……!”

내가 억지로 일어서려 했다. 그 순간 격렬한 통증이 덮쳐왔다.

“크허헉.”

나는 그대로 밭바닥에 꼬꾸라졌다. 어째서냐. 라우라와 섹스할 때는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멀쩡하게 버텨주던 허리가 왜 낫질 세 시간만에 완전히 퍼졌는가. 사용하는 근육부위가 다르다 할지라도 너무했다.

─ 꺄르르르!

주인이 죽어나가는데 요정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내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다. 365일 범죄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우리 요정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웃음소리가 엄청나게 얄미웠다. 너희는 골렘과 다르게 경작할 때도 도움이 안 되었으면서!

요정들은 새로운 놀이터를 발견했는지 밀밭을 아예 숨바꼭질 특구로 지정했다. 황금빛 밀밭으로 쏙 들어가서 나 잡아보라며 도망쳤다. 그렇게 밀과 밀 사이로 고개들을 빼곰빼곰 내밀면서 술레를 놀려댔다.

재밌어보인다……나도 요정들이랑 숨바꼭질하면서 놀고 싶다……. 요정을 껴안고 밀밭에 드러눕고 싶다…….

이렇게 고생했는데도 아직 전체 면적의 1/4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아, 앞으로 적어도 아홉 시간.”

절망적인 숫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늘은 이미 틀렸다. 허리가 이래서야 일하고 싶어도 더는 못한다. 아마 내일도 근육통으로 죽어나가겠지. 하루 만에 밀베기를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거늘, 하루는커녕 나흘이 걸릴지도 모른다.

‘거 보쇼. 소인이 뭐랬수? 숙련된 농부? 껄껄껄.’

머릿속에서 파르시가 비웃는 모습이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나쁜 새끼. 머리 좀 좋다고 귀여워해줬더니 이젠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든다. 언제고 그놈 코를 밟아줘야 하는데……크윽. 더 기고만장해지게 생겼다.

“주군? 땅바닥에서 뭘 하는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돌리자 그곳엔 라우라가 서 있었다. 꼭 어느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아가씨처럼 노란색 평민복을 차려입었다.

라우라에겐 세 종류의 옷이 있었다. 하나는 드레스. 라우라가 나한테 납치될 때 입고 있던 옷인데 귀족적인 매력이 흘렀다. 이것 외에도 내가 선물로 드레스 몇 벌을 사주었다. 다른 하나는 검은색 군복(軍服)으로 월맹군에 종군할 때 입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평민복이다. 마을에 지어둔 별장에서 나와 라우라가 머물기 시작하자, 마을의 아낙네들이 귀한 옷감으로 지어서 갖다 바쳤다. '우리 동네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문양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걸 넣었습니다.' 여인들이 그리 말했다.

산골마을에서 옷감이 고급스러워봤자 얼마나 고급스럽겠냐마는 확실히 정성이 남달랐다. 주황색 바탕에 흰색이 들어간 처녀 옷인데 금발의 라우라와 잘 어울렸다. 라우라는 무척 기뻐하면서 이 진상물을 받았다.

‘이토록 멋진 선물을 받은 여자는 세상에서 소녀밖에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라우라는 평민복을 제일 자주 입었다. 지금 입은 옷도 그것이었다. 음, 솔직히 내가 드레스를 선물했을 때보다 기뻐했지……여자는 어렵고 그중에서도 라우라는 되게 어려웠다.

여자의 마음은 꼭 독일어와 같지. 전혀 알 수 없거든.

“땅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땅의 기운……? 거기에 노움이라도 있는가?”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을 선물해주는 것도 전부 땅이지요. 저는 항상 땅에 감사하고 삽니다. 그걸 이렇게 몸짓으로 표현하는 거죠.”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이 데메테르 여신을 숭배할 줄은 미처 몰랐군. 신앙심도 중요하나 일단 점심을 먹는 게 어떠한가?”

“오오. 기다렸습니다.”

라우라는 품안에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마다 이렇게 새참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에구구, 에구구, 하고 신음을 뱉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였다. 원래 세계에서 흔히 먹던, 새하얀 삼각빵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밀빵에 베이컨과 야채를 끼워 만든 샌드위치였다. 라우라는 요리 솜씨가 결코 좋지는 않았으므로 이렇게 원재료를 사용한 음식을 주로 만들었다.

한창 일하고나서 먹는 새참은 꿀맛이었다.

“맛있습니다! 훌륭해요, 라우라.”

“……주군이 기뻐하면 나도 좋다.”

라우라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럴 때 라우라의 미소는 정말 예뻤다.

밀빵에 목이 약간 메어오자 라우라가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물통을 건넸다. 나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막 우물에서 길러온 지하수였을까.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땡볕 아래 달구어진 내 몸을 식혔다. 캬아!

식사시간이 끝나고 내가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재충전되었다.

“에구, 에구구.”

아무리 못해도 이틀 안에는 수확을 끝내야지. 안 그러면 파르시가 뭐라 비아냥거릴지 모른다.

라우라가 말했다.

“혹시 등이 아픈가, 주군.”

“밀을 베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끄응…….”

“흐음. 그 낫으로 밀베기를 하고 있었는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우라가 흐음, 하고 의외라는 듯 턱에 손을 괴었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자처할 줄이야. 소녀는 지금까지 주군이 어쩔 도리가 없는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주군은 진심으로 농부들의 마음가짐을 배우고자 하는군.”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은 고맙긴 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그도 그럴 것이, 요정을 쓰면 간단하게 밀을 벨 수 있지 않은가? 헌데 고생을 자처하니 소녀, 다시금 주군의 자세에 감탄한다.”

요정?

“요정을 쓰긴 어떻게 씁니까? 걔네들 팔힘이 약해서 낫도 못 드는데.”

“……주군, 마법을 잊었는가. 바람 칼날로 한꺼번에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

내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요정들은 밀밭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제 사격.’

요정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녀석들이 날개를 파닥이며 밭 구석에 집결했다. 그리고 보조를 맞추어 바람의 칼날을 쏘았다. 투명한 칼날이 빠르게 날아가면서 말끔하게 밀들을 베어넘겼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밭 전체의 1/3이 처리되었다.

“시바아아알!”

내가 머리를 잡고 절규했다. 왜 진즉에 이런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거냐!?

─ 꺄르르륵.

절찬리에 좌절하는데 요정들이 날아와서 웃어댔다. 내 꼬락서니가 퍽 재밌게 비춘 것 같았다. 젠장, 머리카락 잡아당기지 마. 허리에 올라타지도 마. 괜히 더 처절해지잖아!

라우라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눈치 채지 못했는가? 주군도 참……어쩔 때는 똑똑하면서 이럴 때는 영락없이 멍청하군. 하긴, 왠지 주군이 열심히 일한다 싶었다.”

“내 허리가, 세 시간 피땀 흘린 노력이!”

라우라가 코웃음을 쳤다.

“본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주군이 입에 즐겨 담던 명언으로 기억한다만?”

무척 재수없었다.

이래서 천재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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