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4화 (134/510)
  • 00134 풍요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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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에 대한 청사진이 짜이고 난 후,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

    던전을 지으려고 해도 시트리가 돈을 지원해줘야 한다. 월맹군 전쟁이 끝나야지만 시트리는 자금을 움직일 수 있다. 고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완전히 한가한 셈이었다.

    시트리와는 수정구를 통해서 자주 통신을 나누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마왕군에 전황이 썩 유리했다. 단지 월맹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고 할까. 병력에 비해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 기껏 모였는데 다시 군단들이 따로 놀고 있다니까.

    마법수정구에서 투영된 시트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얘기에 따르면 몬스터 십 만 마리가 소비하는 보급량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여태껏 월맹군 제6군단이 모아둔 식량을 순식간에 동내버렸다.

    ─ 약삭빠른 인간 놈들, 한판 싸우자니까 계속 피하고……으으!

    몬스터 군단이 식량을 얻으려면 아무래도 큰 전투가 필요했다. 전투에서 생겨나는 인간 시체는 곧바로 몬스터의 먹이로 사용되니까. 당연하게도 인간측도 그 사실을 알았다. 인간군은 최대한 마왕군과 대대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지연전을 강요했다.

    월맹군 입장에서 매우 기분 나쁜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인간군은 천천히 전선을 뒤로 물리면서 인근의 농토 일대를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십 만 마리의 몬스터가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으니 얼른 도망치라면서 농민들을 쫓아낸 것이었다. 그 와중에 농민들에게 푼돈을 넘겨주고 식량을 약탈한 것은 물론이었다.

    푼돈이나마 받은 백성은 사정이 낫겠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일가 재산을 빼앗긴 자가 수두룩했다. 심지어 인간군은 마을을 아예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내가 전쟁의 양상을 듣고 불쑥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청야전술이군요.”

    ─ 응……? 맑은 들판 전술? 그게 뭐야?

    아하. 이 세계에는 청야전술이라는 낱말이 없는가. 보통 내가 쓰는 말은 자동적으로 의역되어 상대방에게 전해지는데, 지금처럼 문자 그대로 엉뚱하게 번역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시트리에게 청야전술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시트리가 설명을 다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 에에? 그렇게 되면 자기네 사람들은 나중에 어쩌고?

    “기본적으로 나중을 생각하지 않는 전략이지요.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인간의 군주는 우리 마왕과 다릅니다. 그들은 자기 종족의 감정을 느낄 수 없어요. 그만큼 자기 종족을 배려하는 면모가 뒤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나는 상당히 괜찮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몬스터가 먹어해치울 것을 없앨뿐더러, 자기네 비축식량을 늘려둘 수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 민중이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재산을 강탈하느냐는 것이다. 마왕군이 침략했다, 몬스터 대군이 다가오고 있다……이보다 강력한 명분은 달리 없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군.’

    당장 인간군의 노림수가 두세 개 떠올랐다.

    만약 내가 인간군의 수뇌부라면……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단탈리안이라는 작자가 설전에서 거하게 독을 뿌렸다. 장병과 지휘관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있겠지. 이럴 때 군대 내의 불화를 봉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공범' 의식을 불어넣으면 된다.

    장병들이 민간 마을을 마음껏 약탈하도록 내버려둔다. 가난한 병졸들이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약탈에 참여할 거다. 주린 배를 채우면 당장 기분이야 좋겠지. 하지만 약탈을 하고 난 뒤에는? 과연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귀족들만 탓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한다. 그 점에서 병사들은 귀족과 똑같아진다. 귀족들을 신뢰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불평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려워진다. 아마도 항명 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군대의 사기가 나빠질 일은 일단 없다.

    더 나아가서.

    ‘만약 나라면 약탈당한 마을 주민들에게 흑색 허브를 나누어주겠어.’

    지난 해, 인간의 국가들은 총력을 다하여 흑색 허브를 재배했다. 비록 전 국토를 구원하기에는 턱없이 수확량이 부족하겠지만 군인을 치료할 정도의 수효는 모였다. 거기에 약간의 여유분이 남아 있겠지. 그걸 지금 쓴다.

    민간 마을이 병사들에게 약탈당하면 당연히 농민들은 군 책임자를 탓하게 된다. 그때 군주들이 선심 쓰듯이 흑색 허브를 분배한다. 어느 정도 보상이 이루어질 뿐만이 아니라, 군주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귀족인 지휘관들을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자비로운 군주만은 믿을 수 있다……대충 그 정도 분위기가 형성된다. 병사들은 군주가 직접 내리는 군명이 아닌 이상에야 좀처럼 열심히 움직이지 않겠지. 군권이 자연스럽게 군주 한 사람에게 모인다.

    군대 전체를 고려할 때, 지휘관과 일반병 사이에 신뢰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해악이다. 하지만 만약 이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 미래를 볼 줄 아는 군주라면……이 위기가 동시에 기회임을 간파할 것이다.

    귀족들도 바보가 아니다. 군주가 이런 방법을 쓰기 시작하면 곧바로 알아차린다. 즉, 이런 방법을 감행할 수 있는 군주는 귀족과 정면승부할 자신과 각오가 갖추어진 자뿐.

    어느 나라의 군주가 이와 같은 수단을 써먹을 것인가? 어느 나라가 도박에 뛰어들 만큼 강한가. 그 점에 주의해서 앞으로 전쟁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군. 나는 개인적으로 브르타뉴 왕국의 앙리에타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엘리자베트를 높게 평가한다마는, 이번 전쟁에서 두 사람의 격이 엿보일지 모른다. <던전 어택>에서 대륙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 두 군주이다. 여기서는 과연 어느 쪽이 앞설련지…….

    자아, 그럼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나는 시트리에게 정보를 흘리기로 했다.

    “시트리 님. 어쩌면 인간군은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 아니 중부 일대를 전부 포기해버릴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 어? 무슨 소리야?

    “만약 이쪽의 식량을 고갈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마을에 불을 지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몬스터에게 마을은 필요없습니다. 건물 안보다 바깥에서 지내는 걸 좋아하는 족속이니까요. 그런데도 불을 질렀다……이건 영지로서의 기능 자체를 말살하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백성을 사랑한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혹한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녀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여리다. 권력을 위해 친족을 살해하는 게 당연한 시대이다. 그런데도 남동생 한 명을 죽였다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아도,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의 인성을 알 수 있다.

    그런 황녀가 무의미하게 자국의 영지를 파괴할 리 없다. 파괴되도록 허락할 리 없다. 즉, 황녀는 이미 합스부르크 북부-중부 지역을 포기한 것이다. 그녀는 월맹군에게 합스부르크의 절반을 넘겨주고, 대신 남부에서 제국을 새롭게 혁신하자고 마음먹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금쯤 합스부르크 남부에선 대대적인 방어선이 조직되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최종적인 저항을 펼칠 계획이겠지요. 빠르면 올해 가을, 늦으면 겨울일까요……월맹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받을 것입니다.”

    국경선을 뒤로 물리면 물릴수록 타국에서 지원군이 오기 쉬워진다. 현재 인간군이 남부로 물러가는 동시에, 타국의 지원군이 추가로 합류할 것이다. 얼마가 모일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시대에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 으응? 하지만 단탈리안 네 말이 맞다면……인간들은 반격한다기보다 공성전에 들어가지 않겠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는 철옹성인걸. 거기 틀어박혀서 몇 년이고 방어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합스부르크를 포기해야 할 텐데.

    “아. 그건 안 됩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식량이 부족하거든요.”

    ─ 에, 식량이?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 하지만 곧 가을인데…….

    “가을이라고 해봐야 수확할 인간이 남아 있어야죠. 흑사병으로 인구가 사정없이 깎이는 와중에 건장한 성인 남성은 군대에 차출되었습니다. 농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제가 장담컨대 인간군은 심각한 식량난에 마주하게 될 겁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남부 전선에서는 반격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아마 회전을 노리지 않을까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만……시트리 님. 당신은 최대한 빨리 전쟁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 우으?

    시트리는 이제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겠는지 거의 울상이었다. 귀여워라. 나는 왠지 마음이 포근해져서 상냥하게 설명해주었다.

    “생각해보세요. 인간군이 자기가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상관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마왕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진심으로 월맹군 원정의 성공을 바라는 마왕은 꽤나 적다. 기껏해야 평원파 마왕, 그리고 최고위 마왕들과 맞서싸울 자신이 있는 전쟁광뿐이다. 다들 적당히 싸워서 적당히 이기기를 바란다.

    이번 제8차 월맹군은 이미 적당히 이겼다.

    “누가 먼저 독박을 뒤집어쓸 거냐, 하고 뒷짐지고 있다가 된통 당할 겁니다. 아니죠. 다들 어느 정도 당하기를 원합니다. 피해가 생겨야지 그걸 변명으로 삼아 월맹군에서 슬쩍 빠질 테니까요.”

    그리고 그동안 자기네가 세운 공훈을 강조하면서 땅따먹기를 시전하겠지.

    “그런 곳에 있어봤자 피해만 커집니다.”

    ─ 으……미안.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솔직한 게 당신의 강점입니다, 시트리.”

    내가 방긋 웃었다.

    “대충 아무 인간군이랑 싸우십시오. 거기서 또 대충 피해를 입으세요. 웬만하면 화려하게 전투를 하는 편이 좋습니다.……그렇지요, 포위 섬멸전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그런 전투를 해냈다면 먼저 월맹군에서 이탈할 수가 있습니다.”

    ─ 좋아. 포위섬멸전이라 이거지?

    “적당히 피해를 입으셔야 합니다. 적당히.”

    ─ 알았어!

    시트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반드시 나의 계획을 실현시키겠다는 듯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의욕적인 것 같아서 보기에 흐뭇했다. 시트리의 세력이 온전해야 나도 든든하다. 어차피 우군이지 않은가.

    기억해둘 만한 사건은 이것뿐이다.

    나는 월맹군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할 일이 없어서 또 다시 라우라와 질펀한 밤낮을 즐기게 생겼는데, 여기서 라우라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허구한 날 동굴에 틀여박혀 있으니까 머릿속에 야한 생각밖에 안 든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농사라도 지어라! 땀을 흘리면 차마 성교할 기력도 없어지겠지.”

    “저는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데…….”

    “주군은 소녀가 목을 매달아도 좋은가?”

    라우라가 극히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정말로 목을 매달 기세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바깥에 나갔다. 파르시의 마을에 별장을 지어 여름 내내 그곳에서 지냈다.

    나는 농밭을 따로 얻어 경작했다. 하는 김에 몬스터들도 데려가서 곡괭이를 휘두르게 했는데 이게 효과가 죽여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을 농사꾼들은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농부의 활약에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거 장정 여섯 명이 할 일을 괴물 한 마리가 해내는구만!”

    “저, 전하. 혹시 여유분이 있으면 저희 집에 한 마리 빌려주심이…….”

    “예끼! 이 불경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대단한 건 몬스터뿐이었다.

    파르시가 나에게 농삿일을 가르쳐주었는데, 그는 내 곡괭이질을 볼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나으리는 몸 쓰는 일은 영 잼병이구만?”

    “…….”

    파르시의 표현에 따르자면 나는 동네 열두 살 꼬마보다 효율이 안 좋은 듯하다. 우라질.

    그러나 효율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주격인 내가 몸소 밭일에 나갔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의외로 큰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어딘지 어렵게 대해오던 마을 사람들이 점차 진심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마왕 전하. 지금 나가십니까요?”

    “아아.”

    “아침은 잡수셨습니까요? 이따 점심에 소인들과 함께 드시는 것은 어떻습니까요. 제 안사람이 이래봬도 빵에는 도사지 말입니다.”

    새벽에 밭일을 나가면서 농부들과 마주치면 공손하지만 애정이 묻어나는 인사를 받았다. 뭐라고 할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착실하게 자라나는 밀알을 바라보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돌아다닌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빨빨 기어다녔는지, 원.……이것이 농부가 바라보는 세계인 걸까.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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