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2화 (132/510)
  • 00132 로마의 아침  =========================================================================

    “자, 잠깐만. 얘기를 이해할 수가 없는데?”

    “이해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모두 진심입니다.”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강력하면서도 이쪽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만큼 아군으로 삼기에 적절한 이가 또 있겠는가. 파이몬처럼 이상한 녀석이 이만한 인재를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시트리 님의 인품에 반했습니다.”

    “하……하아? 인품?”

    “예. 자기가 마음을 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치는 그 열정.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신의. 두 가지만으로 벌써 시트리 님께서는 모든 마왕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것이 분명하겠지요.”

    칭찬의 세례를 받은 탓일까. 시트리가 손부채로 열심히 자기 얼굴을 부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뺨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빨개졌다. 아하, 아무래도 시트리는 칭찬에 엄청나게 약한 성격인 것 같았다. 순수해서 칭찬에 더 약한가……그럴 수가 있지.

    나는 이참에 아예 시트리의 호감도를 쭉쭉 올리고자 마음먹었다.

    “물론 인품만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시트리 님은 매력적이지요.”

    “으……!?”

    “탐스러운 머릿결에 바르바토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감적인 몸. 하하. 솔직히 저도 한 사람의 남자로서 동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아래에 거포가 달렸지만 말이다.

    “시트리 님처럼 아름다운 분과 함께한다면 제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갈 겁니다.”

    그쯤해서 띠링, 하고 효과음이 울렸다.

    「마왕 시트리의 호감도가 6 오릅니다.」

    시트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언제부터……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든 거야?”

    “물론 처음 본 그 순간부터입니다.”

    파이몬을 용서해달라며 알몸으로 내 막사에 들이닥쳤을 때. 나중에 알고보니 이 녀석, 옷을 다 벗은 채로 월맹군의 진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내쪽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체면이고 뭐고 안 가리고 달려든 것이었다.

    나에게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종류의 사람을 보면 마음이 물렁해진다. 얼마든지 더 벗겨먹을 수 있는데도 자제하게 된다. 되도록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잭 올란드의 경우도 그러했고.

    아마 나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겠지. 벌레가 빛을 동경하듯이 나 또한 어딘지 모르게 순수한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순수한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더러운 방법을 동원하는 부류. 파이몬이 대표적인 경우이지. 순수하게 인간을 사랑한다 말하는 주제에 정치적인 여자이다. 무얼 숨기겠는가. 나 역시 이 부류의 대표주자이다. 파이몬을 싫어하는 것에는 동족혐오라는 면도 조금 있다.

    “으으으……저기, 이런 건 처음이라서…….”

    시트리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나, 평판이 안 좋다구?……몬스터랑 성교도 하고, 더럽다는 말 무진장 많이 듣는데……매력적이라는 말, 별로 들은 적 없는데……파, 파이몬 언니라면 모를까 내가 매력적이라니. 말도 안 돼.”

    “풉. 파이몬이요?”

    그 여자가 매력적이라고? 아서라.

    <던전 어택> 플레이어 시절부터 파이몬은 내가 싫어하는 여자 캐릭터 투톱을 달린다. 저번 설전의 막판에서 나를 도와준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해야겠으나, 아직도 파이몬은 내 마음속에 비호감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 비하면 시트리는 천사이다.

    아래에 거포가 달렸지만.

    “당신이 파이몬을 경애한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걸 용서해주시길. 저에게는 파이몬보다 당신이 열배백배는 더 멋집니다.”

    “흐아아?”

    “누가 저에게 파이몬과 시트리, 둘 중에 누구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열 번의 질문에 열 번의 대답으로, 백 번의 질문에 백 번의 대답으로 말할 것이니 오로지 시트리 님, 당신을 고를 것입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요!”

    인류를 위한답시고 동족인 월맹군의 뒤통수를 후려깐 여자이다. 동지로 삼을까보냐.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절대다수의 마왕이 시트리를 선택하겠지.

    시트리가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부끄러움에 물들다 못해서 퐁당 빠져 있었다.

    “하지만……나는 이미 파이몬 언니한테 몸과 마음을 바쳤는걸. 게, 게다가 너한테도 바르바토스가 있잖아!”

    음. 과연.

    파이몬은 앞으로 어찌될지 몰라도 명색이 산악파의 수장이다. 반면에 나는 평원파의 실세 중 한 명. 그런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산악파인 시트리에게 꽤나 정치적인 부담으로 다가올 거다. 일단 파이몬과 사이가 나빠질지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 나빠진다.

    시트리는 마음이 괴로워지겠지. 자기가 배신을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닐지 고심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딱히 시트리를 평원파로 영입하려는 게 아니다. 애시당초 내가 평원파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진력할 이유가 없다. 나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면 평원파든 산악파든 파벌을 가리지 않고 포섭한다. 이 부분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르바토스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바르바토스의 측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마왕입니다. 제가 마음에 든 사람과는 거리낌 없이 사귀고 싶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파벌이 예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일종의 간판, 명분으로 전락하리라.

    합스부르크 제국은 끝났다. 적어도 제국의 중부-북부 일대는 월맹군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많은 마왕들이 자작령과 백작령을 하나씩 꿰차고 인간계에 자리 잡겠지. 영지 단위로 세력이 잘게 쪼개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마왕들은 인간 타도를 울부짖으며 미우나 고우나 겉으로나마 협력했다. 그것은 마왕의 세력과 인류의 세력이 딱 명확하게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부-북부에 똬리를 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일단 산악파는 영지민인 인간들에 친화적으로 접근한다. 산악파 마왕들은 '이제 전쟁은 끝! 인간계에 영토 마련했으니까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에 싱글벙글하겠지.

    더 이상 마왕의 영토가 늘어나버리면 고위급 마왕들을 견제할 세력――즉,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먹는 것쯤이 딱 적절하다. 고위급 마왕들을 적절하게 견재해서 좋고, 풍요로운 인간계에 자리를 잡게 되어서 좋고, 산악파에겐 최상의 시나리오가 실현된다.

    반면에 평원파는? 영지민인 인간을 탄압한다.

    평원파는 최종적으로 대륙 정벌을 노린다.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 그렇게 여기고 있다. 평원파의 영지에서 마왕은 귀족이 되고, 마인은 평민이 되며, 인간은 노예가 되리라. 당연히 온갖 말썽이 일어날 거다.

    인류도 서서히 마왕이 단순히 '마왕'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와는 협력하고 누군가와는 싸운다. 어제 적이었던 자가 오늘은 아군이 된다. 지극히 혼란스러운 정세가 도래한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이제 각 마왕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각자의 길을 걷는다. 예를 들어 산악파인 마왕이 한 명 있다고 해보자. 자기 영지가 평원파 바로 옆에 있다면 어쩌겠는가? 끝까지 산악파에 의리를 지킬까? 그럴 리 없다.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한번 타협하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또 다시 그 다음에도……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생존이 되어버린다. 산악파의 일부 마왕과 평원파의 일부 마왕이 연합해서 새로운 파벌을 만들지도 모른다. 지역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야말로 난세.

    유럽의 30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시대가 다가온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부디 파이몬을 잊어주십시오. 저 역시 바르바토스를 잊었습니다. 오로지 한 사람의 마왕으로서, 한 사람의 마왕인 저를 바라봐주십시오. 저 개인이 믿을 만한 자인지 아닌지 흐림 없는 눈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아, 으……으으?”

    “시트리 님.”

    그런 훗날을 대비하여 서열 제12위의 마왕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마왕 시트리의 호감도가 11 오릅니다.」

    알림창이 또 떠올랐다. 순풍만범(順風滿帆)이었다.

    내가 다시금 시트리의 손을 꾸욱 쥐었다. 그러자 시트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사과처럼 빨간 낯빛에 눈가에는 눈물이 약간 맺혀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시트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곁눈질로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게 빤히 보였다.

    “제가 바르바토스를 버리겠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시트리 님, 당신도 파이몬을 등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바르바토스는 바르바토스. 파이몬은 파이몬. 그리고…….”

    “그, 그리고……?”

    “시트리 님은 시트리 님이고, 저는 저이겠지요.”

    그녀가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기색도 잊었는지 뚫어지게 나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마지막 난관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진심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는 말없이, 다만 그녀의 눈동자에 나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귓가에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마왕 시트리의 호감도가 8 오릅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시트리가 왠지 몽롱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잘 부탁해…….”

    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예. 부디 오랜 만남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후에 시간이 다 되어 시트리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마왕성에 도착한 지 벌써 한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직 전황이 급박했다.

    시트리는 자기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슬퍼하는 것 같았다. 동료가 되고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저랬다. 과연 나의 눈썰미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배신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마왕이었다.

    “나, 얼른 전쟁을 끝내버릴 테니까!”

    텔레포트 주문서를 손에 꽉 쥐고 시트리가 말했다.

    “파이몬 언니가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해둘게. 걱정하지 마. 전쟁이 끝나면 돈도 보내주고, 자주 놀러오고……아니, 아예 여기로 이사와버리는 것도…….”

    “하하. 지금은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모쪼록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으, 응. 알겠어.”

    시트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마왕 전하였다.

    아래에 거포가 달렸지만.

    “주인님도 몸 건강히 있어야 돼?”

    “단탈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 시트리.”

    시트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기쁜 듯 만면에 미소를 짓더니,

    “응! 단탈리안!”

    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법진이 발동했다. 노란 빛이 시트리의 몸을 휘감았다. 빛은 마왕방을 가득 메웠다. 잠시 뒤에 빛이 사그라들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지금쯤 시트리는 삭막한 막사에 서 있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건투를 빌었다.

    “후우.”

    만족스럽게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로써 한 명……나의 아군이 되어줄 사람을 마련했다. 동맹 관계라고 할까. 내가 위험에 처하면 시트리가 도와주고, 시트리가 위험해지면 내가 구원에 나선다. 상호이득이었다.

    “…….”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마왕방 구석에 라피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내 명령에 따라 시트리를 안내해온 이후, 한 마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립하고 있었다. 마왕들 사이의 밀담이다. 일개 서큐버스인 그녀로서는 당연히 입을 닫을 수밖에.

    “아아, 라피스. 수고했어. 덕분에 일이 잘 풀렸네.”

    “……말솜씨가 대단히 능숙하시더군요. 감탄했습니다.”

    음? 웬일로 라피스가 칭찬을 다 하냐.

    그녀가 보기에도 내가 시트리를 기가 막히게 설득한 모양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라피스에게 인정을 받으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내가 씨익 웃었다.

    “뭐, 이런 일을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고.”

    “……그렇습니까. 한두 번이 아닙니까.”

    “내가 이래봬도 한가락 하는 양반이야.”

    혀가 발랄하기로 치면 마왕 중에서 상위권에 들겠지. 자신이 있었다.

    “미처 몰랐습니다. 다시 봤습니다, 단탈리안 님.”

    라피스는 칭찬하는 말과 다르게 표정이 싸늘했다.

    그날 라피스가 유난히도 쌀쌀맞게 굴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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