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1화 (131/510)
  • 00131 로마의 아침  =========================================================================

    라피스가 표정이 싸늘해졌다.

    “단탈리안 님.”

    “아,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알아. 압니다요. 함부로 대출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손사레를 쳤다.

    일 년 전에 라피스한테 대출을 의뢰한 적 있었다. 블랙 허브를 사들이기 위해 종잣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때도 라피스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백 년, 이백 년, 차근차근 돈을 모으라고 나한테 조언했지.

    상인이면서 이상하게도 대출이란 걸 싫어했다. 큰돈을 만지려면 어쩔 수 없이 빚을 져야 하는데 말이다. 아니, 상인이기에 더더욱 대출에 조심스러운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예. 물론 단탈리안 님은 신용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바르바토스 전하의 측근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느 상회에서든 돈을 빌려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대책없이 빚을 져서야 결국은 패망할 따름입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세상에 다 방법이란 게 있지. 후후. 뭐, 천천히 두고봐. 아무튼 예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하아.”

    라피스가 미심쩍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돈과 관련하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일단 믿어보는 것이겠지. 라피스는 잔소리꾼이지만 나를 믿어주는 잔소리꾼이었다.

    라우라가 말했다.

    “주군. 마왕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해했다. 소녀가 생각하기로 주군은 단순히 모험자를 격파하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인해전술이라 말했지만 몬스터 부락 전체를 끌고들어와서 주거지를 형성하겠다니. 그건 이미 마왕성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도시라 부르는 편이 낫다.”

    과연 라우라. 정치에 재능이 없어도 직감이 살아 있다.

    “즉……주군은 그저 마왕성이라는 요새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도시를 만들어서 그곳에 군림하고 싶은 거다. 소녀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훌륭합니다. 맞아요. 저는 단순히 몬스터 몇 명을 수하로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생태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러했다.

    예컨대 인간의 마을에 몬스터가 쳐들어왔다고 해보자. 그 마을에는 촌장이 없다. 마을의 주인격인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몬스터에 맞서 싸우지 않을까?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지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항쟁할 것이다. 딱히 그들이 숭고한 도덕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곳이 파괴되면 자신의 삶까지 파멸해버리니까. 마을을 지키는 것이 곧 자기 삶을 지키는 것이므로 싸운다.

    마을이 멸망할 판국인데도 도망을 쳤다고? 그럼 마을이 없어도 살아갈 자신이 있다는 거다. 마을의 유무와 자신의 삶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내가 월맹군 제6군단의 일원으로서 변경백령을 침략했을 때, 영지민들은 일단 생존권을 보장받자 간단하게 항복해버렸다. 변경백의 자리에 폰 로젠베르크가 있든지 바르바토스가 있는지 자기네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끝까지 저항했다. 월맹군을 패퇴시키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자 했다. 어째서인가? 폰 로젠베르크는 자신의 삶을 변경백이라는 지위와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제대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느냐는 사회구성원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행동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폰 로젠베르크는 훌륭한 군인이었을지 몰라도 훌륭한 영주는 아니었다. 아마 지금 이 시대, 아니 대부분의 시대에 군주란 그런 자들이겠지.

    나는 몬스터들이 던전을 자발적으로 지키기를 원한다.

    구태여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다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그럼에도 모험자가 침입해 들어오면 몬스터들 스스로 송곳니를 들이밀고 손톱을 내세우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도 편하다.

    앞으로 내가 몇 년을 살겠는가. 인간과 다르게 마왕은 수명이 없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천운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살아간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모험대가 침입하겠지. 그때마다 이번엔 어떻게 모험대를 격파할까 고심하라고? 그런 중노동은 이쪽에서 사양한다.

    그냥 몬스터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그중에서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지하로 이주시킨다. 마나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 살 수 있게 배려해준다. 만에 하나 부조리한 사건이 생기면 공명정대한 판관으로서 재판해준다. 상벌과 재판, 두 가지만 맡아도 이미 과업이다. 여기에 통치까지 하라니 제정신이 아니다.

    라우라가 옳게 지적했다. 나는 단지 마왕의 성을 건설하려는 게 아니다. 몬스터를 위한 도시, 나의 안락을 위한 도시를 세우고 싶다.

    실로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  *

    다음날, 마왕성에 손님이 찾아왔다.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였다. 그녀는 내 밀명을 받고 움직인 라피스에 의해 초대되었다. 순간이동 스크롤이 사용되었기에 오가는 시간은 거의 걸리지 않았다.

    “헤에. 여기가 주인님의 성이구나.”

    시트리가 나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처음엔 눈이 반짝거렸는데 금방 식어버렸다. 내 마왕방은 검소한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여 초라할 지경이니까. 화려한 마왕성을 갖고 있을 시트리의 심미안에는 한참 수준이 뒤떨어졌다.

    내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초라하지요?”

    “응. 주인님은 좀 귀공자처럼 지낼 줄 알았는데 의외인걸.”

    “저만큼 귀공자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마왕도 드물 겁니다만.”

    대신에 거지라는 단어와 제일 잘 어울릴 자신이 있었다.

    시트리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튼, 무슨 일로 불렀어? 미안하지만 아직 전쟁이 한창이거든. 주인님이 불러서 오긴 했어도 한 시간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그녀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나랑 한판 하고 싶은 거라면 아쉽지만 나중에 하는 걸 추천하겠어. 적어도 네 시간은 여유롭게 잡아야지 제대로 된 쾌락을…….”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무슨 종마입니까, 전쟁하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서 떡을 치게!”

    “에? 아니야?”

    시트리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급하게 부른다고 해서 영락없이 그쪽 부탁인 줄 알았는데.”

    “시트리 님의 머릿속에 제 인상이 도대체 어떻게 박힌 것인지 심히 궁금하군요.”

    내 입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 하지만……주인님이 그렇게 성교를 잘 한다면서. 나 소문 들었는걸.”

    “소문? 소무우운? 제가 섹스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났다는 말입니까?”

    “응. 바르바토스가 만날 여자 마왕들한테 자랑하고 다니거든.”

    금시초문이었다.

    “하루만 같이 있으면 백 번을 보내주네, 온갖 체위에 정통해서 잡아먹히는 재미가 있네,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네 뭐네 그러는걸. 애인 자랑하는 꼴이 같잖았지만.”

    바르바토스으으으!

    여자 마왕들 앞에서 아저씨 미소를 지으며 음담패설을 늘여놓는 바르바토스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무척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외설스러운 손짓을 동원해가며 그저께 섹스가 무척 만족스러웠다는 둥 떠벌렸겠지. 우라질 로리 년!

    “아, 그 얘기도 들었어. 최근에는 SM에 눈을 떴다면서.”

    좋았어. 지금 다짐했다. 언젠가 그 로리 년을 기필코 죽여버리겠다.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죽을 때까지 간지럼 피워주겠다. 그 하얀 겨드랑이에 땀방울이 송송 맺힐 때까지 간지럼 피워주겠다.

    시트리의 폭로는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설마 바르바토스가 마조 역할을 할 줄이야. 난 걔가 평생 사드만 할 거라고 확신했었거든. 바르바토스 본인도 놀라하더라! 뭐라더라?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당하니까 자기가 쓰레기보다 못한 년이 되는 것 같아서 쾌감이 쩔어준대.”

    “…….”

    입구멍에 모터가 달린 암퇘지 같으니라고. 감히 둘 사이에 내밀하게 주고받은 플레이 내역을 다른 사람한테 신나게 까발려?

    만일 내가 마왕들한테 거 바르바토스가 울고불며 용서해달라고 빌어재끼는 모습이 참 꼴릿하더라, 하고 낄낄거렸다 해봐라. 보나마나 다음날 바르바토스가 들이닥쳐서 네놈이 젯밥을 먹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하면서 채찍질을 해대겠지. 그런데 정작 그 녀석은 한낱 음담패설의 도마에 날 올려버린 것이었다.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어서 각별하다 말했겠다. 오냐, 옴팡진 것아. 특별히 요망을 받아주마. 다음번에 부디 기대해달라. 그 귀여운 엉덩이가 새빨개져도 용서하지 않을 테다.

    나는 머릿속으로 절찬리에 <쓰레기 특별 코스>를 개발했다. 그 사이에 시트리가 의자에 앉았다.

    문득, 그녀가 입은 갑옷 가장자리에 핏물이 묻은 게 보였다. 마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갑옷을 제대로 닦지 못할 정도로 월맹군 전쟁이 치열하다는 뜻이었다. 내 앞에서 시트리가 지금 느긋하게 행동하고 있지만……어쩌면 상당히 무리를 해서 여기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당연하다. 시트리는 산악파의 돌격대장. 파이몬이 부상을 당한 지금, 시트리는 사실상 산악파의 우두머리이다. 이번 월맹군 전쟁에서 산악파가 선봉에 서게 되었으니 그녀는 누구보다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나는 현재 마왕들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불러들인 셈이다.

    “성교가 아니라면 무슨 일이야? 잘 모르겠는데.”

    “단도직입해서 말씀드리지요. 돈이 필요합니다.”

    “응, 좋아.”

    시트리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그녀가 손을 턱에 괴고 중얼거렸다.

    “나 전재산이 육십만 골드야. 이백 년 전에 정리했을 때 그랬으니까 지금도 대충 비슷할 거야. 으응, 현물까지 합치면 백오십만까지 갈지 모르겠는걸……보석창고랑 거기 창고까지 털어서……빠듯하게 백육십만은 될지도.”

    그녀가 계산을 끝마쳤는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응. 얼마가 필요해? 말만 해줘. 백육십만까지 가능해.”

    “…….”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음속의 강물이 약간 불어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서열 제12위의 자리는 카드놀이로 따는 것이 아니다. 본신의 강력함. 의지. 약간의 운. 그런 것들이 겹치고 겹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야만 한다. 타락하려고 마음먹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타락할 수 있다.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들어준다. 시트리의 생각은 이러하겠지. 하지만 저 '그러니까'가 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하물며 마왕 정도의 권력자 중에서…….

    나는 지난 1년을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작 1년을 살아남는데 말이다. 시트리는 수백 년을 살아왔을 텐데도 어떤 의미로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강력해서 굳이 야비해질 필요가 없었음일까. 아니면, 추악한 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꿋꿋하게 바른 길을 걸었던 걸까. 아니면 순수함과 추악함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현명하고 또한 우둔한 것일까.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 눈앞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여인이 지극히 낮은 확률을 뚫고 유지해온 인격이라는 사실이었다. 명화를 감상하는 데 굳이 그 그림이 어떤 경로로 그려졌는가 따질 필요가 없듯이, 시트리의 태도에 자그맣게 감명받는 데에도 굳이 그녀의 삶까지 알 필요가 없었다.

    “백만 골드를 빌려주십시오.”

    “알았어. 으음. 그런데 곤란하네. 내 마왕성에 재산이 있어서 말이야. 당장 건네줄 수가 없어.”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미안하지만 전쟁이 일단락되고 주면 안 될까?”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천연이야, 천연.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저는 돈을 주라고 부탁드린 게 아닙니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지요.”

    “……응?”

    “백만 골드를 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시트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줘도 되는데?”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시트리 님과 제가 동등한 위치에 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시트리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단순히 이용하고 이용되는 사이가 아니라, 진정한 동료로서 함께하고 싶었다. 험난하디험난한 세상이다. 시트리처럼 순수한 마왕이 나의 동지가 되어준다면 더없이 든든하겠지.

    내가 시트리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에, 에에?”

    “시트리 님. 저는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왜인지,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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