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29화 (129/510)
  • 00129 로마의 아침  =========================================================================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삶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백지수표를 남발하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불쑥 떠올랐다.

    ‘특히, 아들. 그럴 리가 없지만 말이야. 만에 하나라도 아들 주변에 여자가 다가오면.’

    하고 어머니가 말씀했다.

    ‘절대로 <뭐든지>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단다.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질지 몰라.’

    ‘큰일이요? 정확히 무슨 일이요?

    ‘으음. 아들 같은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거지.’

    한참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부들거렸다. 당시에 나는 반항기스러운 풍류를 즐기는 고등학생 청춘. 목소리를 높여서 항변했다.

    ‘너무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 자식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었어.’

    ‘나도 내 자식이 아들 같을 줄 알았으면 낳는 게 아니었는데.’

    ‘…….’

    나는 무참하게 격침되었고, 쓸데없는 반항을 접은 다음 수능공부에 열중했다.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지. 그 다음부터 다시 쓰레기 백수 생활을 듬뿍 즐겼지만 말이다.

    왜 갑작스레 어머니의 충고가 떠오른 것일까? 분명히 어떤 무의식적인 직감이 나로 하여금 발언을 철회하라고 종용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뒤늦게나마 말을 바꾸려고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

    등이 싸해졌다. 상대방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다.

    지금 말을 바꾸면 그쪽 배떼기에 들어 있는 게 내장인지 똥물인지 직접 확인시켜주겠어요――.

    그런 눈초리였다.

    내 입에서 뚝방에 물 새듯이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갔다.

    “어, 어. 뭐든지.”

    “좋습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절도 있는 동작으로 끄덕였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 무표정한 얼굴이 어딘지 만족스러운 기색을 내풍기는 것 같았다.

    “저야 자그마한 보상으로 만족합니다만 단탈리안 님께서 굳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말씀하니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쿤쿠스카 상회의 직원이나 동시에 단탈리안 님을 섬기는 몸. 단탈리안 님의 후의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쩔 수 없지만 그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 응……? 그, 그래.”

    점점 더 불안감이 무거워졌다.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연막을 무슨 스컹크 뺨따구 후려칠 정도로 뿌려대냐. 이바르한테 밀명이라도 받았나. 내가 소심하게 사족을 덧붙였다.

    “미리 말하지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어야 한다?”

    “당연합니다. 단탈리안 님의 역량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소원을 제가 원할 리 없지요.”

    “음. 그렇지.”

    라피스는 내가 동굴을 파서 하루에 2골드 벌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연이었다. 황철석을 황금으로 착각해서 잔뜩 잘난 척하던 것도(지금도 그걸 떠올리면 심장이 당장 생각을 중단하라며 고래고래 소리친다), 마계의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놀아댄 것도, 그녀는 전부 알고 있다.

    비록 마왕과 마인이라는 관계에 묶여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라우라는 다르지. 솔직히 라우라는 나한테 콩깍지가 좀 씌어 있다. 내가 뭘하면 '역시 주군. 대단하다!'라는 식으로 나온다. 눈에 초롱초롱 빛이 난다.

    반면에 라피스는 놀랐다는 듯 두 눈을 치켜세우며 '대단하군요'라고 말하겠지. 당신이 그런 일을 해내다니 의외라는 어투로. 하는 말이 같아도 그 밑에 깔린 감정은 천지차이다…….

    뭐, 나는 라피스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든다. 편하단 말이지. 이쪽을 무조건적으로 두둔해도 곤란할 따름이다. 아무리 친해도 멍청하면 멍청하다고 지적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친구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라피스와 나는 친구이다.

    세상에는 여자와 남자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지만. 절로 비웃음이 나올 소리이다. 인간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남녀 간에 섹스밖에 없겠는가.

    다 진정한 우정을 공유할 수 있다. 라피스와 나의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이겠지. 나는 반쪽짜리 마왕이고, 라피스는 마계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반인반마이다.

    그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동지가 되었다. 색정 따위는 끼어들지 않았다. 실로 플라토닉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

    내가 기분을 바꿨다. 어차피 약속한 거 즐겁게 이루어주자.

    “좋아. 기왕 공언했으니 당장 들어주지. 소원이 뭐야? 응? 네 따돌렸던 새끼들 싸그리 죽여줄까? 이바르한테 얘기해서 1급 사무마로 승진시켜줄까?”

    라피스가 슬쩍 옆에 있는 라우라를 살펴보았다.

    “……아뇨. 아직은 생각나는 게 없군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언제든지 말하라고. 내가 이제 라피스 소원 하나 들어줄 정도는 된다 이거야.”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피스 경? 원한다면 자리를 비켜줄 수 있다만. 보시다시피.”

    라고 라우라가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참고로 라우라는 발가벗고 있었다. 그녀의 아래쪽에서는 조금 전까지 내 육봉이 쑤신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정액이 잔뜩 엉겨붙었다.

    “어차피 소녀는 목욕을 해야 해서 말이다. 지하연못에 가서 몸을 푹 담글 생각이다. 소녀가 씻는 동안 승부를 보아도 좋지 않겠는가?”

    “하아.”

    라피스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뵙지 못한 사이에 라우라 경도 짐승이 다 되었군요. 초열대공의 하렘도 이렇게 문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래 그랬습니까?”

    “음……경이 요 보름 동안 주군과 함께 있었다면 소녀의 처지를 이해할 터이다.”

    라우라가 왠지 모르게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부끄러움이란 적의 욕구를 돋구어주는 향신료에 불과하다. 훈제고기에 양념을 바르는 꼴이지. 차라리 뻔뻔해지는 것이 그나마 차선의 전략안이다. 소녀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체면을 버렸다.”

    “그 정도입니까?……구체적으로 하루에 몇 번을.”

    “으음. 날마다 다르지만 대충 네 번이 평균일까.”

    라피스가 입을 자그맣게 벌렸다.

    “네 번이나 가다니 제법이네요. 하지만 그 정도라면…….”

    “라피스 경? 뭔가 착각하고 있군.”

    라우라가 히죽 웃었다. 눈가에 그늘이 져 있었다.

    “네 번 가는 게 아니라 네 판을 행하는 거다. 가는 걸로 따지면 어림잡아도 최소 열 번이겠지. 한 판당 열 번이다. 즉, 도합 마흔 번. 하루에 최소 마흔 번이라고 봐야 한다.”

    “마흔……번?”

    그때 매우 희귀한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라피스의 무표정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나는 대충 그녀들이 나의 정력에 대해서 논한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마왕방 구석에 놓인 물통으로 가서 바가지를 잡았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소녀도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의 상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철저하게 깨달았지……. 후후. 지금 돌이켜보건대 살아남은 게 용하군. 후후, 후후후…….”

    “하지만, 남성이 보통 그렇게 갔다면 여성은……조루가 아닌 이상 세 배를.”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여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자기 정력이 대화의 도마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창피한 일이구나. 나는 안 들리는 척 모르는 척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아아. 넉넉하게 세 배는 된다.”

    “그렇다면 한 판마다 서른 번, 하루에 백스무 번이라는 말씀입니까? 믿기지 않습니다.”

    “평균을 잡아서 말이다. 가끔은 이백 번도 훌쩍 넘어버리지.”

    “…….”

    “알겠는가, 라피스 경? 그런 나날이 보름이나 지속된 것일세.”

    두 사람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단어와 단어만 드문드문 들리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여자들은 무척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둘……분담……불가능하다.”

    “하지만 각오가……예상치…….”

    “더 이상은 기다릴 수……그 전에 먼저 부서져 버릴 거다!……냉큼…….”

    “……결행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아아. 좋다. 소녀에게도 희망이 찾아왔군.”

    무언가를 합의한 분위기였다.

    “하하. 둘이서 얘기 다했어?”

    나는 여자들의 대화가 드디어 끝났다고 기뻐하며 다가갔다.

    “…….”

    “…….”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괴물을 쳐다보는 것처럼 싸늘한 눈빛이었다.

    아니, 어째서?

    *  *  *

    내 마왕성 주변에는 일곱 개의 인간 촌락이 있다. 고블린 부락은 여덟 개. 다해서 열다섯 개의 마을이 이른바 나의 영지에 속한다.

    영지민 숫자는 대충 인간 사백 명에 고블린 천백 마리. 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수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두 종족을 합쳐도 이천이 안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영지민이 이천 명 이하라는 것은 어디 가서 남작령이라고 자랑할 수도 없는 수치.

    인구가 국력인 시대이다. 본래라면 내 마왕성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이게 앞으로 확 늘어날 거야.”

    라우라, 라피스, 내가 원탁에 모여 회의했다. 우리는 단탈리안 마왕군의 최고 관리이자 유일한 관리였다. 즉 조촐하지만 국정회의가 열린 셈이었다.

    “내가 연설전에서 하도 멋들어지게 말해서 말이지. 단탈리안이라는 마왕의 땅에 가면 경작한 대로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언비어가 십중팔구 나돌 것이거든. 예컨대 탈영병. 인간군 쪽에서 탈영병이 생기면 꽤 높은 확률로 여기로 올걸.”

    “타당합니다.”

    라피스가 동의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합스부르크 북부 지역에서 이곳 튜튼 왕국까지는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열 명에 두세 명 정도는 이쪽에 도착하겠지요. 이백 명쯤은 빠른 시일 내로 이주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 숫자는 문제없다.

    내 영지에는 멸망한 마을의 터가 다섯 군데나 남아 있다. 다섯 마을이 일구던 논밭도 그대로 남았다. 거기서 길러지던 농작물이야 당연히 사라졌지만, 두둑과 고랑 등 논밭의 형태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따로 힘들게 개간할 필요가 없다. 그냥 누가 와서 가꾸기만 하면 된다.

    그런 논밭이 어림잡아서 삼백 명분. 즉, 우리 영지에는 삼백 명을 수용할 여력이 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주민이 계속 늘어나리라는 점이지.”

    내가 말했다.

    “인간계에다 내가 뿌려놓은 독은 질겨. 월맹군 전쟁이 길어질수록 귀족들은 백성한테서 혈세를 뽑아내겠지. 흑사병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중이다. 전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언젠가 반드시 와.”

    아마도 상당히 가까운 시일에.

    “그때가 되면 많은 인간이 마왕의 영토로 도망칠 거야.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유혹에 이끌려서.”

    “주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라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인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은 것 아닌가.”

    “뭐든지 과식하면 체하는 법이니까. 지금부터 과식을 소화할 수 있게 위장을 단련해두어야 하는 거야.”

    하물며 오는 것은 이주민뿐만이 아니다. 마왕으로서 악명이 부쩍 올라간 만큼, 이곳을 노리는 모험자의 수도 대폭 늘어날 터.……F급, E급 모험대가 아니라 D급과 C급, 어쩌면 B급까지 밀려올지 모른다.

    대륙이 월맹군 전쟁이라는 전화에 몽땅 휩쓸려 있는 이때가 기회이다. 머지 않은 미래를 지금부터 대비해야만 한다.

    “그래서 말인데. 던전 특별도시를 세우고자 한다.”

    “던전 특별도시……?”

    라우라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던전이란, 모험자들이 마왕성을 부르는 용어이겠지? 하지만 던전 특별도시라니. 소녀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던전과 모험자에 의존해서 성장하는 도시이지.”

    내가 미소를 지었다.

    “보통 마왕들은 모험자를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모험자만큼 훌륭한 봉도 없거든. 그놈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면 그럴듯한 소도시 하나를 세울 수 있어.”

    모험자는 하나하나가 병사. 아무리 가난해도 무기와 갑주를 갖추고 있다. 철로 된 무기와 가죽으로 된 갑주만 털어도 짭짤한 상품이 된다. 이건 최저한의 수입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험자들을 이용해서 소도시를 세운다고?”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 이해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 단언컨대, 마왕 단탈리안의 영지는 전무후무한 모험의 도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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