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28화 (128/510)
  • 00128 로마의 아침  =========================================================================

    *  *  *

    판결은 파르시와 미리 상의한 그대로 내렸다.

    “옆마을에 반란의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홀했던 것, 영주인 나에게 보고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허나 반역자를 신속하게 처리했다는 점에서 그대들한테 역모의 의도가 없음을 알겠노라. 이에, 촌장 세 명에게 근신을 명하노라. 아울러 세 명의 재산을 환수한다.”

    나는 촌장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마을에서 공물로 바친 것은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관대한 처사라며 소리높여 나의 판결을 칭송했다.

    마을주민 입장에서 볼 때는 촌장들이 자기네를 대신해서 희생한 것이었다. 내가 반납한 공물의 상당부분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눈 가리고 아웅거리는 느낌이지만, 덕분에 촌장의 체면이 살았고 영주인 내 체면도 살았다.

    그외에 나머지 마을들에 고블린 무리를 보냈다.

    사흘 후, 마왕성에 마을의 사신단이 찾아왔다. 그들은 마왕성 입구에서 오체투신하며 나에게 싹싹 빌었다. 제발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몬스터가 침략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맛보았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농사에 집중하면 된다. 자경단원도 필요없다.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란 죽어도 싫겠지.

    “연공은 7:3으로 정한다.”

    아무리 이 시대에 일반적인 세율이라지만 중세(重稅)임에 분명하다. 지금이야 용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을 장로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만, 빠르게 불평불만이 터져나올 거다. 고블린의 침략을 막아주는 것만으로 소득의 7할을 바쳐야만 하는가.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여기서 편법을 썼다.

    치수공사처럼 부역과 같은 잡일에 참여할수록 세금을 없애주기로 한 것이가.

    “영지를 위해서 일하면 세금이 줄어든다. 모쪼록 모두를 위하여 일하도록.”

    실질적인 세금은 사공육민(四公六民). 소득의 4할만 나에게 바치면 된다.

    사공육민이면 영주님 우리 영주님 하는 노랫가사가 만들어질 만큼 관대했다. 이후로도 내 영지는 실질 세금을 사공육민으로 밀고 나갔다. 뭐, 반역에 참가하지 않은 마을에는 세금이 전혀 없다. 적당한 처사겠지.

    더불어 그루갈이한 보리에 대해선 손을 대지 않았다. 보통 농삿일은 한 해에 밀을 심어서 수확하고 또 보리를 심어서 수확한다. 두 번 수확하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해 수확한 밀에 대해서만 세금을 실었다.

    “대충 이쯤하면 굶어죽지는 않겠지?”

    나는 라우라에게 상의하면서 말했다. 라우라는 공작가의 영애. 세금 따위에 빠삭하지 않을까 싶어서 의지하려 했지만.

    “미안하다, 주군. 소녀는 영지를 통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다.”

    그러고보니 라우라는 공작가 안에서도 따돌림 당했다. 후계자 교육에서도 배제되었다. 통치 같은 고급업무에 참여했을 리 만무. 의지할 구석이 전혀 없었다…….

    “명색이 유일무이한 가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능해서야. 실망입니다.”

    “읏……소, 소녀는 군략에서 주군을 도울 따름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얼굴이 빨개져서 대꾸했다.

    하지만 말이지. 당신은 원래 브르타뉴 왕국의 재상까지 오를 인재이다. 한 나라의 재상이 군무에 통달했으면서 정치에는 영 잼병이라니. 그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아, 하긴 <던전 어택>에서 브르타뉴 왕국은 멸망하는구나. 왜 멸망하나 싶었네.

    “지금 당장은 군략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전쟁에 참여할 일은 먼 얘기겠죠. 그 먼 훗날까지 라우라는 쓸모없다는 뜻입니다. 훌륭한 식객이군요.”

    “으으으.”

    라우라가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귀여웠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군요. 지금 라우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입니다.”

    “뭔가? 주군. 당장 말해다오. 소녀가 분골쇄신하겠다.”

    “라우라의 머리가 쓸데없어진 이상, 라우라에겐 몸밖에 남지 않았지요.”

    라우라는 표정이 싸해졌다. 나라를 잃은 선비의 얼굴이었다.

    “그, 그럴 수가.”

    “엉덩이를 이쪽으로 들이미십시오.”

    “안 돼!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주군은! 으, 흐읏!”

    라우라는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결국 한끼의 식사로 전락했다. 그때 귓가에 띠링, 하고 유쾌한 효과음이 들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직업 레벨(성노예)이 올라갑니다!」

    라우라의 직업 레벨 중 하나인 성노예가 C급에서 B급으로 상승한 것이었다. 정치 능력치와 매력 능력치에 디메리트 효과를 주는 쓰레기 직업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노예에 숨겨진 장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즉……아마도 성노예 레벨은 섹스와 관련하여 당사자의 품질을 결정한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맛이 좋아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벨이 오르자마자 내 아랫도리를 감싸는 압력이 꾸욱 하고 강해졌다. 마치 뜨거운 슬라임이 있는 힘껏 감싸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날은 여섯 시간을 내리 박았다.

    “…….”

    라우라, 전사(戰死). 침대 한구석에 쓰러졌다. 장렬한 최후였다.

    “후. 적장, 물리쳤다.”

    “…….”

    회심의 대사를 뱉었지만 라우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한창 쌩쌩한 열일곱 살 여자애를 기절시킬 정도의 정력. 나는 왠지 모를 정복감을 느끼며, 바가지로 물을 떠마셨다.

    한바탕 성욕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니 남은 것은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영지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으음.”

    나도 전체적인 그림이야 그릴 줄 알지만, 실질적인 업무에는 자신이 없었다.

    이곳은 폰 로젠베르크의 변경백령이 아니다. 거기엔 이미 세율이니 하는 절차가 수백 년의 전통을 거쳐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나는 단지 올라오는 서류에 사인을 하면 그만이었다.

    반면에 내 마왕성 주변의 산간마을은 사정이 다르다. 영주의 폭압과 몬스터의 침략에 쫓겨서, 겨우 여기까지 도달한 인간들이 이룬 마을이다. 영주의 권력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 동시에 몬스터는 고블린밖에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입지조건은 없겠지.

    이때 내가 등장한 것이다. 세금이니 뭐니 하는 체계를 처음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내 영지의 그림이 결정된다.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서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월맹군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지 삼 주째. 분홍빛 머리를 한 서큐버스 소녀가 마왕성에 방문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보급업무가 밀려 이제 오게 되었습니다.”

    라피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오늘부터 다시 단탈리안 님 전용의 상인으로 활동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

    “라피스으으으!”

    “라피스 공――!”

    나와 라우라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우리는 라피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라피스는 언제 어느 때도 무표정한 얼음 가면을 자랑하는 차도녀. 주인과 가신이 나란히 울고불며――심지어 둘 다 알몸이었다――난리치는 사태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영지가! 세금이! 율법이!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주군이 색마이다! 하루에 수십수백 번 소녀를 박아댄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라피스 공, 주군의 발정을 부디 막아달라!”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부터 천천히 하지요.”

    그녀가 영지업무의 최고참에 선정되는 순간이었다.

    라피스는 먼저 내가 판결을 통해서 짜놓은 구상을 들었다. 그녀는 차분히 내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고칠 점이 더러 있군요.”

    “역시 그렇겠지?”

    내가 슬그머니 웃었다.

    “우선 감면이 문제입니다. 부역을 통하여 세금을 줄인다는 발상은 좋습니다. 하지만 영지민이 정확히 어느 정도로 부역을 했는지, 어떻게 측정할 생각입니까? 일일이 감독관을 임명해서 보고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

    맹점이었다.

    부역이란 공사. 예컨대 저수지를 만드는 일을 생각해보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일한다. 이때 저수지를 만드는 데 누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정확히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는가. 십중팔구 주먹구구식이 되어버린다.

    “촌장에게 맡기는 것은……안 되겠군.”

    “예. 권력을 분산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촌장에게 그 업무를 맡기면 촌장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진다.

    마을주민은 촌장에게 잘 보이는 데 혈안이 되겠지. 똑같이 일을 했는데도 촌장과 친한 사람은 부역을 더 많이 한 걸로 계산되고, 결국 더 많이 감면을 받는다. 감면 받은 사람은 그럼 어쩌겠는가? 감면 받은 분의 1/2 정도는 촌장에게 바치겠지.

    결국 촌장이 마을의 업무를 관장할 뿐만 아니라 토호까지 되어버린다. 이래서야 재주는 내가 부리고 돈은 촌장이 독식하는 꼴이다.

    “어쩌지?”

    “효과적이면서도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감면을 개인 단위로 하지 말고, 마을 단위로 하십시오. 감면율을 한 마을 전체에 매기는 것입니다.”

    “아하!”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끝내주는 해결책이었다.

    요컨대 나는 이거 공사하라 저거 공사하라 명령을 내려둔다. 그걸 해내면 마을에 일괄적으로 감면해준다. 이러면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가 없어진다.

    “더불어 누구 한 사람이 게으름 피우는 일도 사라집니다.”

    “마을 전체를 위해서 일하는데 너는 뭐하고 있냐, 그런 식으로 나올 테니까. 과연!”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하면 마을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연대책임이 되지요.”

    계산도 쉬워지고, 부역의 고질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게으름도 사라지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한 수였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어떻게 그런 수법을 생각했어?”

    “과찬입니다. 별 거 아닌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피스는 정책의 방향을 살짝 바꾼 것만으로 수많은 폐해를 예방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부릴 묘기가 아니다.……파르시와 내가 권모술수를 동원한 것이 꽤나 어두운 의미에서 정치라면, 방금 라피스가 보여준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 정치이다.

    ‘상태창.’

    나는 라피스의 능력치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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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라피스 라줄리

    종족: 하프 서큐버스  소속: 쿤쿠스카 상회

    속성: 중립(-10)

    레벨: 25        명성: 194

    직업: 상인(A-), 마녀(B), 검사(D)

    통솔: 59  무력: 32  지력: 57

    정치: 76  매력: 50  기술: 2

    호감도: 50

    충성도: 82

    *칭호: 1.자수성가 2.쿤쿠스카의 상인

    *능력: 거래B+, 회계B+, 산술B, 보급C, 검술D

    *스킬: -

    현재심리: ‘……칭찬해주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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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1. 자수성가. 사회의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지위를 손에 넣었다. 정치+10, 매력+10, 숙련도 성장 속도 x1.2

    2. 쿤쿠스카의 상인. 마계 최고 상회에 소속된 상인이다. <거래> 능력 +0.5, <회계> 능력 +0.5, 명성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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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력이 70이 넘었다. 라우라의 정치력이 10인 것에 비해 찬란한 능력치였다.

    아마도 라피스의 정치력은 대부분이 실질적인 업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겠지. 나는 권모술수와 모략에 특화되어 있겠고.

    정치력이 똑같이 70이라 해도 캐릭터가 정작 어디에 특화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다. 예컨대 바르바토스는 짐작컨대 정치력의 대다수가 파벌 통치에 맞추어져 있을 거다. 파벌 간의 알력, 파벌원 사이의 중재, 이런 것에 귀신처럼 능숙하겠지. 하지만 영지 통치에는 거의 쪽을 못 쓸 거다.

    ‘라피스를 진작 동료로 영입해서 다행이야. 내 안목은 틀림없다니까.’

    내가 흐뭇해하고 있는데 라피스가 조심스레 말해왔다.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있었다.

    “단탈리안 님. 확실히 제가 말씀드린 안건은 별 거 아니긴 합니다.”

    “응? 아니야. 대단해. 잘했어. 이야, 덕분에 살았다니까.”

    “그럼, 자그마한 보상을 바래도 되겠는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무거나 말해봐! 뭐든지 들어줄게.”

    “……뭐든지 말입니까.”

    순간 라피스의 눈동자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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