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27화 (127/510)

00127 로마의 아침  =========================================================================

어디 설명해보라며 파르시를 내려다봤다. 다른 마을사람과 마찬가지로 파르시는 엎드렸는데, 고개만 슬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내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 녀석……역시 정치적인 센스가 있다. 생겨먹은 건 영락없이 불독인 주제에.

‘문자 좀 배우면 어디 써먹으련만.’

조금 아까웠다. 아예 작정하고 유학이나 보내줄까도 싶었다. 파르시는 라우라와 동갑. 즉 열일곱 살이었다. 어리면서도 또 배움을 시작하기에는 애매했다. 뭐, 사람은 서른 살이 되기 이전에는 뭘 배워도 늦지 않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파르시가 일어섰다.

“먼저 안으로 모시겠수.”

“좋다. 안내하라.”

나는 근처 목조집에 안내되었다. 촌장집이었다. 마을의 권력자가 지내기에는 꽤 초라했다. 쓸데없이 사치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흐음. 더 마음에 든다.

“자아. 설명해봐라.”

내가 방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파르시는 편하게 정좌를 한 다음에 푹푹 한숨을 쉬었다. 도통 예의범절을 모르는 행색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했고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비굴하게 굴겠다. 하지만 거기에 진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나는 당신과 진심으로 지내고 싶은데, 왜냐하면 나의 진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당신에겐 있기 때문이다.――파르시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런 인상을 주었다.

“일이 꼬였수다.”

“모험대가 또 분탕을 친 것 같지는 않은데.”

“딴 마을들이 지들끼리 작당해서 나으리의 땅을 부쳐 먹었소.”

파르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땅이라니? 설마 마왕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겠지.”

“지난 번에 모험대랑 엮여서 패망한 마을들 말이오. 그네들이 경작하던 논밭이 있지 않소. 그걸 딴 마을사람들이 찔끔찔금 먹어버렸수다.”

“흐음.”

손에 턱을 괴었다. 사태의 경중을 따져보았다.

나는 모험대에 붙은 마을들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빼앗은 식량은 내 편에 붙은 마을들에 적절하게 분배했다. 상벌은 그걸로 끝났다. 그외에 언급되지 않은 모든 재산은 당연히 나의 것. 즉, 마을주민이 나의 재산을 멋대로 침탈했다는 것인데…….

“당사자만 처벌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보아하니 이 마을의 주민은 범죄에 동참하지 않은 모양이군. 음. 죄과에 비하여 사죄의 크기가 지나치게 큰 것 같다만…….”

“젠장. 거 몇몇 놈들이 몰래 도둑짓한 거면 오죽 좋겠수? 아예 촌장들이 앞장서서 나으리 땅을 일구라고 부추긴 거요. 촌장 놈들은 그게 지들 땅인양 연공(年貢)까지 거두었소.”

으아.

내 표정이 짜게 식었다.

“미친 놈들 아닌가?”

“미친 새끼들이지.”

파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야 얘기가 심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좌 자세를 풀고 다리를 편하게 내놓았다. 마음이 불편해진 만큼 몸이 편해져야겠다. 그런 의미였다.

“연공의 비율은 얼마였냐.”

“수확량의 7:3.”

“지랄……진짜 돌아버린 놈들이었군.”

연공으로 소득의 7할이나 떼어먹다니, 도둑놈도 보통 도둑놈이 아니다. 물론 이 시대에 수확량의 7할을 빼앗는 것은 매우 흔하다. 평범하다고 봐도 좋다. 소득의 5할만 세금으로 거두어도 '우리 영주님은 신께서 내리신 천사이다!'라는 찬사가 쏟아질 정도이다.

문제는 그런 폭거가 오로지 땅주인한테만 허락된다는 것이다. 촌장들은 내 소유의 토지를 갖고 주인 행세를 했다. 요컨대 영주참칭죄. 반역죄다.

내가 혀를 찼다.

“쯧. 마을주민이라 해도 한두 명이 아니다. 수백 명이 한 마음이 되어 나를 속이려 들지는 않았을 거야. 혹시 촌장들이 중간에서 구라를 치지 않았는가?”

파르시의 눈이 개구리 눈알처럼 커졌다.

“어찌 알았수? 햐아. 나으리는 점집 차려도 대성하겠구만.”

“됐고, 설명이나 해라.”

“촌장 놈들은 세금을 거두면서 나으리한테 바칠 거라고 말했다고 하오.”

공문서위조까지? 점입가경이었다.

산간 마을들은 전체가 나한테 복속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가 어디를 개간했는지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이걸 개간신고라고 한다.

중세에는 모든 땅은 왕의 토지(王土)라고 하는 사상이 있다. 영지에 땅이 많다고 해서 무작정 개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디를 얼만큼 개간했는가, 언제 개간했는가, 누가 개간했는가, 전부 상세하게 적어서 신고해야만 한다.

이 시대, 영지가 농토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는 곧 영지의 국력……신고도 없이 마구잡이로 개간사업을 벌이다가는 '너희 반란하려는 거지?' 하고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마을에 괜히 촌장이라는 직위가 있는 게 아니다. 출납대장을 기록하고 영주한테 개간신고를 하는 자가 바로 촌장이다.

그런데 촌장이라는 작자들이 아예 대놓고 개간신고를 무시했다. 심지어 영주한테 바쳐야 하는 연공을 지들끼리 떼어먹었다. 두개골에 뇌가 들었다면 차마 못할 짓.

말할 필요도 없다. 사형이다.

“본인을 아주 만만한 새끼로 취급했군.”

심장 한 구석이 싸늘해졌다.

주모자는 촌장들로 확정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번 사태는 한도 끝도 없이 커질 수가 있다.

당장 떠오르는 죄목만 해도 두 개가 있다.

옆동네 촌장이 반역질을 자행하고 있을 때 너희는 뭘 하고 있었는가? 촌장이 거짓말했다 해도 알게 모르게 마을주민이 협력했을 터. 그 마을주민들은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마을 자체를 처벌해야 하는가?……장난이 아니다. 자칫하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산간 마을이 연좌죄에 걸려버린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손이 줄어든다.

현재 나의 산하에 있는 마을은 총 다섯 개. 이중 마을 한 개 분의 인간을 처벌하더라도 전체 수익에서 1/5이 증발해버린다.

지금까지 전쟁하느라 바깥을 싸돌아다녔다. 이제 영지 좀 관리하라고 라우라한테 잔소리를 듣자마자 이런 사건이 터졌다. 이 무슨 날벼락이냐는 말이다.

연좌죄를 적용하면 일손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촌장만 처벌하면 영주로서의 내 위엄이 손상된다. 영주는 곧 영지의 법. 영주의 위엄은 곧 법의 위엄이다. 법이 바로서지 않은 영토에 국력이란 생기지 않는다……어찌해야 좋을까.

끙끙거리고 있자니 파르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 촌장 놈들 모가지는 우리가 죄다 땄소.”

“뭐? 그거 잘했다!”

내가 손뼉을 쳤다.

연좌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정황을 볼 때 얘네는 한통속이 아니다, 하는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파르시가 범죄를 저지른 촌장들을 처단했다. 반역죄인을 손수 처리했다. 그럼 이제 어떤 정치적인 해결이 가능한가?

반역죄인을 처단한 것은 잘한 짓이다. 하지만 영주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로 처벌을 행한 것은 잘못한 짓이다. 공과(功過)가 함께 있으니 이제 파르시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영주이자 판관인 나에게 달렸다.

여기서 파르시를 칭찬해주면 안 된다. 자칫하다 영지민에게 사법권을 넘겨주는 셈이 되어버리니까. 이럴 때는 무조건 파르시를 처벌해야 한다.

단, 겉으로만 처벌하고 실상은 죄를 용서해주는 식으로.

내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은 이제 그대에게 근신하라 명하겠다.”

“나는 나으리한테 너그러이 용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백 번 절하고 말이지.”

파르시도 히죽 웃었다.

“이같은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영주의 권리를 강조해야겠군. 응큼한 놈! 어서 솔직히 불지 못하겠느냐. 뭘 내놓을지 벌써 다 상의해뒀을 게 틀림없다.”

“수리권(水利權)을 넘기겠소.”

파르시가 쿨하게 말했다.

수리권이란 저수지처럼 농삿일에 쓸 수 있는 물길을 사용하는 권리이다. 농민에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예컨대 어쩌다 흉년이 들었다 해봐라. 이때 농민들은 수리권을 가진 영주나 사제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영주나 사제는 물길을 허락하는 대신, 내년에 세금을 2할 더 올려받을 것을 주문한다. 농민들은 일단 올해를 살아남아야 하므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동의하는 수밖에 없다. 하천을 가진 것만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다.

그토록 중요한 수리권을 나한테 넘겨준다니 얼핏 충성심이 대단해보이나…….

“이 근처에 저수지가 어디 있다고? 아주 가증스럽구나.”

당연하지만 내 마왕성 주변은 가난한 산동네, 저수지 따위의 인프라는 전무하다. 조그마한 시냇물이 몇 줄기 흐를 따름이다.

그런 시냇물은 설령 내가 갖게 되더라도 암묵적으로 마을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시냇물에다 세금을 붙이겠다면 당장 반란이 일어날걸. 그저 농민들이 이번에는 시냇물을 내가 쓸 차례다, 아니다 내가 쓸 차례다, 하고 쌈박질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재자 역할만 해줄 수 있다.

빛살 좋은 개살구.

“변명거리로 삼기에는 최고로 좋지 않겠수? 흐흐.”

파르시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나도 똑같은 표정이겠지.

반역죄에 가담하진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방치해버린 자들. 본래라면 연좌죄에 묶여서 싸그리 멸족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반역죄인을 빠르게 처단했다. 영주인 내 입장에서는 적당히 처벌해주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근신을 명령한다. 너그러운 처벌에 대하여 그들은 전원 감복. 재차 충성을 맹세하며 관용의 대가로 수리권을 진상한다. 나는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 이번 사건에 대하여 추가적인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

파르시와 영지민은 목숨을 부지한다. 나는 영주의 권위를 지킨다. 윈-윈이다.

“여기에 더해 좋은 생각이 있네만.”

“호오. 어디 말씀해보시구랴.”

“거기 멸망한 마을들이 남긴 농토들 말일세. 이제부터 7:3의 연공을 받는 조건으로 그대들한테 넘겨주는 건 어떠한가. 누구한테 나눠줄지는 촌장인 그대들이 알아서 하고.”

파르시가 감탄했다.

“캬아. 근신에 처해서 입장이 나빠질지도 모르는 우리를 배려해주시겠다?”

“물론 명목상 그대들이 나눠준다는 것일 뿐이다. 제대로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자네들의 체면이 서겠지.”

“더불어서 사유지를 농민에게 개방해준 나으리의 명성도 하늘을 찌를 테지. 우리는 땅 부쳐 먹어서 좋고, 나으리는 세금이 늘어서 좋고.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구만. 내 이제 나으리가 왜 마왕 전하인지 알겠수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얼. 이 정도는 기본일세.”

“하지만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았소. 반역죄에 가담하지 않은 마을이야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손 쳐도, 반역죄에 가담한 마을들은 어쩔거요? 거기 촌장들 목이 날아갔다지만 아무래도 처벌에 부족한 감이 있수다.”

“흐음.”

그건 나도 고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흐.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긴 한데.”

“기대되는군. 고하라.”

“솔직히 나으리가 영주로서 한 일은 하나밖에 없소. 고블린의 침입을 막아주겠다는 거. 그거 하나요. 저쪽에서 나으리와 한 약속을 무시했으니, 이번에는 나으리가 약속을 무시하면 되지 않겠소?”

내가 탄성을 내질렀다.

“고블린을 시켜 마을을 습격하면 되겠군!”

“그렇수다. 너무 강하게 공격하진 말고, 흐흐. 적당히. 적당히 놀아주면 지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파악할 거요. 아이고 마왕 전하, 우리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봐주십쇼오, 하고 넙쭉 엎드릴 거외다.”

“아아. 본인이 그때 가서 너그러이 용서해주면 된다. 세금을 1할 올리고, 부역을 조금 많이 할당하면 그만이겠지.”

그쪽 마을주민 입장에서도 반역죄를 탕감받는 거다. 싸게 먹힌다 싶겠지. 결국 실질적으로는 그쪽 촌장들의 목만 베어버리고 아무도 연좌죄에 걸리지 않은 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명안이다! 명안이야! 자네,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군!”

“허허. 과찬이외다. 어디 마왕 전하만 하겠수까?”

“흐흐흐.”

남정네 두 명이서 집구석에 모여 앉아 음흉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변태라 욕할지 몰라도 우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자고로 정치란 이런 맛에 하는 거지. 안 그런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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