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26화 (126/510)

00126 로마의 아침  =========================================================================

그 후로 라우라와 두 번을 더 하고, 나는 마왕성에서 빠져나왔다.

라우라는 내가 무슨 성교에 환장한 발정기 오크인 것마냥 비난했다. 하지만 내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즉, 갑작스럽게 마을에 행차해봤자 거기 화전촌 인간들이 당황하기나 더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마법수정구를 통해서 미리 이쪽이 방문할 것임을 알렸다. 이 방문에 뭔가 거대한 의미가 없고, 그냥 요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싶어서 갈 뿐이라고 말까지 해놓았다. 음. 정말 다정하지 않은가? 방문을 미리 알려준 데다 괜히 부산스레 대접하지 말라고 주의해주었다. 나처럼 상냥한 마왕은 정말 없을 거다.

나는 다음날 느긋하게 마을로 향했다.

*  *  *

단탈리안은 모르겠지만.

그가 행차한다는 예고는 화전민들 입장에서 날벼락과 같았다.

상대방은 마왕. 게다가 일전에 리프 모험대와 함께 방해한 주민들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참수시켜버린, 무자비하고 냉혹한 폭군이었다. 마을사람 입장에서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은 공포의 대명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자기가 방문할 거라고 마법수정구를 통해 알려오자 마을들이 발칵 뒤집혔다. 각 마을의 촌장들이 부랴부랴 한자리에 모여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이들은 마을에 몇 마리 없는 말을 타고 힘겹게 집합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지 않다가 갑자기 방문하겠다는 것은……여, 역시 그거 아니겠소?”

“으음. 아마도 그렇겠지.”

평생 농삿일로 몸이 우락부락하게 가꾸어진 남자들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공물을 내놓는 것을 바라시는 거로군…….”

촌장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물. 일종의 세금과 같은 것이었다.

원래 이들이 마왕에게 세금을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왕은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전적인 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리프 모험대 사건이 문제였다.

던전 주변에 정착한 마을은 열두 개였다. 그중 무려 다섯 개의 마을이 반란을 일으켰다.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마왕 단탈리안은 전적인 자유를 보장하면서 단지 충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마을들은 그 충성조차 지키지 못했다……. 계약은 깨진 것이었다.

살아남은 마을 중에는 모험대 사건 때 박쥐처럼 이도저도 아닌 처세술을 보여준 곳도 꽤 많았다. 조금만 삐끗했다면 자기네 마을도 몰살했을 거라는 자각이 촌장들 사이에 있었다. 어쩌면 바로 내일이 조금 삐끗할 날이 될지도 몰랐다. 촌장 회의는 분위기가 점차 우울해졌다.

“그분께서 요구하시기 전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공물을 바칩시다.”

한 촌장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요구해서 마지못해 내놓았느냐, 아니면 스스로 바쳤느냐. 이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마왕 전하께서도 우리의 체면을 어느 정도 봐주시겠지요.”

“정말로 그럴까? 난 작년에 마왕 전하께서 군을 이끄시는 걸 직접 봤네. 그건 악귀였어.”

다른 인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떠올린 것은 고블린 대군 앞에서 열광적으로 연설하는 단탈리안의 모습이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이빨을 드러내며 환호하던 광경이란!  그는 왜 마왕이 몬스터의 군주라 불리는지 깨달았다.

“체면이고 뭐고 상관할 분이 아닐세. 공물 목록에 우리의 목을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르네…….”

“그, 그러니까 공물을 최대한 많이 준비하자는 것 아닌가.”

촌장들의 회의가 점차 심각해질 무렵.

“흐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젊은 촌장 파르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단탈리안을 따라 직접 모험대 사건 때 종군한 자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단탈리안을 지켜보았고, 따라서 그가 굳이 공물을 뜯겠답시고 깡패처럼 동네를 순회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랑 별반 상관없는 얘기구만.’

설령 정말로 단탈리안이 공물을 바치라 으름장을 놓을지라도, 파르시는 자신의 마을만큼은 면제될 거라고 생각했다. 모험대 사건에서 자기가 가장 열심히 마왕의 편에 서서 싸웠으니까.

‘솔직히 영감탱이들이 알아서 쫄아버린 거 같은데. 도둑이 제 발 저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이걸 한번 찔러봐, 말어?’

파르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촌장들 얼굴을 한 명씩 살펴봤다.

구린 냄새가 났다.

파르시는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어딘지 예리한 감을 타고났다. 단탈리안의 눈에 든 까닭도 바로 그 직감 덕분이었다. 지금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 촌장들에게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고.

“여보쇼, 영감님들.”

젊은 촌장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까발리쇼. 댁들, 지금 마왕한테 들키면 곤란한 짓 했지?”

“뭐, 무슨 소리인가.”

한 촌장이 딱 잡아뗐다. 훌륭한 대처였다. 그러나 그외에 표정이 움찔거린 촌장이 세 명 있었다. 사냥꾼으로 살아온 파르시의 매서운 눈매가 그 이상을 놓치지 않았다. 이 영감탱이들이 진짜 뭘 저질렀구나!

파르시의 입밖으로 형식상 예의를 갖추던 말투가 사라지고 흉폭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시발, 얼른 불어. 뭔 짓을 한 거야?”

“……그러니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나. 괜히 윽박지르지 말게.”

“아이고, 멍청한 양반아. 딱 보니까 마을들 몇이서 뭘 짜고 쳤구만. 댁들 중에서 한 명이 마왕한테 꼰지르면 일이 파토나는 것도 모르겠수?”

파르시가 비아냥거렸다.

“안 그래도 지금 공물을 얼마나 많이 바쳐야 할까 꽁알거리고 있구먼, 거 고자질 한방으로 공물 양 좀 줄여보자고 생각하는 녀석이 정말 없을 거 같어?”

“…….”

남자의 표정이 무너졌다. 낭패였다. 파르시가 한 말이 옳았다. 막대한 공물을 고자질 하나로 대신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마을들 사이에 거대한 우정 따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필요에 따라 최저한의 신뢰를 나눌 따름이었다. 다시 말해 필요만 하다면 언제든지 서로를 배신할 수 있었다. 작년만 해도 일부 마을들이 자경단원과 모험대의 쪽수를 등에 업고 다른 마을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았던가.

네 명의 촌장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척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게 말일세. 사실은…….”

잠시 후.

파르시가 고함을 질렀다.

“이런 천하의 멍청이들을 봤나!”

파르시 이외에도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촌장들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주모자 무리를 쳐다보았다. 미친 놈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주모자 무리에 속한 촌장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래도 멀쩡한 밭을 놀려두기도 아깝고…….”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씨부리는 거요! 거 논밭들이 어떻게 댁들 소유요!”

네 명의 촌장이 저지른 짓은 다음과 같았다.

리프 사건에 휘말려서 초토화된 마을들. 하지만 마을들이 경작하던 논밭까지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촌장들은 번듯하게 살아남은 논밭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다.

저것들을 우리가 좀 이용할 수 없을까.

마을에는 자기 농지를 갖지 못한 차남과 삼남이 넘쳐났다. 가문을 잇지 못하니 일개 인력으로 쓰이는 이들이었다. 촌장은 그들을 꼬셔서 텅 빈 농지를 선심 쓰듯이 던져주었다. 마치 자기 논밭인 양 말이다. 대가로 연간 5할의 수확량을 요구하면서.

“대가리에 화살 맞은 새끼들!”

파르시는 분통이 터졌다. 이 놈들이 저지른 짓 때문에 자기네 마을까지 덤태기를 씌게 생겼다.

생각해보아라. 지금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을, 단탈리안이 방문한다니까 허겁지겁 고해바친다고? 마치 단탈리안이 알아차리지 못할 때까지 고의적으로 숨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지 않는가. 너희 전부 공범 아니냐고 의심받을 판국이었다.

반란 사건으로 인해서 사라진 마을들의 영토는 마왕 단탈리안이 가지고 있었다. 반란자의 영토는 반란을 진압한 주인에게 되돌아간다, 이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저 촌장들이 저질러버린 일은――한마디로 영주의 영토를 제멋대로 점유한 다음, 자기 마을주민한테 나눠주고 세금까지 떼먹은 셈이 되어버린다.

훌륭한 반란죄였다.

영주 참칭죄, 세금권 침탈죄……도대체 죄목이 어디까지 불어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촌장 서너 사람의 목 가지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마을주민 모두가 사형되어도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도, 도와주시게. 그대들이 모른 척하면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미쳤소? 우라질. 자살에 취미 붙인 적 없소외다.”

파르시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걸 보고 촌장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뭘 하려는 것인가!”

“이거 가만히 두었다가는 애꿎은 우리 마을 애새끼들까지 피 튀길 판이거든. 미안하지만 여기서 뒈져 주셔야겠소, 영감들. 이보쇼! 댁들도 살아남으려면 나한테 붙어!”

파르시의 행동은 과감하고 신속했다. 그는 날쎈 짐승처럼 달려들어 주모자 무리의 촌장을 찔렀다. 칼날이 정확하게 목에 들어갔다. 촌장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촌장들도 단검을 꺼내들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파르시의 활약에 힘입어서 무고한 마을의 촌장들이 승리했다. 파르시가 단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왕한테는 일단 요놈들 목이라도 바쳐야겠지.”

“공물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크흥.”

상황이 난감해졌다. 원래는 바치지 않아도 될 공물이 이젠 반드시 필요해졌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연대책임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기가 직접 저지르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처벌을 안 받는 것이 아니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가족이 책임을 진다. 이웃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주변의 다섯 집안이 책임을 진다. 그런 것이 일상화된 시대였다.

마왕 입장에서 이번 사태는 각 마을이 다른 마을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아서 일어난 불상사. 파르시는 이를 바득 갈았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마왕 곁을 따라다니는 인간 소녀가 떠올랐다. 라우라인가 뭔가 했던가. 분명히 자신과 나이가 똑같았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댁들 마을에 처녀가 몇 명이우?”

“두 명 있네.”

“우리 마을에는 세 명…….”

다 모아보니 열 명 남짓했다. 파르시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일단 그거라도 모아서 마왕한테 진상하자고 제안했다. 처녀들을 꽃치장 하고 공물들을 바리바리 붙여서 보내면 그럭저럭 외관상 괜찮은 공물이 될 것이었다.

“아이구야. 마을 총각들이 뭐라 불평할지 벌써부터 골이 아파오는구만.”

“바깥에서 노예를 사와야 하나. 쯔쯧.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일이 이렇게 됐누.”

모두 착잡했다. 원래 열두 개의 마을이 있었던 것이 반란 사건 때 일곱 개로 줄어들었고, 이번에 다시 세 개로 줄어들 기세였다. 인간의 가장 위험한 적은 몬스터가 아니라 바로 동족인 인간이라는 격언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개새끼들!”

파르시가 분을 참지 못하고 시체를 짓밟았다. 예의에 한참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촌장들은 곧바로 자기의 마을에 돌아갔다. 시간이 촉박했다. 밤새 마을주민을 닥달하면서 공물을 준비했다. 별안간 마왕한테 시집 가게 생긴 마을 처녀들이 눈물을 터트렸다.

가족들이 분기탱천했으나 마을을 위해서라는 말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협조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좋은 시대가 아니었다. 깊은 밤에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내렸다.

*  *  *

“용서해주시옵소서!”

“부디 성의를 보아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마을에 당도하자마자 내가 본 광경은, 마을 앞까지 나와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곡식 따위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다. 곡식 앞에는 웬 오크녀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분명히 이번 방문이 별 거 아니라고 통고했는데도.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뻥긋거렸다. 너희 뭐하고 있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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