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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23화 (123/510)
  • 00123 가장 긴 십오 분  =========================================================================

    내가 눈을 깜빡였다. 이바르가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고?

    이바르는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에다가 그 본인은 강력한 진조 흡혈귀였다. 재력과 모략,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내 막부에 들어온다면 틀림없이 큰 이익을 안겨주겠지. 하지만……이야기가 너무 좋은데.

    ‘상태창.’

    이바르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다리를 두들겨보는 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바르의 상태창은 단지 체력-공격력-방어력만 간단하게 표시하는 형태로 떠올랐다. 호감도가 20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거짓말이로군.

    현재 내 막부에 들어온 인물은 라우라와 라피스. 둘 다 호감도가 50을 찍은 다음에야 아군으로 영입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스템상의 문제였다. 호감도 50은커녕 20도 채우지 못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갑자기 신하가 되기를 청하다니, 꿍꿍이가 뭔지 의심스러웠다.

    ‘하아…….’

    도대체가 내 주변에 있는 놈들이란 왜 다 이따구로 생겨먹었냐.

    어떤 년은 자그마치 일 년 전부터 내가 안 했다고 안 했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건 네가 한 짓이라면서 모함하지 않나, 어떤 녀석은 진실을 알면서도 파벌의 균형을 맞추겠답시고 은근히 압박하지 않나, 또 어떤 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살인을 권유하지 않나.

    죄다 뱃속에다 구렁이를 키워도 열 마리는 키울 것 같은 위인 투성이였다. 이제는 또 한 녀석이 속엔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감복했다느니 삶이 어쨌느니 구라를 까고 있었다. 제발 단 한 순간이라도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을까?

    아니, 내가 할 소리는 아니군……때때로 나는 라우라나 라피스 앞에서도 교묘하게 군다. 바르바토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나만큼 정치적인 새끼도 없겠지. 결국 까마귀 옆에 까마귀인가……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이보게. 로드브로크 경.”

    “예, 전하.”

    “솔직히 말해서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삼천 년을 살아온 지혜는 가히 경이로울 터. 마왕에게 무조건 승복해야 하는 마인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자네는 혼을 인형에 옮김으로써 자유의지를 되찾았네. 적당히 마왕에게 굴복하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마인과는 차원이 다르지.”

    “황공하옵니다.”

    “허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에 실망스럽군. 왜 나에게 거짓을 고하는가?”

    “…….”

    “지난 반 년 동안 우리는 실로 멋들어지게 춤을 추었네. 자네와 쿤쿠스카 상회가 없었다면 월맹군이 이곳에 집결하지도 못했겠지. 알겠는가?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마왕과 마인이 아닐세. 동반자야.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동료이지.”

    이바르는 여전히 몸을 엎드리고 미동하지 않았다.

    “만약 자네가 진심으로 가신이 되고자 했다면, 그 몸이 아니라 진실된 육체로 찾아왔을 것이다.”

    “전하, 오해입니다. 시기가 다급하여 미처 본래의 육신으로 찾아뵙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시기가 다급하긴 왜 다급한가.”

    내가 약하게 웃었다.

    “지금 당장 군신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언제라도 여유가 생긴 다음 예를 갖추어 찾아오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런데도 이런 시기에 다급히 왔다라……자네의 목적은 지금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다른 무언가에 있겠지. 아닌가?”

    “…….”

    “파이몬이군.”

    뻔할 뻔 자였다.

    사실 이바르는 나에게 책 잡힐 게 하나 있다. 파이몬이 장만해서 성녀에게 넘겨준 장부가 그것이다. 장부는 어디까지나 쿤쿠스카 상회와 나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서로, 당연히 타인에게 함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엔 단지 흘러가는 수준을 초월해서 계약자인 날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네를 부하로 삼는 대신 파이몬을 죽여달라. 그렇게 청탁할 속셈인가? 그녀는 쿤쿠스카 상회를 통해서 장부를 얻었다. 하긴, 증거를 박멸하고 싶겠지.”

    “전하, 사실무근입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가 소리 질렀다.

    “자네는 언제나 그런 식이야! 청문회 건도 그러했다. 그 늙은 고블린이 감히 혼자서 날 물 먹이려 들지 않았을 터, 보나마나 자네가 중간에 개입했을 것이다. 헌데도 책임은 고블린이 혼자서 다 떠안고 자결했어. 자네가 청문회에 대해서 나한테 진지하게 사죄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나 몰라라 외면했지!”

    말을 내뱉다보니 속에서 열이 뻗쳤다. 내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을까? 아니다. 지금은 흥분해야 할 때가 맞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게 약점이 될까봐 그토록 두려웠는가? 나를 살인멸구하고자 했는가. 그리고 이번에는 파이몬까지……하! 그대의 처신술이라는 것도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소인은…….”

    “자기 잘못은 전부 남에게 떠맡기고, 떠맡기기 곤란하면 아예 누군가를 죽여버린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여왔는고? 마왕이 괴물이라면 자네는 무엇인가? 괴물보다 더 끔찍한 생명체로군! 흡혈귀! 다른 자의 피를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박쥐 자식이!”

    이바르가 상체를 들었다.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 전까지 정숙하고 냉정한 노신사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증발했다. 이바르의 눈은 용암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다면, 어찌하라는 말인지요!”

    이바르가 억눌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손한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간파당하고, 반항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그것이 마왕에 대한 마인의 선천적인 한계입니다! 당신은 마인으로 태어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릅니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분노와 슬픔, 억울함.

    “한때는 당신 같은 이들에게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배신뿐! 마왕에게 마인이란 어차피 자신보다 격이 떨어지는 애완동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인을 위해 대륙을 정벌한다 소리높여 주장하지만 그 대륙에서도 마왕은 지배하고 마인은 영원히 지배 당하겠지요!”

    이바르가 수천 년의 한이 담긴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말해보십시오! 마인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까! 누군가가 죽으라 명령하면 아무리 두려워도, 아무리 무서워도 죽어야만 하는, 그런 기계와 같은 존재입니까! 수백 년 동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익혀도……소중한 가족이 생겨나도……단지 상대가 마왕이라는 이유,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냐는 말입니다!”

    내가 이바르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코앞까지 갖다대고 으르렁거렸다.

    “마인으로 태어나서 억울한가? 웃기지 마라. 태어난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나라고 해서 이런 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아는가!”

    “크……!”

    “네가 얼마나 불행한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어. 완전히 관심 밖이다. 네놈이 네놈의 불행에만 허덕이듯이 나 또한 나의 불행을 짊어지기에 바쁘다. 하지만 말이지, 네놈처럼 자기 불행을 완전히 엉뚱한 사람한테 덧씌우는 녀석을 보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다!”

    쿵, 하고 그의 이마에 박치기했다. 엄청나게 아팠다. 나보다 무력 능력치가 높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방 날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난 네놈을 배신한 그 마왕이 아니다! 나는 단탈리안! 오직 단탈리안이다! 네놈이 어떤 마왕 새끼한테 속아넘어서 일족의 목숨을 갖다바쳤든, 첫사랑을 잃어버렸든――그 마왕 새끼랑 나를 똑같이 여기지 말란 말이다!”

    이바르의 눈에서 경악이 번졌다.

    “어, 어떻게…….”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해라. 결점이 생겼으면 덮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함께 나아갈 생각을 해라. 그게 동료를 대하는 방법이겠지! 그 정도 태도도 취하지 않으면서 군신이니 뭐니 떠드는 것은 역겨운 자기기만이다!”

    멱살을 잡은 손으로 이바르를 힘껏 밀었다. 그는 몸이 뒤로 넘어졌다.

    “썩 꺼져라! 물렁한 우정을 논할 거면 차라리 완벽한 적의로 대하는 편이 낫다.”

    “…….”

    이바르와 나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한동안 서로 노려봤다. 이바르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시선에 분노뿐만 아니라 당혹감까지 서렸다. 그런 눈길로는 아무도 제압하지 못한다. 결국 이바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일어서서 힘없이 막사를 나섰다.

    “후우…….”

    내가 깊이 심호흡했다. 레벨이 오르면서 새로운 기능을 찾았다고 즐거워하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기랄, 그렇지 않아도 파이몬 때문에 심란한데 별 녀석이 뒤통수를 때리려 온다.

    어차피 이익과 이익으로 얽힌 사이다. 반대로 말해, 더 큰 이익이 보인다면 얼마든지 배신할 관계이다. 어쩌면 쿤쿠스카 상회에서 의도적으로 흑사병 관련 장부를 유출했을 가능성도 있다. 파이몬을 정치적으로 말살하는 한편, 나까지 한데 묶어서 처리해버리자……그랬을지 모른다. 정치란 게 이렇다. 더럽다.

    ‘파이몬은 살려둔다.’

    지금 결심했다. 이번 월맹군 전역, 라피스와 내가 미네르바 작전이라 명명한 전쟁에서 쿤쿠스카 상회는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라피스는 몰라도 이바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언제 배신을 때릴지 모를 놈, 아니 년이다.

    목줄이 하나 필요하겠지. 파이몬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이바르를 얌전하게 만들 거다.

    파이몬은 산악파의 수장이고, 나는 평원파의 핵심인사. 언제고 바르바토스를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아무리 쿤쿠스카 상회가 마계 제일의 규모를 자랑할지라도 산악파와 평원파 양쪽의 압력을 견뎌내기란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면 파이몬도 이바르에게 물 먹은 신세 아닌가. 청문회에서 이바르가 배신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날 이겼을 거다. 그 점을 부각시켜서 한번 설득해보자. 무얼,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거다. 어느 정도 이득을 챙기지 못하면 이쪽이 손해이다……. 척추에 고인 골수까지 빨아먹어주지.

    막사 바깥에서 묘족 호위병이 말했다.

    “전하. 마왕 시트리가 접견을 청하나이다.”

    “확 모가지를 비틀어버릴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쉴 팔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이 녀석들은 상식이 없나? 설전도 말로 하는 진검승부이다. 나는 요컨대 월맹군의 선봉전을 치르고 막 돌아온 장수였다. 이제 휴식을 취하겠다고 들어온 사람을 뭐 이리 달달 볶으려고 쳐들어오는가?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 말하거라!”

    “예, 전하……시트리 전하. 죄송하지만.”

    시트리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정말로 상식을 모르는 작자였다. 막사 바깥에서 말싸움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시트리가 막무가내로 안에 들어왔다. 나는 손님의 예의를 전혀 모르는 작태에 크게 소리칠 뻔했으나, 시트리의 모습을 보고 그만 어이가 상실했다.

    “용서해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시트리는 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덥썩 땅에 절했다. 요즘은 날 만날 때 절부터 하는 것이 유행이냐?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저기, 시트리 님……?”

    “원하는 걸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파이몬만은……파이몬 언니의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녀가 땅바닥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예의상 박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온힘으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무심코 이쪽이 겁을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그게 아니라, 저기.”

    “성노예가 필요하시지 않나요? 저, 이래봬도 그쪽 방면에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어요. 정말이예요.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파이몬 언니만은!”

    “……일단 옷부터 입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트리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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