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가장 긴 십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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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마왕군은 발레포르의 기동요새를 앞장세웠다. 수십 미터짜리 거성이 움직이면서 돌격하자, 인간군의 전열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애초에 그들은 사기가 밑바닥을 파헤쳤다. 초전은 깔끔하게 월맹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적에게 기사단이 적었다면 초전만으로 승부가 결정됐을 거다, 하고 바르바토스가 감상을 남겼다.
인간군의 징집병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전황이 약간만 불리해지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패주했다.
부대가 패주한다는 것은 단지 한 부대의 퇴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대는 도망치면서 뒤쪽에 있는 아군과 맞닥트리기 마련이다. 전열과 전열이 엉켜서 혼잡해진다. 앞에 있어야 하는 아군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뒤쪽의 부대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혼란을 틈타서 부대를 탈영하는 자도 속출한다……그 결과, 적어도 세 부대 가량이 마비된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서 '전략적 후퇴'라는 구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달았다. 기사단, 혹은 검은 산성 수비군 정도의 정예병이 아니라면 전략적 후퇴 따위는 불가능하다.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의 진용이 간단하게 붕괴해버린다.
한번 뒤엉켜버린 부대들을 다시 나누고 배치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겠지. 그 며칠을 적군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 만무하다. 퇴각하는 군대에게 미래란 없다.
그런 대참사가 곳곳에서 연출된 것이었다. 몬스터에게 죽은 인간보다 독전관에게 죽은 인간이 더 많을 거라나. 인간측 수뇌부들은 지금쯤 연설전의 패배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달았으리라.
오늘 일어난 일을 남 얘기하듯 말하는 데 이유가 있다.
나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줘.”
어림잡아 한 시간 정도 설전을 치른 직후였다. 머리가 띵했다. 게다가 잭 올란드의 반격이라든지 파이몬의 이반이라든지, 나에게는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머리통을 식힐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너무 시간을 끌면 안돼.”
“한나절만……한나절이면 되니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파이몬은 마나 역류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감금되었다. 산악파도 평원파도 아닌 중립파의 진중에 실려갔다. 치료보다 격리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았다. 나는 막사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웠다. 잠자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싶었다. 멍멍한 시간이 흘러갔다…….
잭.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버려두었다. 죽이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웬만하면 살아남아서 그 녀석이 어떻게 살아갈지 지켜보고 싶었다. 녀석이 자살했을 때, 최소한의 예우로 시체를 가만히 냅두었다. 그것이 화가 되어 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물러터졌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나는 어딘지 모르게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지냈는지 모른다. 살아남겠다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한 구석에는 그런 느낌이 남아 있었다.……허나 생각해보면 날 죽을 위기로 몰아세운 자는 엘리자베트 황녀도 바알도 아니다.
작센 마을의 리프. 노예상인 잭. <던전 어택>에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은 놈들. 그런 녀석들이 항상 내 목숨을 위협했다. 물러터졌는가. 정말로 마음 어디에선가 녀석들을 깔보았는가…….
나는 잭을 진짜 인간으로 바라보았다고 여태껏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잭 올란드가 <던전 어택>에서 유명한 캐릭터였다면? 그때도 녀석을 살려두려 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 역시 잘 모르겠다.
“상태창.”
하고 중얼거렸다. 일단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내 복잡한 심정을 비웃는 것처럼 띠링,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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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34 악명: 4510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D)
통솔: 34/37 무력: 7/12 지력: 32/37
정치: 35/35 매력: 20/20 기술: 4/12
*칭호: 1.공포의 마왕
*능력: 전술(E), 사격술(E),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3개]
[부하: 54개체/26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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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1. 공포의 마왕.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마인에게 경의를, 인간종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통솔 한계치+10, 지력 한계치+10, 매력 한계치+10, 부하개체 한계치+100, 악명+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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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한꺼번에 10 올랐다.
들인 노력에 비해 조금 적은 것 같았지만, 뭐 단탈리안이다. S급 시나리오와 A급 시나리오를 파괴했을 때도 레벨이 16밖에 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A급 시나리오를 완파했다. 이 정도로 만족할까.
……그나저나 악명이 엄청나게 올라버렸군.
“아이고.”
이건 뭐. 한방에 3000가까이 상승했다. 아직 악명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했다. 현상금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모험자들도 나를 노리게 된다. 어그로가 끌리는 것이다.
레벨은 고작 10 올랐는데 악명은 3000. 경이로운 교환비가 아니고 뭔가. 이 따위 게임이 현실에 출시되었다면 바로 다음날 누군가가 개발사 빌딩에 불을 지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그럴 거다. 제기랄.
유일하게 위안을 삼자면 직업 레벨.
마왕 레벨이 E에서 D로 올랐다. 능력의 성장한계치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의 종류가 늘어났으리라. 시험 삼아서 오랜만에 몬스터 고용창을 열어보았다.
“몬스터 고용창.”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F급, E급, D급, 하고 몬스터 종류를 선택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F급에서 E급으로 승강했을 때는 약간 실망했다. 고블린 투석병, 고블린 창병 등, 대체로 고블린의 종류가 많아졌을 뿐이었다.
나는 D급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선택폭이 조금 더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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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명(D)]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고문 슬라임 20 1 2 500골드
-노움(하급 요정) 7 2 5 500골드
-고블린 기병 10 10 8 800골드
-고블린 주술사 5 20 5 1000골드
-좀비(*) 2 5 5 100골드
*마왕 바르바토스(어둠)의 호감도가 50이 되어 특별고용(좀비)이 가능해졌습니다!
[소지금: 6102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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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겍.”
비싸! 여전히 비싸다!
고블린 주술사. 허접해보이지만 드디어 마법사 유형의 몬스터가 생겨났다. 거기에다 처음으로 기병 유형의 몬스터까지 나왔다. 이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마법사와 기병이 추가되면 내가 펼칠 수 있는 전술의 종류가 엄청나게 넓어지니까.
이제 전방 골렘-후방 요정으로 버티는 전술을 고집할 필요가 없겠지. 상황에 맞추어 모험자를 유연하게 요격할 수 있으리라……하지만 그래도 비싸! 내가 가진 전재산을 쏟아부어도 고블린 주술사를 겨우 여섯 마리밖에 고용하지 못한다. 이래서야 모처럼 다양해진 병종을 제대로 쓸 수나 있으련지 의문이었다.
단, 특별고용이란 게 새로웠다. 이건 처음 보는 사항이었다.
나는 '좀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좀비에 대한 상세설명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알림창이 띠링! 하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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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특별고용 기능을 활성화 했습니다.
특별고용 몬스터는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고용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특정한 인물과 호감도가 높을 경우에만 고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수행하는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당신에 대한 상대방의 호감도가 높을수록, 더욱 더 특별한 몬스터를 고용하게 될 것입니다! 퀘스트의 유형 및 상대방의 속성에 따라서 당신이 고용하는 몬스터의 종류가 결정됩니다.
원한다면, 당신의 던전을 특정한 속성의 몬스터로만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둠> 속성의 몬스터만 고용할 경우 당신에겐 특별한 효과가 부여될지도……?
단, 특정한 속성의 몬스터가 고용되면 생각지도 못한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몫입니다.
오로지 당신만의 던전을 꾸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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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이런 기능이 있었구나. 꽤 재밌다.
마왕들에겐 저마다 특색이 있다. 저기 어마어마한 기동요새를 보유한 발레포르는 <물> 속성에 특화되어 있다. 바르바토스는 당연히 <어둠>이고. 그에 따라서 마왕들이 가진 던전들에도 개성이 있다.
특별고용은 나에게도 그런 개성을 선택할 여지를 준다. 아니, 굳이 개성을 찾지 않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를 고용한다는 것 자체가 좋다.
지금 활성화된 좀비의 경우만 보더라도 능력치야 평범하지만 고용비가 고작 100골드에 불과하다. 거의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다. 돈이 딸리는데 모험자가 들이닥쳤다, 이런 상황에선 응급대책으로 좀비를 무더기로 고용해볼 수 있다. 음. 나쁘지 않다.
파이몬에 대한 일로 흐리멍덩해진 머리가 서서히 맑아졌다. 이런저런 기능이 튀어나오니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악명이 높아지든 말든 나는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조급해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던전 어택>에서 정점을 찍은 플레이어였다. 충분한 재력과 몬스터만 갖추어진다면 세상 어느 영웅이 쳐들어와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월맹군이 끝나면 마이 스위트 홈, 마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처럼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과는 당분간 작별하는 것이다. 던전을 운영하면서 착실히 나의 힘을 길러야겠지. 말하자면 자숙의 시간……그렇다. 조급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제법 잘 해나가고 있다.
혹시 엘리자베트 황녀의 호감도를 높이면 근위기사 같은 것을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
“끌끌.”
그럴 리 없지만.
근위기사는 몬스터가 아닐 뿐더러, 애당초 엘리자베트 황녀의 호감도를 올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녀와 나는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은색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시야에 들어오면 부리나케 도망치자.
나의 던전을 꾸밀 생각에 즐거워하던 때였다.
“단탈리안 전하.”
막사 바깥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경비병으로 세워둔 묘족의 목소리였다. 웬만하면 날 방해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두었다. 그래서 라우라도 라피스도 이 자리에 없는 것인데.
내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쿤쿠스카 상회의 회주,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접견을 청하나이다.”
“음.”
과연. 웬만한 일이라고 판단할 만했다.
쿤쿠스카 상회는 현재 월맹군의 보급을 대주고 있었다. 제1군단에서 제6군단까지, 무려 여섯 개의 군단이 이곳에 집결했다. 약탈만으로 유지하기에는 몸뚱어리가 지나치게 거대해졌다.
내가 자세를 바로하고 말했다.
“들라 하거라.”
“예.”
이번 모략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철저하게 나를 지원해주었고, 이렇게 군단들이 모일 경우에 보급을 담당하기로 미리 합의했다. 어느 군대에서나 물주는 소중한 법. 이바르의 지위는 암묵적으로 고위 마왕급으로 대접받았다. 그런 자가 접견을 청하는데 함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막사의 휘장이 걷어지면서 늙은 신사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탈리안에게 영광을.”
“예는 생략하도록. 로드브로크.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전하. 전하께서는 소인의 소망을 훌륭하게 들어주셨습니다.”
이바르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제 소망은 마왕군의 분열.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소망을 전하께서는 한번에 꿰뚫어 보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여전히 의문스러우나, 전하께서 소인과의 약속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이행하셨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삼천 년의 생애를 허망하다 여기며 하루하루를 시체처럼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지난 삶이 한 순간을 위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소인. 이바르 로드브로크. 전하께 가신의 예를 올리고자 합니다.”
이바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땅바닥에 오체를 투신했다.
“군신의 예를 허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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