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21화 (121/510)
  • 00121 가장 긴 십오 분  =========================================================================

    당황한 것은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면서 매섭게 이쪽을 노려보았다. 제정신인가요, 하고 그녀의 시선이 질책하고 있었다.

    파이몬이 시선을 미소로 받아넘기면서 말했다.

    “삶이란 공교롭군요. 성녀 그라시아.”

    “……신들께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오, 그럴리가요. 그분들은 소녀를 신경 쓸 만큼 자애롭지 않답니다.”

    파이몬이 오른손을 휘저었다.

    “메모리아-레코르다치오네(memoria-recordatione).”

    허공에 영상이 투영되었다. 내가 잭을 고문하던 장면이 비추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파이몬과 그라시아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야트막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석조실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았다.

    ─ 마왕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라고…….

    ─ 예, 그렇사와요.

    ─ 증거는 확실해보이는군요.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저희에게 이런 자료를 제공하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풍경 속에서 파이몬이 예의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그라시아. 소녀는 그대들의 습성을 알고 있습니다. 희생양이 필요하겠지요?

    ─ …….

    ─ 평민층의 불만은 점점 극에 달하고, 귀족 사이의 분열은 격심해지며, 군대조차 유지되기 힘들어지고 있사와요.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권위, 더 나아가 신전의 권위를 지켜나가야 한다……쉬운 일이 아니에요.

    성녀 그라시아가 차갑게 대꾸했다.

    ─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마왕 파이몬.

    ─ 맞아요. 똑같은 대답을 돌려드리지요. 왜 소녀가 단탈리안을 몰락시키려 하는지,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소녀가 제안한 것이 당신의 이익에 들어맞는가. 그것만 고려해주시와요.

    ─ ……좋습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 예. 맹세하죠. 거짓 없는 약속을.

    마법 영상이 거기에서 끝났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두 사람이 밀약을 나누는 광경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파이몬이 인간계에 대체 얼마나 뿌리 깊은 인맥을 갖고 있는지 소름이 돋았다. 엘리자베트 제3황녀와 협력하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유명한 성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여태까지 나는 파이몬이 그저 인간이라는 종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용사를 위해 행동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단순히 인류애가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그 뿌리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치적인 암약이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만한 인맥이다. 이만한 맨파워다. 그걸 단지 나의 무죄를 밝혀주기 위해서 전부 깔아 뭉개버렸다. 이제 그 어떤 인류의 지배자도 파이몬을 신뢰하지 않겠지. 그녀가 신뢰를 회복하기란 절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자기가 함정을 파두고 왜 나를 도왔는가. 병 주고 약 주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말하자면 파이몬은 나를 구해내는 데 아마도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의 기간을 걸쳐서 인간계에 쌓아둔 신뢰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이성적인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마왕 파이몬.”

    성녀 그라시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공존. 그것이 당신의 대의라 생각했건만……아무래도 제가 크게 착각해온 모양이군요.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끝났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사와요.”

    성녀가 코웃음쳤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성녀의 모습이 평원에서 사그라졌다. 연설용 마법이 종료되었다.

    내 연설을 통해서 인간군의 귀족이 타격을 입었다. 구원투수로 나선 엘리자베트 제3황녀도 쓰러졌다. 마지막 소방수로 등장한 그라시아 성녀마저 무너졌다. 연설전은 인간군의 삼연패로 끝났다. 이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참패였다.

    파이몬이 오른팔을 앞으로 뻗으면서 소리쳤다. 그녀의 검은 망토가 화려하게 펄럭였다.

    “인간들이여! 이것이 귀족 그리고 성직자의 참모습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거짓된 사탕발림으로 민중을 희생시키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거짓된 증거로 누군가를 공격합니다. 그런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것입니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기에 퍼졌다.

    “신들께서는 여러분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결코 거짓된 삶을 보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살에 흐르는 붉은 피는 거짓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두 손은 거짓을 붙잡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두 발은, 기만에서 눈을 돌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 손은 진실을 붙잡기 위해 있습니다. 우리의 두 발은 진실로 나아가기 위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짊어지고, 반드시 도래해야만 하는 진실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파이몬이 단호하게 외쳤다.

    “귀족은 기만자이다. 이것이 누구나 아는 진실입니다! 만인이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세계가 도래해야 한다. 이것이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입니다! 이 명확한 진리를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으며, 그 어떤 강대한 귀족도, 그 어떤 날카로운 창날도 결코 우리의 진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여! 민중들이여!――신의 이름으로 투쟁하세요!”

    하얀 빛무리가 파이몬과 나를 감쌌다. 우리측의 연설마법도 끝난 것이었다.

    나는 파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내가 뭐라고 힐난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손수건 갖고 계신가요.”

    “뭐?”

    의미를 알 수 없어서 파이몬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나약한 미소였다.

    “앞으로는 부디 손수건을 상비하세요. 신사의 소양이랍니다.”

    “뚱딴지 같은 헛소리를…….”

    그때 파이몬이 격렬하게 기침했다. 불길한 기침소리가 연신 터지더니 그녀의 입에서 핏덩어리가 토해졌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땅바닥을 향해 각혈했다. 평범한 핏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침할 때마다 검붉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당황해서 녀석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것도 잊고 그녀를 부축했다. 잔뜩 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입구멍을 통해 나와도 괜찮은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파이몬이 내뱉는 것은 더 이상 기침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비명이 섞여 있었다.

    “어, 어이. 왜 그래? 이게 뭐야.”

    “마나 역류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어느새 바르바토스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혀를 쯧쯧 차면서 말했다.

    “마법사에겐 죽을병보다 무서운 놈이지. 서클이 주기를 벗어나서 지 멋대로 날뛰는 건데, 서클이 많은 고위 마법사일수록 존나 좆같이 꼬여버려. 지금 저 년 몸안에선 일곱 개의 서클이 광란의 연회를 벌이고 있을거다. 쯧. 병신 같은 년.”

    바르바토스가 지극히 싸늘한 눈초리로 파이몬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전부 이해했는지 몰라도 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젠장, 쉽게 좀 말해! 마나고 서클이고 난 하나도 모른다고!”

    “한마디로 마법사 인생 쫑 난 거야. 이천 년 동안 수련해온 게 한방에 날아간 거지.……인간이었다면 진즉에 시체가 되고도 남았어. 뭐, 저딴 고통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뒈지는 편이 낫겠지만. 오장육부가 쌩으로 난도질 당하는 느낌일걸.”

    “무슨…….”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마법사가 아닌 나로서는 체감하기 힘들었지만 그게 보통 사태가 아니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요컨대 전사로서 살아온 이가 팔다리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얘기 아닌가.

    아연실색하는 와중에, 나의 팔에 안긴 파이몬이 재차 피를 토했다. 내 옷이 그녀의 검은 피로 흥건해졌다. 혈향이 코를 가득 메웠다. 인간의 내장과 다르게 악취라곤 전혀 느끼지지 않았다. 오로지 피냄새뿐이었다.

    “도대체 왜…….”

    “몰라. 성녀인가 뭔가하는 년이랑 밀약할 때 서클을 내걸고 맹세했나보지. 그래서, 어쩔 거야?”

    어쩌긴 뭐를? 내가 시선으로 물었다. 입밖으로 의문을 낼 여유가 없었다. 품안에서 누군가가 실시간으로 내장을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머리상태를 냉정하게 유지하기가 버거웠다.

    바르바토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창년이 너 물 먹인 거 확실해졌잖아. 뭣하면 여기서 즉결처분해도 괜찮은데?”

    “즉결처분이라니. 산악파의 반대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단호한 목소리였다.

    “며칠 전에야 증거가 없다니까 넘어갔어. 하지만 이젠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증거가 손에 들어왔다. 단탈리안, 너는 고작 서열 제71위에 불과하지만 대표연설자로 발탁된 순간에는 월맹군 자체를 대신하게 된 거야. 즉 너를 모함한 시점에서 파이몬은 월맹군을 배신한 거다.”

    “…….”

    “이건 나 혼자의 뜻이 아니야.”

    그녀가 턱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르바스와 가미긴을 비롯하여 최고위 마왕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 가미긴. 마르바스 영감까지 동의했어. 제아무리 영감이 중재자 역할을 고집한다 할지라도 이건 너무 명확하거든. 다만 조건을 내걸었다. 단탈리안, 바로 너의 선택에 모든 걸 맡기겠다는 것이다.”

    바르바토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는 더없이 무정했다. 재촉하거나 애원하는 기색 없이 그녀는 단지 조용히 이쪽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배신당한 것도 너고, 구해진 것도 너다. 판단할 당사자도 어디까지나 너야. 네가 파이몬을 처단하기를 원하면 당장이라도 내가 이 년의 모가지를 따버리겠어.”

    “…….”

    “단탈리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특별히 설명해주지. 이건 절호의 기회야. 지금 기회를 놓치면 파이몬을 처단할 가능성이 낮아져.”

    왜, 라고 소리내어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조곤조곤 이유를 말했다.

    “파이몬 입장에서 변명할 거리가 생기거든. 성녀와 밀약을 맺은 것도 다 적군을 혼란에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성녀가 이쪽을 믿어서 널 모함할 때, 짜잔 하고 파이몬이 등장하여 성녀를 규탄. 결과적으로 인간군의 사기를 대폭 깎아버린다. 그런 시나리오가 생겨버려.”

    파이몬의 산악파는 비록 공개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혐의를 벗지도 못했다. 그래서 월맹군의 선봉에 나서는 것이다. 무죄를 입증하고 싶다면 손수 피를 흘려서 증명하라, 그런 결론이었다.

    여기서 파이몬이 아군을 위해 자신의 마력까지 포기하면서 적을 속였다. 시나리오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산악파는 완전무결하게 무죄 판정을 받게 된다. 선봉에 섰을 뿐더러, 파벌의 대장이 희생했다. 더 이상 무엇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가.

    아직 누구도 그런 시나리오를 주장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진실은 단 하나, 파이몬이 적과 내통했다는 것뿐이었다. 파이몬을 처단하려면 지금이 호기……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를 기회…….

    “선택은 네 몫이야.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파이몬을 죽이는 게 이득일까. 아니, 하지만 애당초 파이몬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나를 도왔는가.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동정심이라도 느끼리라 기대했을까. 제기랄, 그래. 동정심은 느껴진다. 눈앞에서 시뻘건 내장을 토해내는데 일말의 동정심이 없다면 거짓이다.

    동정심이 느껴진다고 해서 나는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다……그럼에도, 동정심이 아니라, 순전히 파이몬의 행동에 너무나도 큰 의구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파이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항, <던전 어택>과 이 세계를 통틀어서 여태껏 몰랐던 점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절호의 기회인가. 아니면 의문의 해명인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겠지. 그렇다면 어느 선택지가 후회를 덜 남기느냐가 문제이다…….

    “나는…….”

    내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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