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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20화 (120/510)

00120 가장 긴 십오 분  =========================================================================

“……확실히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내 혀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머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가만히 과시할 정도로 혓바닥을 얌전히 키우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마는, 얘기를 들어보니 저 자는 노예상인이로군. 사람을 잡아다가 파는 자. 그런 자를 대접해준다는 것은 오히려 민중에 대한 이반일 터. 민중을 위한다는 성녀가 노예상인을 두둔하다니 놀랍구나.”

그래. 잘 말했다!

여기서 저 마법영상이 조작이 아니냐고 발뺌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다. 무슨 수로 로리타라는 가명을 나에게 이어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저리 당당하게 나오는데 진실을 입증할 수단 정도는 마련……잠깐만.

어떻게 로리타가 나인 줄 알았지?

나는 철저하게 가명을 썼다. 라우라한테는 이름을 밝혔지만, 잭한테 내가 단탈리안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단지 인상착의만 갖고 나인 것을 알아냈다고? 불가능하다. 난 한낱 이름없는 마왕에 불과했다. 조사할 방도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

파이몬.

‘네 년인가.’

사고가 찰나에 마비에서 벗어났다. 머리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래, 라피스가 말해주었다. 파이몬이 나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으고 있다고.

잭 올란드. 저 녀석의 아비는 분명히 사르데냐 왕국을 주름잡는 거부라고 했다. 재력을 총동원해서 로리타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보고 있었겠지.

파이몬, 잭의 아비, 두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투자해서 나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그때 양측의 정보선이 맞닿았다. 그랬는가.

파이몬은 내가 흑사병을 퍼트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때 내가 약초상인으로 둔갑해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블랙 허브를 미끼로 용병길드 등을 회유해서 도시에 화재를 일으켰다……파이몬 입장에서, 나는 흑사병을 퍼트린 후에 블랙 허브를 가져다쓰며 마음대로 활보하는 자로 비추었겠지. 멍청한 년이!

“물론 당신이 한 청년을 잔인하게 고문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

좋다. 너의 그 공격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성녀 그라시아.

마왕으로서의 잔혹한 이미지를 광고한 다음에 흑사병의 건을 나한테 덤터기 씌울 셈인가. 거기에 파이몬이 지금까지 쌓아둔 증거를 갖다댈 생각이냐. 젠장, 끝내주는군. 기가 막힌 원투펀치이다.

안 된다. 흑사병 건으로 이야기를 길게 끌고가서야 나한테 득이 될 게 없다. 대중에게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흑사병에 대한 의혹을 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설전에서 불리해진다. 흑사병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민중이다. 그들의 어그로를 끌어버린다.……저 영상을 부정해야만 한다……어떻게?

‘조작했다고 공격하자.’

안 된다. 아티펙트가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해보자고 나오면 어쩔 텐가. 나는 마법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아티펙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내는 마법적인 절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자신만만하겠지.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역공을 받아버리면 정말 기세를 빼앗겨버린다.

‘내가 아니라고 발뺌해.’

저건 내가 아니라 나를 연기한 누군가의 짓이다. 이 세계엔 폴리모프 마법이 있다. 나를 똑같이 연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 아티펙트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밝혀내는 마법이 있을지라도, 그 아티펙트가 투영하는 인물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밝혀내는 마법까지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군에서는 고작 나 한 사람을 물 먹이겠다고 폴리모프 마법을 동원, 이렇게 당대한 거짓말을 꾸며냈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대표연설자로 누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나 하나만을 저격했다고?

파이몬이 인간군에 정보를 흘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당장 이 자리에서 입증할 방법이 없다! 억지 논리가 되어버린다. 나에게 진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가 된다……제기랄, 이런 불합리한 상황이 다 있나!

“우리는 단탈리안, 당신이 흑색 허브의 효능을 최초로 발견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장부에 따르면…….”

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러나 속으로 필사적으로 수단을 고안하고 있는 사이, 성녀 그라시아는 제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상하던 바 그대로였다. 쿤쿠스카 상회라느니 뭐니, 뻔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하. 파이몬은 쿤쿠스카 상회의 오랜 고객이다. 상회에 연줄이 있겠지. 그걸로 장부 등을 빼돌려서 저들한테 넘겼다……저 년, 진짜 작정하고……아니. 파이몬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분산시킬 여력이 부족하다.

‘저 장부가 거짓이라고 말하자.’

안돼, 똑같은 논리로 각하다! 마법으로 확대된 저 장부들에는 빼곡하게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필기체로 적혀 있다. 쿤쿠스카 상회와 내가 계약한, 블랙허브 농장에 대한 건이다. 저만한 문서를 설전이 시작한 직후에 전부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여기서 조작이라고 말해봤자……'당신이 대표연설자라는 것도 모르는데, 오로지 서열 제71위인 당신을 모함하기 위해 이만한 조작을 했다는 소리입니까'라는 식으로 받아치겠지. 그걸 어떻게 우길 방도는 없는가? 마법으로 조작했다고……아니, 서류에 마법이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 검증하는 마법이 또한 있지 않을까?

어떡할까.

흑사병 건을 계속 부정하기란 쉽다. 그냥 전부 네놈들 조작이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며, 아무튼 아니라고 잡아떼면 된다. 하지만 저 정도 증거들을 본 대중은 어찌하는가. 나를 믿어줄까? 바로 앞에서 잭 올란드를 잔인하게 고문한 나를?

아니면 성녀의 말을 믿을 텐가.

답은 분명했다. 당연히 성녀의 말을 신뢰하기 마련이다! 젠장, 잭 올란드!

“당신은 흑사병을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전염병이 퍼지기도 전에 치료제를 알아냈다는 것, 심지어 대륙의 약초길드를 총동원해서 치료제를 수집했다는 게 무엇보다도 명백한 증거입니다. 당신이 흑사병을 일으킨 주범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병의 특효약을 알았겠습니까?”

“…….”

“당신은 병을 창궐시키고 그걸 기회로 삼아 이득을 챙겼습니다. 지금도 대륙의 만민이 흑사병에 신음하며 죽어나가고 있습니다……당신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륙을 희생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군. 어떻게 그런 전염병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 주제를 얼른 끝내야 한다.

……그래. 여기서는 다시 한번 인신공격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라시아 성녀의 치부를 낱낱이 밝혀서, 그녀가 당황한 틈을 타, 이번 건을 알게 모르게 묻어버리자. 나에 대한 의심은 어쩔 수 없이 남겠지만 그래도 상황은 반전시킬 수 있다…….

그때였다.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섰다. 이 난리의 주범, 파이몬이었다.

“너…….”

하마터면 그녀에게 쌍욕을 날릴 뻔했다. 설마 이 녀석,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몰아세우고 저편의 성녀를 두둔할 속셈인가. 그러면 정말로 끝장이었다!

마왕이 같은 마왕을 범인이라 지목하는 것의 파장은 어마어마하리라. 하지만, 그럼 파이몬 너는 빼도 박도 못하고 평원파의 적이 되는 것이다……그런 리스크를 감당하면서까지 나를 몰락시킬 거냐.

현명하지 못하다, 파이몬! 산악파의 미래를 생각해라! 너는 마왕군 최대 파벌의 우두머리겠지! 당장 네 년의 계략에 물을 먹인 내가 얄밉더라도 그딴 감정 때문에 대국을 그르쳐서야 우군(愚君)을 뛰어넘어 암군(暗君)이다.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못 챘는지, 파이몬이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내놓은 물건은 전부 조작되었어요.”

그녀가 내뱉은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상대편 성녀도 놀라서 눈이 커졌다. 나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정황상 파이몬과 성녀는 서로 밀약을 나눈 게 확실했다. 파이몬은 자료를 건네주고 날 대표연설자로 세우며, 성녀는 준비된 자료를 쏟아내서 날 매장해버린다. 그런 것 아니었나?

“……조작이라니. 이 분량의 증거가 전부 조작되었다는 말입니까?”

“예. 전부 조작이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한낱 개인이 대륙을 풍비박살 내는 전염병을 창조하겠사와요?”

파이몬이 작게 웃었다.

“더군다나 여기 단탈리안은 서열 제71위. 마왕 중에서도 가장 약하답니다. 그런 자가 흑사병을 마음대로 제조해낼 수 있다면 이미 대륙은 우리 마왕의 손에 들어왔겠지요. 저는 서열 제9위의 마왕 파이몬. 여기서 선언하건대, 단탈리안에겐 그런 능력이 전혀 없사와요.”

“…….”

그라시아 성녀가 파이몬을 노려보았다. 약속한 것과 다르다. 그런 시선이었다.

파이몬은 여유만만하게 웃고만 있었다. 나는 도저히 파이몬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일단 그녀가 나를 옹호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위장전법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와 나는 적이니까.

성녀가 말했다.

“……어차피 마왕이 마왕을 두둔하는 꼴. 당신의 말을 신뢰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애시당초 위증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위증일 수 있습니까?”

“일단 단탈리안이 인간을 고문하는 영상부터가 조작이와요. 저기 나온 인물이 진짜 단탈리안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요?”

성녀가 코웃음쳤다.

“목소리도 똑같고 용모도 똑같습니다. 의심할 건덕지 따위는 없습니다.”

“폴리모프 마법을 쓴 거겠지요.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용모로 완벽하게 둔갑하는 마법이 가능합니다. 7서클 원소술사인 저 역시도.”

파이몬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녀가 세 문장 정도 되는 길이의 주문을 외우자 붉은 빛이 그녀를 감쌌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든 그 자리에는 파이몬이 아니라 성녀 그라시아가 서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용모를 배끼는 일이 가능하지요.”

그라시아 얼굴을 한 파이몬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다시 팔을 휘저어서 마법을 해제했다.

“인간계에도 저만한 마법사는 꽤 많사와요. 제 추측을 말해볼까요. 당신들은 마법사를 동원해서 단탈리안의 얼굴을 한 배역을 준비했어요. 적당한 숲속에 들어가서 연극을 펼쳤겠지요. 그게 진실이랍니다.”

“그럼 당신들이 단탈리안을 대표연설자로 세우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어야만 하겠군요!”

성녀 그라시아가 소리쳤다.

“설마 배역을 찾고, 마법을 장만하고, 영상까지 찍는 이 모든 과정이――고작 하루이틀 안에 끝날 일이라고 주장할 셈입니까! 저 자가 모습을 드러낸 지 한 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한 시간 안에 이 모든 자료를, 마법 아티펙트와 서류장부를 전부 마련한 것인가요?”

그녀가 조소를 뱉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마왕들이 어떤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지 아주 잘 알았습니다.”

내가 예측한 반론이 똑같이 튀어나왔다. 맞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저 증거들이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그렇다고 저 증거들이 가짜라고 공격할 수도 없다. 즉석에서 지어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고 분량이 많으니까.

진퇴양난이었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그저 억지스럽게 자기 변호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왜 이제 와서 파이몬이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그라시아의 논리를 이겨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나는 파이몬을 돌아보았다. 대체 어쩔 생각이냐? 이건 네 녀석이 짜놓은 함정이잖냐. 나를 두둔해봤자 행여나 감읍해서 고마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아하, 그런가. 이렇게 날 도와주는 척해서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게 계획이군.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미련한 수법이다. 그런다고 바르바토스와 내가 널 봐줄 것 같은가. 어리석다.

파이몬이 입을 천천히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여러분은 오래 전부터 자료를 조작했사와요.”

“하. 우리한테 예언력이 있다는 겁니까? 단탈리안이 마왕군의 대표연설자로 나올 거라고 미리 예측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웃기는군요.”

“물론 여러분께는 예언력이 없지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이 대표연설자로 나올 거라는 정보는 미리 갖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바로 저,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이 그 정보를 여러분께 몰래 드렸으니까요.”

내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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