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19화 (119/510)
  • 00119 가장 긴 십오 분  =========================================================================

    그 순간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프랑크 제국 병사 미셸의 호감도가 13 올랐습니다.」

    그것이 기점이었다.

    「바타비아 공화국 병사 니콜라의 호감도가 30 올랐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 귀족 알렉산더 폰 바이에른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샤르데냐 왕국 병사 파비아의 호감도가 11 올랐습니다.」

    …….

    눈앞에 푸른 쓰나미가 밀어닥쳤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호감도가 올랐고, 누군가의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알림창이 넘쳐났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도 아니었다. 상태창이 수천, 수만 갈래의 파도가 되어 밀어닥쳤다.

    띠리링, 띠리링, 하는 효과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알림창들은 순식간에 평원을, 내 양옆을, 마침내 하늘까지 뒤덮었다. 그 압도적인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확신했다. 지금, 역사라는 이름의 거인이 한걸음 나아갔다.

    등골에서 쾌감이 저릿저릿했다. 온몸이 흥분되었다.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고양감이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자그마치 십 만의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느낌이 심장을 달구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배할 때만 느끼는 충만이었다.

    「시나리오가 예정된 운명의 조각을 파괴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B급 시나리오 <만인의 희망을 짊어진 자>가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A급 시나리오 <왕당파와 공화파의 동맹>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퀘스트를 깨는 자(Quest Breaker). 라우라의 노예각인을 지워버린 이후 다시 보는 이벤트였다.

    만인의 희망을 짊어진 자는 굳이 숙고할 필요도 없이 엘리자베트 황녀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황녀는 귀족과 평민, 노예, 실로 만민의 희망을 등에 짊어지고 일어선 제왕이었다. 제왕으로 향하는 그 길이 이제 가로막혔다……훌륭했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동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약간 애매했다. 프랑크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가. 어느 쪽이든 인간계가 단합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나는 해낼 수 있다.’

    마음이 떨렸다.

    서열 제71위의 마왕. 총합 능력치 100이하. 쓰레기 중의 쓰레기. 무력으로는 시골 마을의 일개 나무꾼에게도 당해내지 못하는 캐릭터. 그런 몸뚱어리로 여기까지 끌고왔다……훗날 대륙의 패자가 될 엘리자베트 황녀를 좌절시켰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단탈리안이!

    ‘어떤 영웅이든 오기만 해봐라.’

    나는 <던전 어택>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의 흥망성쇠를 죄다 꿰뚫고 있다. 세상에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마음만 따지자면 어디 하나쯤 부러진 절름발이다. 대륙 최강의 소드 마스터이든, 나중에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을 통합시킬 여왕이든, 암살자의 군주이든, 약점은 있다.

    그래서 평원 저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도 나는 여유로웠다.

    “……마왕 단탈리안. 무시무시한 언변입니다.”

    인간측에서 대표연설자를 새로 보낸 것일까. 하긴 이대로 전투를 시작했다가는 마왕군이 유리할 게 뻔했다. 인간군도 필사적으로 사태를 무마하고 싶겠지. 과연 누구를 다음 타자로 내보냈을지 궁금했다.

    알림창을 일거에 꺼트렸다. 그러자 푸른 장벽이 사라지고 상대방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예복을 입은 여자였다. 머리카락이 회색이었다. 나는 그녀가 성녀 그라시아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게임에선 주인공 일행에게 허구한 날 퀘스트를 내려주는 NPC인데, 여신의 뜻이라면서 푼돈으로 주인공을 부려먹는지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예컨대 오우거 대군을 토벌하라면서 보상으론 고작 아이템 하나밖에 안 준다. 성녀라는 직함을 이용해서 용사를 거의 공짜로 부려먹는 것이다.

    <던전 어택>에서 용사는 고아 출신에다 용병단원이다. 여타 RPG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세상사에 빠삭했다. 주인공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가열차게 항의했다. 그러자 그라시아 성녀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대꾸했다.

    ‘제 고귀한 얼굴을 접견하는 영광을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대단한 보상은 없겠지요?’

    ……유저들이 그녀를 성녀가 아니라 마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뭐, 여신의 축복을 받아 백 년 넘게 이십 대의 미모로 살아가는 양반이니까. 확실히 평범한 인간 입장에선 만나는 것만으로도 영광일지 모른다.

    그나저나 성녀를 다음 타자로 보냈는가. 좋은 선택이다. 민중에게 사제, 특히 성녀란 경외의 대상. 귀족들의 위신이 무너진 이상 성녀만큼 현재 인간군을 잘 다독일 자는 없겠지.

    “이거. 성녀 그라시아, 여신께 사랑받는 존재 아닌가. 귀하신 분께서 어찌 험난한 전쟁터에 나왔는고.”

    “……신께선 지옥이란 인세에 있나니 성직자는 언제나 가장 낮은 바닥에 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 저에게 이곳만큼 어울리는 장소는 없습니다.”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안다는 것에 그라시아는 눈썹을 쨍그렸지만 순탄하게 대응했다.

    “마왕 단탈리안이여. 그대의 실력은 잘 보았습니다. 언령(言靈)에 마법을 실어서 상대방을 홀리다니. 설마 황녀 전하의 정신에 타격을 입힐 정도로 고강한 마법을 쓸 줄이야……대단하군요.”

    “호오.”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

    “내가 한 말이 거짓이었다, 이 말인가.”

    “예.”

    정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잘도 말했다. 권위 높은 성녀가 단언한 것이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친족살해의 의심을 벗어재낄 순 없겠지만 적어도 공공연히 비난받는 일은 적어지리라. 신전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철면피에다 무표정. 그러면서 이쪽의 약점을 파고든다. 내가 게임상에서 기억하는 성녀 그라시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훌륭하다. 하지만 성녀여, 잘 선택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언어도단이다.”

    “또다시 언령의 마법을 쓰는군요. 뭐라고 속삭여도 여신께서 저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사악한 수작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크흐.”

    계산된 조소가 아니었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차피 사제도 제1계급. 여차할 때는 귀족의 뒤를 봐주는가. 이런, 자칫하다 마왕인 나마저 세상에 절망할 판국이도다. 겨우 한 겹의 기만이다. 그 한 겹을 벗기 위해서 인류는 얼마나 더 많은 비극과 얼마나 더 많은 피를 자아내야 하는가.”

    “……기세가 좋은 것도 지금뿐입니다, 마왕.”

    그녀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자그마한 단추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까?”

    “……?”

    내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저런 소품을 꺼내들었을까. 설전의 방향이 짐작가지 않았다. 혹시 물건을 비유로 삼아서 무언가 멋들어진 명언이라도 내뱉을 속셈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의 연설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한번 간을 봐볼까…….

    “글쎄. 나에겐 생소한 물건이로군.”

    “저에게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인 물건입니다. 왜냐하면 매우 고가의 아티펙트이기 때문이지요. 대륙의 거부들이나 장만할 수 있습니다.”

    성녀가 손바닥에 단추를 올려서 펼쳐보였다.

    “여기에 걸린 마법은 메모리아. 주변의 풍경과 소리를 입체적으로 저장하는 아티펙트입니다. 마법 자체가 고난이도 마법일 뿐더러, 그걸 겨우 이만한 크기의 물품에 구현해야만 합니다.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감히 만들지도 못하지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물건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을 꺼내들었는가.

    “성녀여. 나는 마법 강의를 들으러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재촉하지 마시길. 마왕, 이 물건은 새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용이 끝났지요. 누구의 것인지 도저히 짐작가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마왕이지만 가난뱅이라서 말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값비싼 물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음?”

    그라시아 성녀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 아버지에겐 아들이 한 명 있었지요. 재능은 있지만 미숙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상을 경험시킬 겸해서, 약간 억지로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어찌 아비가 자식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아들에게 이 메모리아 아티펙트를 선물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요.”

    “…….”

    “불행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타지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인은 의문사. 도적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것인지, 아들은 숲의 가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아들은 현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을 잊지 않고, 최후의 그날 메모리아 마법을 가동한 것입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자신이 왜 죽었는지 증거를 남겼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아들이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있었지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라시아 성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아들의 이름, 잭 올란드.”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불안감이 명확한 정의가 되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 빨갛고 검은 것은 순식간에 두개골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뇌수를 채웠다.

    잭 올란드.

    노예상인, 잭――.

    그 멍청한 순둥이의 이름이, 어째서 지금 등장하는가?

    성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이쪽을 꿰뚫어보았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하고도 조금 전. 사르데냐 왕국의 북부 도시 베르니아에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용병길드를 주축으로 해서 일어난 사건이었지요. 도시에 화재가 크게 일어났고, 많은 시민이 인명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설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어린 아들, 잭 올란드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베르니아 근처의 숲이었습니다. 큰 바위에 몸을 기대고 죽어 있었지요. 바위에는 잭 올란드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등으로 가리고 있던 바위에는 붉은 피로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복수를(di vendetta)'.”

    등골에 전류가 내달렸다.

    시체 뒤편의 바위에――글자가 써 있었다고?

    잭은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자살했다. 나에게 반항할 수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신념을 욕보이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자살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체를 내버려두었다. 경의를 표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그뿐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죽는 순간에 다잉 메세지를 남겼단 말인가!

    잭 올란드――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가!

    “무엇을 위한 복수일까요. 당연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시체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단추로 위장해서 상의에 붙여놓은 메모리아 아티펙트도 건재했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아버지는 마법사를 고용하여 아티펙트를 해독했습니다.……마왕 단탈리안. 아니, 약초상인 로리타.”

    “……!”

    “이것이 그 최후의 광경입니다.”

    성녀의 손바닥에 올려진 아티펙트로부터 화면이 생성되었다.

    그 화면은 마왕군과 인간군, 양측에서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 끄허, 끄하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먼저 영상에서 새어나온 것은, 찢어질 듯한 비명.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비추었다.

    ─ 끅! 끄허어어어억! 끄하아악! 끄아, 끄하아아아아악!

    ─ 하아, 잭……정말로 안타깝게 됐어.

    ─ 크프으읍! 끄으윽! 로리타!? 로리타흐으으윽!?”

    ─ 나는 너한테 세 번을 제안했어. 세 번의 제안은, 정말로, 무척이지 관대한 거야. 거부해서는 안 될 제안이기도 했고.

    그리고……나의 모습이 비추었다.

    화면 속의 내가 잭을 발로 밟았다.

    ─ 아픈 건 알겠는데 너무 시끄럽잖아. 잭! 잭! 내 말 들리지? 그렇지? 조금 조용해줬으면 해. 여기가 시끄러워서 좋을 거 하나 없거든. 잭! 그만 닥쳐! 만약에 내 부탁을 무시한다면 이번에는 왼쪽 어깨를 잘라버리겠어. 알았어? 네 왼쪽 어깨까지 썰어버리겠다고.

    ─ 끄윽, 흐으윽……끄흐으윽……!

    ─ 아주 좋아. 훌륭해, 잭. 바로 그거야. 그렇게만 하면 더 이상의 출혈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풍경이 흘러갔다.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생각을 바꿔봐. 잭, 간단한 논리야. 왜 상대방이 정식으로 상인길드에서 거래하는 것을 거부했을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왜냐하면, 하고 곧바로 논리가 성립하지.

    ─ 정식으로……거래할 수 없는 신분……?

    ─ 바로 그거야. 사실 도시에 제대로 출입하기도 힘들지.

    ─ 상인이 아니었구나……로리타!

    ─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

    ─ 예.

    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고문이 이어졌다. 불고문, 비명, 협박. 정상인이라면 차마 눈에 담기 어려울 광경이 계속되었다. 화면 속의 나는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했다. 팔 하나를 잃은 잭이 땅바닥을 구르면서 울부짖었다.

    ─ 전염병을 치료하는 약제가 있다는 것도, 큭! 전부 거짓말이었어!

    ─ 그랬어! 그랬던 거야! 경매소에서 몬스터를 소환한 것도 네 새끼였어!

    ─ 그건 맞아. 인정하지.

    ─ 도시에 불을 지핀 것도!

    ─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 어디에선가 고함을 질렀다. 이 사태를 방관해선 안 된다고.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한다고. 그러나 그 고함은 너무나 아득했다.

    ─ 자네가 요 1분 동안 내민 의견을 종합하자면 나는 악마에다 사기꾼이고 천하의 쌍놈이자 미친개자식이며 지옥에 떨어질 후레자식이군. 전적으로 인정하겠어.

    “……메모리아 마법은 여기까지입니다.”

    영상이 꺼졌다. 그라시아 성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시에 불을 지르고. 거짓말을 일삼고. 잔악무도한 고문을 거리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마왕.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물 중의 괴물, 금수 중의 금수.”

    “…….”

    “그것이 당신의 정체입니다, 마왕 단탈리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한 가지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끊임없이 멤돌았다. 한 노예상인의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잭…….

    잭.

    잭, 올란드!

    네놈이 나의 적이었는가.

    대륙의 패자 엘리자베트도 아니고――대마왕 바알도 아니고, 게임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네놈이, 한낱 애송이 낭만주의자에 불과한 네깟 녀석이――.

    네놈이, 나 단탈리안의 적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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