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18화 (118/510)

00118 가장 긴 십오 분  =========================================================================

내가 작게 웃었다.

뭐라고 할까. 궁지에 몰린 토끼가 필사적으로 앞니를 내세우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저렇게 다짜고짜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은 그녀의 화법과 거리가 멀었다.

“열국의 장병들이여!”

그녀가 내 웃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저 자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지어다. 그대들 모두 괴물의 사악한 이빨에 부모를, 친구를, 동지를 잃어본 적 있지 않은가. 저 자는 마왕이다. 괴물의 군주이다.”

여유롭게 기다렸다. 여기서 말을 끊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하책.

나는 지금 말싸움을 벌이는 게 아니다. 연설을 하는 것이다. 대중을 끌어들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연설 내용이 아니라 연설자 본인의 태도이다. 상대방의 말을 일일이 끊어서야 자기 이미지에 타격을 준다. 적당히 들어주고, 그후에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그것이 상책이다.

“저 자는 말했다. 마왕군이 민중을 죽이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이만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이천 년 전에 대륙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은 누구였는가? 천팔백 년 전,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은 누구였는가?”

황녀는 타고난 카리스마로 평원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름다우면서도 굳건한 목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 한명한명 사이로 목소리가 마치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천오백 년 전, 붉은 장벽 아래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칼을 휘두른 자들은 누구였는가? 천사백 년 전, 울름 평야에서 오우거 일만 마리를 향해 돌격한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바로 오늘. 십 만의 괴물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가족을 위하여, 아들을 위하여, 신을 위하여 이곳에 두 발로 선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엘리자베트 황녀가 팔을 내밀면서 소리쳤다.

“그렇다! 바로 그대들이다! 자랑스러운 열국의 아들딸이여. 용사들이여. 저 괴물들이 학살한 것은 언제나 민중이었다. 한 정의 밭을 일구어 평화로이 돌아가려 할 때 바로 저 괴물들이 마을을 침략했다. 한 아이의 어버이로서 사랑스럽게 웃고자 했을 때 바로 저 괴물들이 우리의 자식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살아가려 할 때, 바로 저 괴물들이 우리의 삶을 짓밟았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저들이 말한다. 자신들은 결코 민중을 위협한 적 없다고. 본녀는 그대들에게 묻는다.――정말로 그러했는가?”

사방이 고요해졌다. 황녀는 고개를 돌려 인간군의 일부를 바라보았다.

“보이오티아인이여. 본녀는 그대들이 오백 년 전, 바위투성이의 아울리스에서 오크 이만 마리에 맞서싸워 사흘을 넘도록 인간군의 방어선을 사수한 것을 기억한다. 그대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왕자, 페넬레오스가 그대들과 함께 언덕 아래에 잠든 것을 기억하노라.”

그녀가 시선을 돌려 다른 부대를 쳐다보았다.

“미뉘아이족이여. 본녀는 그대들이 이백 년 전, 비둘기의 고장 티스바이에서 삼만의 고블린 무리가 쳐들어왔음에도 단 오백 명으로 도시를 지켜냈음을 기억한다. 도시의 관리, 귀족, 평민, 노예,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오백 명은 하나가 되어 싸웠다. 인류는 그대들의 분투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

황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스플레돈인이여! 어떻게 그대들이 칠백 년 전에 보여준 그 전설적인 전투를 잊겠는가!”

그때부터였다.

황녀가 호명하는 부족과 도시의 부대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로크리스인이여! 고귀한 케피소스 강변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천칠백 년 전, 신성한 에우보이아에서 자그마치 용 두 마리를 물리쳤다. 천상의 여신들도 그대들의 위업에 감탄했노라!”

한 부대가 열광하며 로크리스 만세를 부르짖었다.

“아반테스족이여! 알페이오스족이여! 그대들의 영광스러운 분투는 아직도 고대공화국이 남긴 장성의 돌벽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본녀는 여섯 살 때 장성의 돌벽을 만지면서 다짐했노라. 여기 적힌 이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하겠노라고. 아드라스토스, 메네스테우스, 엘레페노르, 스튀라, 오푸스, 스카르페, 아우게이아이, 타르페――.”

그녀가 정말로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그녀가 부른 이름이 열 명이 넘어서자 한 부대의 인간군이 함성을 질렀다. 그녀가 부른 이름이 스무 명이 넘어서자,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녀가 부른 이름이 서른 명, 쉰 명이 넘어서자――어느새 인간군 전체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대륙이여!”

황녀가 소리쳤다.

“과거에 수만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던 그대들이 이제는 합스부르크인, 프랑크인, 브르타뉴인, 바타비아인, 튜튼인, 카스티야인, 사르데냐인, 아나톨리아인, 모스크바인, 칼마르인, 버니시아인이라 불린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원래 우리는 하나였다!”

그녀가 등을 돌렸다.

마왕군을 향해서가 아니라, 인간군을 향해서 말했다.

“때때로 우리는 분열했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를 원망했고, 서로를 죽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였다. 저 괴물들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대지를 짓밟고, 우리의 가족과 동료를 죽일 때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가 되어 투쟁했다! 경멸과 증오조차 우리를 막아서지 못했다. 오우거의 억센 이빨조차 우리를 막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최후의 순간까지 기꺼이 인간으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황녀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화려한 레이피어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오늘 이날, 다시금 인류가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했노라. 적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또한 간악하다. 그들은 우리가 분열해야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를 분열하고자 사악한 거짓을 흩뿌린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였음을!”

그녀가 검을 치켜세웠다.

“이천 년 동안 저들은 무수히 많은 계략을 동원하여 우리를 분열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였음을!”

십 만 명의 인간이 창날을 공중으로 뻗으면서 환호했다.

“오늘 저들은 또 다시 한번 우리를 분열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오늘 역시 하나일 것임을! 후세는 우리를 기억해줄 것이고, 그리하여 이천 년이 흐르고 다시 한번 이천 년이 흘러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의 인류로서 존재하리라!”

황녀가 검날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은발이 싹둑 잘려나갔다. 그녀는 왼손에 은발을 움켜쥐고 외쳤다.

“나,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맹세한다. 오늘 펼쳐질 수호전쟁에서 언제나 선두에 설 것임을. 그대들이 괴물의 무자비함에 무릎을 꿇고 절망적인 눈으로 앞을 바라볼 때, 바로 그곳에 본녀가 서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인류의 강함에 의문을 품고 무기를 손에서 놓으려 할 때, 바로 그 옆에서 본녀가 그대의 어깨를 잡아줄 것이다.”

그녀가 왼손을 놓았다. 은발이 허공에 흩날렸다.

“오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으리라. 인간의 핏물이 브루노 평원을 적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겠는가? 열국의 장병들이여! 그대, 자랑스러운 조상의 후손들이여!――오늘 다시 한번 저 간악한 괴물들에게 우리가 인간임을 본녀와 함께 증명할 텐가! 다시 한번 대륙의 역사에 남을 각오를, 그대들은 이미 끝마쳤는가!”

온 평원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군악대들은 일제히 북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박자도 음정도 필요없었다. 폐에서 토해낸 소리들은 하나가 되어 요동쳤다.

“…….”

나는 아까 전에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황녀는 토끼 따위가 아니었다. 스물일곱 살의 엘리자베트든, 열일곱 살의 엘리자베트든……그녀는 대륙을 호령하는 위인이었다.

현명했다. 황녀는 내 주장을 직접 물고늘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모든 사상 중에서 가장 인간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는 영웅주의를 꺼내들었다.

여기에 각 인간부대를 일일이 호명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고향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일깨웠다. 인간이 개인이 아니라 마을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시대이다. 고향에 대한 자긍심만큼 그들에게 단단한 것도 없겠지. 그걸 황녀는 훌륭하게 건드린 것이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광고하기까지 했다. 은발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자신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하고 물었다. 귀족과 함께 나아가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그녀를 믿을 것이냐고 질문했다. 병사들은 그에 환호성으로 응답했다…….

엘리자베트 황녀의 정치적 위치는 순식간에 상승했다. 이제 그녀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자가 될 자격이 충분함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설령 이번 월맹군이 끝나고 계급투쟁이 일어날지라도, 엘리자베트 황녀만큼은 민중의 지지를 잃지 않겠지. 다른 귀족들이 위험해질수록 황녀는 도리어 강력해질 게 분명했다.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가.

이 연설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청중의 어디를 공략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작 몇 분의 시간. 내가 연설을 시작하고 겨우 몇 분 남짓하는 시간에,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저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해버릴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천재.

그녀야말로 진정한 천재였다. 태어나기를 황제로 태어났고, 자라나기를 패왕으로 자라났다. <던전 어택>에서 마왕군이 패망한 것은 결코 용사 때문이 아니었다. 황녀가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 황녀야말로 틀림없이 최악, 최흉, 최강의 적이다.

─ 짝, 짝, 짝.

평원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짧게 끊어지는 소리가.

사람들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진심으로 감복했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무얼, 감출 이유가 없었다.

바로 나였다.

“대단하다. 과연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국이 마지막으로 낳은 영웅인가.”

“……비아냥거릴 속셈이라면 소용없다, 마왕. 우리의 의지는 단호하노라.”

“비아냥이라니!”

나는 진심으로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감복했다. 정말이다.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에 섰더라면 결코 저런 식으로 연설하지 못했을 거다. 당황해서 말을 버벅이거나 이십 만 병력 앞에서 창피를 당했겠지. 내가 장광설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뜬 홀로그램창에 연설문이 빼곡하게 적힌 덕분이었다. 반면에 황녀는 그런 속임수 하나 없이 즉석에서 연설을 읊었다. 훌륭했다.

안타깝게 되었다, 엘리자베트 황녀.

여기 선 사람이 나만 아니었다면 당신이 모든 영광을 거머쥐었을 텐데.

내가 싱긋 웃었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엘리제 누나.”

“누나……?”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엄하다. 본녀를 모욕할 생각이냐.”

이런. 기억나지 않는가.

하지만 아쉽지 않다. 대륙의 모든 역사를 머리에 저장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당신이다. 조금만 힌트를 주면 금방 기억해주겠지.

“옛날에 그대를 엘리제 누나라고 부른 소년이 있었다.……이래도 기억나지 않는가?”

“……!?”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들어서, 여린 소년의 표정과 목소리를 연기했다.

“엘리제 누나. 오늘은 어디로 놀러가는 거예요? 검은 사냥터요? 와아, 신난다! 저도 말을 탈 수 있을까요? 안 돼요? 기대했는데……누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참을게요. 그런데, 루돌프 형은 왜 저희랑 놀아주지 않는 걸까요?”

“무슨…….”

황녀의 눈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난공불락의 성벽이 서서히 무너지듯이. 천천히, 그녀의 철옹성 같던 얼굴이 벗겨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저 예쁜 입술에서 경악의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주고 싶었다.

세상에 약점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영웅. 그녀에게 유일하게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은――바로 어린 시절, 친오빠와 친동생을 자기 손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친동생. 즉 제4황자는 어리고 순수했음에도 정치적인 위험성 때문에 죽었다.

당신은 그것 때문에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아마 오늘 아침도 친동생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땀에 젖어서 깨어났겠지. 당신이 스물아홉 살이 되는 해, 주인공인 용사가 침대 옆에서 함께 잠들어준 그날, 비로소 당신은 악몽이 없는 밤을 처음으로 보내게 되니까.

오로지 이 세계에서 나만이 아는, 그녀의 유일무이한 약점.

“어, 누나? 그쪽은 사냥터가 아니잖아요. 에? 새로운 사냥터를 발견했다고요? 와아! 거기엔 뭐가 있어요? 멧돼지? 설마 유니콘이 있는 건 아니겠죠! 좋아요. 빨리 가요!……어떤가. 이래도 떠오르지 않는가?”

이제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황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들린다.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인간군의 병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황녀를 바라보고 있을 거다. 병졸들뿐만 아니다. 귀족들도 동요하리라.

나는 일부러 '루돌프 형'이라는 말을 썼다. 엘리자베트 황녀를 누나라고 부르고 루돌프 황태자를 형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사 년 전 숲속에서 의문사 당한 한 명의 소년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귀족들로서는 황녀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끼겠지.

내가 상냥하게 웃었다.

“저런.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가보군. 좋다, 특별히 자비를 베풀겠다.……엘리자베트. 사 년 전이다. 기억하는가? 그대가 아직 열세 살이었을 때다. 바람이 따스한 봄날이었지. 그대는 오랜만에 숲속에서 함께 말을 타자고 소년에게 제안했다.”

소년은 누구보다 자신의 누나를 신뢰했다. 의심 한점 없이 그녀를 따라서 숲속으로 갔다.

“하지만 사실 그대의 목적은 사냥이 아니었지. 응? 그렇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사냥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사냥감도 그만한 사냥감이 없었지.”

“……그만.”

“벚꽃이 아름다운 숲이었다.”

황녀의 표정이 굳었다.

“소년이 말에서 내려 감탄사를 내뱉었지. 누나! 너무 아름다워요! 이걸 보여주려고 절 여기로 데려왔군요! 와아,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봐요!”

“그만……더 이상의 모욕은 좌시하지…….”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버럭 소리쳤다. 황녀가 움찔했다.

“소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어. 기억나는가? 너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방금 전 연설에서도 자랑스럽게 떠벌리지 않았는가. 그대는 영원토록 기억한다고. 하, 이것이야말로 그대가 영원히 기억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고 뭔가. 세상에서 오로지 그대만이 아는 풍경인데 말이다!”

“아, 아…….”

“그래, 소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커졌지.……누나? 뭐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소년의 눈동자에서 나타났다. 그러건 말건, 그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양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것도 모잘라서――오러까지 동원했다! 소년이 그대를 보며 대단하다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푸른 오러를 내뿜으면서!”

황녀가 귀를 막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는 계속해서 떨렸다. 그 순간, 평원에 거대하게 자리하던 입체영상이 꺼졌다. 인간측의 마법사가 독단적으로 마법을 중단한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너희는 이걸로 끝내고 싶겠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이건 전쟁이다. 관두고 싶다고 해서 멋대로 관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소년이 말했지! 목구멍이 막혀서 식도를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숨소리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아파――누나, 아파――왜――왜……. 왜.”

나는 오 초의 간격을 두고 허탈하게 말했다.

“그게 소년이 마지막까지 내쉰 숨결이었다.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 자에게, 끝끝내 분노도 원망도 쏟아내지 않고……단지 왜냐고 물었다. 소년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게지. 왜 사랑하는 누나가 자신을 죽이는 것인지. 소년은 진심으로 누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알겠는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네 년은 더럽고 역겨운 쓰레기 살인자이다.”

침묵.

평원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환호를 지르던 인간, 황녀 만세를 부르짖던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의문과 혼란이 가득할 따름이었다.

이로써 엘리자베트 황녀의 정치적 입지는 대폭 줄어들었다. 내 생존을 가로막는 방해물 하나가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껏 인간계의 세력을 줄이려고 지금까지 생고생을 했는데 도리어 황녀한테 힘을 실어주게 되어서야 본말전도였다. 다소 무리하더라도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밟아두는 편이 좋았다. <던전 어택>에서 그녀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다소 안타까웠지만……뭐,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침통한 얼굴로 인간군을 향해 말했다.

“인류여. 민중이여. 이제 깨달았는가? 저것이 그대들이 환성을 보낸 귀족의 맨얼굴이다. 그대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으며, 뒤에서는 자신의 친동생마저 죽여버린다.”

내 목소리는 외로이 부르노 평원에 가라앉았다.

“천인공노할 일이도다. 노예도 부모를 사랑하며, 짐승도 자기 자식을 애정하노라. 자신의 가족조차 살해하는 금수가 어찌 감히 인류를 논하는가…….”

============================ 작품 후기 ============================

91화에 황녀의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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