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가장 긴 십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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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이 조용해졌다.
비단 인간군뿐만이 아니었다. 월맹군, 마인들도 숨을 죽였다. 특히 단탈리안 뒤편에서 연설을 들은 다섯 명의 마왕――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 서열 제4위의 가미긴,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은 전원 침묵했다.
“와아. 말 잘한다아.”
가미긴의 느긋한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깨트렸다. 그녀가 어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쟤 연설 준비한 거 고작 이틀밖에 안 됐잖아. 대단해.”
“뭐, 말빨 하나는 확실히 먹고 들어가는 녀석이니까.”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저거 긴 연설문을 다 외우기도 벅차겠다.”
“의외로 즉석에서 지어낸 연설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폴리힘니아 여신에게 사랑받는 자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
“마르바스 영감, 그건 절대로 아니라는 데 전재산을 걸겠어. 만약 저게 즉석으로 지어낸 거라면 세상에 모든 연설가들이 혀 깨물고 죽어버릴걸.”
마왕들이 속닥거렸다. 그들은 대체로 단탈리안의 연설이 인간군을 훌륭하게 혼란으로 몰아넣으리라고 말했다.
마왕군은 대개 지휘관과 병사가 일심동체가 되어 싸운다. 그들이 자주 접하는 인간군은 검은 산성 수비군 혹은 변경백군이었는데, 이들도 내분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마왕군에게 군대 내의 내분은 꽤나 낯선 개념이었다.
마왕들이 대체로 계략이나 모략에 정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그들은 일치단결한 아군을 이끌고 역시 일치단결된 적군과 맞선다. 전술적인 차원의 속임수에는 누구보다 정통했으나, 상대편 군대를 내분으로 몰고가거나 정치적인 쪽에서 공략한다거나 하는 일에는 아무래도 미숙했다.
그러나 단 한 명.
“여러분은…….”
평소부터 인간에 관심이 다대했고, 마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과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 한 명의 마왕만은 사정이 달랐다.
파이몬이 격정을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여러분은, 저 연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건가요?”
“으응?”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미라니? 훌륭한 계책이잖아.”
“그것만이 아니에요! 저건, 혁명이와요!”
파이몬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인간은 마계사회와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마계에도 계급이 있지만, 순전히 실력에 의해 계급이 뒤바뀔 수 있지요! 고블린으로 태어나도 마법사로서 수양만 쌓으면 얼마든지 최고위 계급이 될 수 있사와요!”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였던 고블린 토르켈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는 고블린임에도 불구하고 재능과 노력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에요……혈통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려요! 설령 본연의 실력을 타고나서 기사가 된다 할지라도 그 한계는 기껏해야 훈작사. 핏줄을 뛰어넘을 수 없어요. 그런 인간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단탈리안이 지적한 거예요!……하!”
파이몬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랬나요……그랬던 건가요! 그래서 흑사병을 퍼트렸어요……인간계의 상위층에만 흑색 허브를 공급한 것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영을 영토로 삼은 것도, 몬스터 부락을 토벌한 것도……전부 이 순간을 위한 계책이었나요!”
그녀는 온몸이 싸늘해졌다. 단탈리안이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자신의 인맥과 재력을 동원하여 단탈리안에 대해 조사했다. 파이몬은 여기 있는 마왕 중에서, 심지어 바르바토스보다 단탈리안의 행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재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현명하다고 감탄했다. 이런 자를 섣불리 청문회에서 공격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퍼트리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 청문회는 너무나 이상했다. 단탈리안이 뭔가를 속삭인 직후, 쿤쿠스카 상회의 회장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뒤바꾸었다. 심지어 자신의 심복이었던 토르켈마저 자결했다.……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다.
지금 파이몬은 확신했다. 흑사병을 창궐하게 만든 자는 틀림없이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이었다! 그러나 흑사병 따위는 진정한 전염병이 아니었다. 진정토록 무서운 전염병은 방금 단탈리안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 전염병은 순식간에 온 대륙을 집어삼키리라. 그리고 수백, 수천 만의 인민을 사지로 내몰겠지. 그것도 자발적으로!
파이몬은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동시에 기뻤다.
지금까지 적의 충복이라고 생각해온 자가 사실은 자신과 비슷한 사상을 품고 있었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실. 이성적인 존재자라면 누구나 평등해야만 하고, 누구나 자신의 주인이어야만 한다는 것.
현명하게도 단탈리안은 직접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단어를 아꼈다. 그저 귀족에 대한 분개를 설파했다. 그렇기에 마왕들도 단탈리안의 연설은 단순히 '귀족과 평민을 분열하게 만드는 계책'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파이몬이 어찌 모르겠는가. 저 아래에 용암처럼 평등에 대한 사상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는 자신과 같은 자였다. 산악파의 마왕들조차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던 사상의 동지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급해졌다.
‘얼른 연설을 그만두게 해야 돼요!’
파이몬은 이번 대표연설에 계략을 심어두었다. 치명적인 계략을. 단탈리안이 그 계략에 빠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마왕들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단탈리안을 이쪽으로 불러들어야――.
“어이, 창년.”
그때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네가 혼자 정박아처럼 구는 건 상관없는데 말이야. 흑사병 단탈리안이 퍼트린 거 아니거든? 청문회에서 존나게 망신살 뻗었으면서 아직도 그러냐? 좋은 말로 할 때 의심하는 거 관둬라.”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와요! 무려 십오 만 명의 인간이 저 연설을 들었어요. 십오 만 명, 게다가 무장을 한 인민들이 말이예요! 당장 대륙의 역사가…….”
다시 열변을 토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파이몬이 알아차렸다. 네 명의 마왕은 지극히 무표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녀는 깨달았다.
‘제가……제가 단탈리안을 모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명백히 단탈리안에게 가장 적대적인 마왕이었다. 단탈리안이 처음으로 마왕군에 데뷔한 발푸르기스의 밤부터 현재 대표연설까지. 파이몬은 줄기차게 단탈리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흑사병 청문회 사건은 공식적으로 단탈리안의 무죄로 판결났다. 파이몬은 그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사과로 끝난 것만으로도 파이몬은 무척이나 관대한 처사를 받은 것이었다. 단탈리안에게 은혜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파이몬은 단탈리안을 곤경으로 몰아세웠다.
다른 마왕들 입장에선 저절로 '이제 그만 좀 하지?'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바르바토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단탈리안한테 대표연설자를 맡긴 거냐.”
“네?”
“단탈리안이 무슨 말을 하든 그걸 꼬투리 잡아서 힐난하려고? 하, 창년이 정신을 못 차렸네. 야. 우리 평원파를 우롱한 걸 적당히 봐주니까 이젠 아주 내가 핫바지로 보이냐. 진짜 한판 붙어볼래?”
파이몬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소녀는 그런 의도가――.”
“의도고 뭐고 가만히 닥치고 있어, 썅년아. 당장 네 년 모가지를 따버려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바르바토스.”
파이몬이 간절하게 라이벌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의 말을 믿어주세요. 단탈리안이 연설하는 걸 지금 당장 멈춰야 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그가 위험해져요.”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파이몬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말했을 텐데. 닥치라고.”
“…….”
파이몬이 고개를 숙였다. 평원파의 수장조차 설득하지 못해서야 가능성이 없었다. 단탈리안은 이대로 대표연설자로서 인간군 측의 연설자들과 맞붙게 된다…….
공교로웠다. 이 드넓은 평원에 모여든 이십 만의 인간과 마인 중에 오로지 두 사람,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황녀와 산악파 수장 파이몬만이 단탈리안의 저의를 꿰뚫었다. 단탈리안의 강적인 자들이 도리어 그를 이해한 것이었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때가 늦어버렸다. 단탈리안을 위험에서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연설이 모두 끝난 후에 단탈리안과 그녀는 완전히 원수로 돌아서겠지. 그가 곧 빠질 함정은 다름아니라 파이몬, 그녀가 파놓은 것이니까.
파이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더――조금이라도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간측의 대표연설자가 나온 모양이로군.”
“와아, 쟤 예쁘게 생겼다아! 누구야?”
“글쎄. 여자면서도 인간군을 대표할 만한 인물은 합스부르크의 황녀나 브르타뉴의 여왕뿐이니까. 아마 이 상황에선 황녀가 나온 거 아니겠냐? 햐아. 그나저나 정말 예쁘긴 예쁘다. 존나 꼴리네. 따먹고 싶다.”
“……바르바토스. 그대의 취향에 대해 왈가불가하고 싶진 않지만, 조금 더 말투에 위엄을 갖추는 게 어떤가.”
마왕들이 인간군 대표연설자의 미모에 대해 수군거렸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은발이 마치 여신의 머리카락처럼 찬란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마왕마저 황녀가 간직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파이몬만이 대화에서 제외되어 홀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단탈리안이 이 위기에서 현명하게 벗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함정을 마련해놓은 장본인이 빌 소원은 아니었다. 파이몬에겐 그러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 * *
엘리자베트 황녀가 거대한 영상체가 되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세 번째 황녀로 태어나 훗날 제국의 여황제가 되고, 대륙의 절반을 정복하는 패왕으로 거듭난다. 군사와 정치, 결투와 계략, 민심과 외교. 어느 것에나 정통한 천재. <던전 어택> 팬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최고의 히로인으로 인정한다.
그녀가 없었다면 주인공인 용사는 일개 힘 좋은 장정으로 살다 죽었겠지. 이 시대에 가족과 마을을 잃은 민초의 신세란 가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주인공은 화전민 출신이다. 노예나 마찬가지이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그런 주인공을 오직 재능만 보고 중용한다. 주변에서 격하게 반대해도 황녀는 끝까지 주인공을 밀어준다. 그 결과, 대륙에서 마왕군을 완벽하게 축출한다……. 범상한 군주라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다.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를 눈앞에서 바라보니 감개무량했다. 게임에 나오는 일러스트에 비해 훨씬 더 어려보이지만, 저 새하얀 이마와 은발, 굳게 다문 입술, 날카로우면서도 시원한 눈초리는 틀림없이 엘리자베트 황녀를 나타냈다.
미처 날개를 펼치지 못한 붕새. 혹은 아직 때를 얻지 못한 교룡.
그러나 이제는 내가 철저하게 무너트려야만 하는 적에 불과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이자 에바트리에 백작인가. 과연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소문날 만한 미모이다. 눈이 즐겁군.”
엘리자베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자신을 알고 있어서 놀란 것일까.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함없이 늠름했다. 아쉬웠다. 아주 조금이라도 당황해주었으면 했는데……호랑이는 어려서도 호랑이인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위기 자체가 딱딱했다. 하긴, 아까 전의 연설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조금 더 여유롭게 대응하지 않으면 나한테 주도권을 빼앗길 거다, 합스부르크의 황녀. 각오는 되어 있는가.
“그대의 장대한 거짓말은 잘 감상했노라.”
“호오.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대의 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과 거짓만을 토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