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15화 (115/510)
  • 00115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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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군이 평야를 사이에 두고 전열을 완비했다. 인간군은 언제든지 기사단을 돌격시킬 수 있도록 좌익과 우익에 기사들을 일렬로 주르륵 늘여놓았다. 육안으로 어림잡아서 기사의 숫자가 적어도 1만이 넘었다. 1만 명의 기사라! 장관이었다.

    이 세계에는 오러라는 게 있다. 나라마다 아우라, 오라, 아우하 등, 부르는 방법이 다르지만 여하간에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놈이다. 이거 때문에 군사제도가 내가 살던 세계와 많이 다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극단적으로 기사를 육성한다.

    제아무리 장창병이 튼튼하게 방진을 짜둔다고 해도, 기사가 오러 입힌 칼을 휘두르면 장창이 대나무 썰리듯이 우수수 잘린다. 창날로 찌르고 화살을 쏴도 기사의 신체를 뚫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인간병기이다.

    각국의 군사력, 각 영주의 군사력은 얼마나 많은 기사를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군왕들은 자신의 신하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기사를 다스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기사단을 한 개 더 창설했다고? 너 반란 일으키려는 거 아니야?……이런 식이다.

    이토록 기사라는 병종이 중요하다보니 오러에 자질이 있다 싶으면 몰락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등용한다. 소영주들은 군왕의 견제를 받아서 차마 등용할 수 없고, 보통 오러에 자질이 있는 자들은 왕국이나 공국의 수도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기사를 집중 육성하여 이른바 수많은 친위대를 만든다. 이른바 아카데미의 탄생이다.

    '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게 무척 중요하다.

    소영주들에겐 아카데미-권리가 당연히 없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정도는 되어야 간신히 아카데미-권리를 허락받는다. 그 결과, 변경백은 물경 수천 명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군왕들은 결코 아카데미를 좌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세계에서는 장창병이나 궁수 같은 병종이 쇠퇴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몬스터라는 괴이(怪異)가 있으니까.

    대영주의 영지에선 몬스터도 얌전히 살아간다. 너무 날뛰면 기사단이 토벌하러 밀어닥치기 때문이다. 적당히 날뛰고, 적당히 토벌되고, 적당히 산다. 특히 영주 입장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 가령 산간마을 따위를 털어버린다. 알고보면 몬스터도 영악한 놈들이다.

    반면에 소영주의 영지에선 사정이 전혀 다르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영주에겐 기사가 매우 적다. 몬스터들이 미쳐 날뛴다고 해서 기사를 마음껏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몬스터들도 마음 놓고 인간의 마을을 약탈한다.

    사회모순이다.

    소영지니까 기사가 없다. 기사가 없으니까 몬스터를 토벌하기 어렵다. 몬스터를 토벌하기 어려우니, 그 피해는 대부분 평민들이 입는다. 평민들은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이사갈 권리가 없으니 말이다.

    대영지가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지는 반면에 소영지는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진다. 평민은 혹시나 자신에게 오러의 자질이 있지 않을까, 혹시나 자기 아들딸에게 오러의 자질이 있지 않을까, 그것만 기대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재밌지 않은가. 오러가 존재하는 세계인데도 원래 세계와 핵심적인 부분에선 똑같다. 다만, 오러가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차별 없이 대접받는다는 게 다를까.

    저 평야 너머에 나열한, 무수히 많은 숫자의 창병과 궁병은 바로 그들 하층민이다.

    기사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몬스터와 맞서겠는가. 답은 하나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마을주민 스스로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

    장창을 든다. 활을 든다. 무시무시한 오크와 고블린에 대항한다. 자연스럽게 각 마을마다 정예병이 생긴다. 그리고 지금처럼 월맹군이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몬스터 침공이 발생하면, 인류를 지키라는 명분 아래 '소집'된다. 말이 소집이지 강제징집이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알았다면 나의 의도는 이제 명확해진다.

    파이몬. 너는 날 월맹군의 대표로 내세워서 인간군의 공분을 받게 할 속셈이었겠지. 하지만 너는 인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다. 그것이 아마도 마왕으로 태어나 마왕으로 살아온 자의 한계이리라.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았다!

    인간사회는 결코 하나가 아니며, 하나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엔 귀족이 있다. 평민이 있다. 노예가 있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으며,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억압하는 자가 있고 억압받는 자가 있으며, 저항하는 자가 있고 수긍하는 자가 있다. 통제가 있고 반란이 있다. 물리학과 같이 섬세하고도 미세한 조작이 있는가 하면, 그런 조작을 알아차리는 사람마저 있다. 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왕들 중에서 오로지 나만이.

    그런 나에게 대표연설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그걸 보여준다.

    “주군. 시간이 되었다.”

    라우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막사에서 가만히 구석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고 표현하면 약간 틀렸다. 그저 눈을 뜨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서. 라우라의 말에 내 의식이 잠수함처럼 부상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금발의 라우라와 홍발의 라피스가 서 있었다. 인간과 마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이들이었다. 라우라는 나의 애인이자 능신(能臣)이고, 라피스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나를 믿어준 소녀이자 충신이다.

    그렇다. 저 둘이 나란히 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지금 일개 가능성에 불과한 것을 현실로 끄집어내고자 한다.

    “좋습니다. 가볼까요.”

    두 사람을 대동하고 막사를 나섰다. 오크 병사들이 양편에 벽처럼 열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걸어갈 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연설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는 내가 월맹군의 대표자였다. 이 정도 대접을 받을 날은 다시 오기 힘들겠지. 온다 하더라도 매우 먼 훗날이리라.

    앞으로 걸어나갔다.

    한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몬스터들의 감정이 조류처럼 밀어닥쳤다. 흥분, 초조, 따분함, 격정, 불안, 허기, 존경……. 익숙해졌다. 그것들은 내 마음의 모래사장을 살며시 적셨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눈앞이 훤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가 나타났다.

    군중을 완전히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곳에는 마왕들이 모여 있었다. 파이몬, 마르바스, 아가레스, 가미긴, 바르바토스……. 최고위 마왕들만이 의자를 마련해두고 앉았다.

    그들쯤 되면 거대한 전쟁터 자체를 제어할 수 있다. 어디에 자신의 부대가 있든지 명령을 내린다. 서열이 낮은 마왕들은 그만한 통제력이 없으므로 자신의 부대와 함께 움직인다. 여기에 여유롭게 앉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들이 마왕군의 최고 실력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기분은 어때,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왜인지 즐겁게 흥얼거렸다.

    “쫄보 새끼처럼 잔뜩 움츠러들지는 않았겠지?”

    “아아. 그러기에는 내 삶이 다소 혹독해서 말이야.”

    “앞으로 더더욱 혹독해질 거야.”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산악파의 제안에 굳이 딴죽을 걸지 않은 것은, 비단 협상을 위해서만이 아니야. 단탈리안. 네가 그림자에서 양지로 나오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무대가 없다고 생각했어.”

    바르바토스답지 않게 상냥한 미소였다. 어린아이를 보는 시인처럼.

    “왕이란 이끄는 자. 신민의 총의를 대신하는 자일지니. 모략과 계략만으로는 왕이 될 수 없어. 만인을 이끌 자격이 있는가. 명분이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매순간마다 증명해야 해. 지금부터 너의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만인의 의지야. 자아, 단탈리안.”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보고.”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봄비가 물러나고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늘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뒤를 보고.”

    그녀가 뒤편을 가리켰다. 십만의 몬스터가 우글거렸다. 전투가 시작하기만을, 혹은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는 십만의 감정이 있었다. 날붙이 소리가 재잘재잘 자그맣게 울렸으며, 어디선가 고함이 들려오기도 했다. 붉은 깃발이 무수하게 휘날렸다.

    “앞을 봐.”

    그녀가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평야가.

    앞에 보이는 땅이라고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뿐이었다. 장애가 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량하지만 평화로웠다. 그러나 저 너머. 멀지만 분명한 움직임으로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작은 점과 같은 것들이 평야 저편을 가득 메웠다.

    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완벽한 무음.

    “이게 왕이 바라보는 전장이다.”

    바르바토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친우여. 왕이 되고 와라.”

    그런가.

    그녀는 언제나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살아왔는가.

    천 년 동안 이만한 고독을 마주보고 살았는가.

    그녀는 내가 단지 평원파에서 써먹을 만한 모략가, 책략가, 부하로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발을 딛고 함께 앞을 바라볼 동지를 원했다. 한때 파이몬과 마르바스가 그녀의 동지였으리라.

    언젠가 다시 동지가 나타나리라 믿었겠지. 그리고 기다렸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때 내가 나타났다. 싹수가 보이는 인재라 여겼다.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나를 시험했다. 나는 기대를 넘어서보였다. 그녀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아마도 바르바토스는 나에게 단순히 애정을 품은 것이 아닐 거다. 애정이라는 낱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 그녀에게 나는 천 년의 기다림 끝에 간신히 나타난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애정을 주긴 주되 월맹군의 선봉으로 내세웠다. 작전참모로 삼았으면서도 전쟁터에 내보냈다. 이제는 왕이 되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정말 곤란한 마왕 전하가 아니고 뭔가. 나는 기껏해야 모략가나 될 그릇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엉엉 울면서 땅바닥에 수백 번 절을 할 수 있다. 그런 나에게 왕이 되라니. 나는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곤란해서, 그만 멋쩍게 웃어버렸다.

    “그러다 나 죽는다?”

    바르바토스도 웃었다.

    “위험도 고난도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설령 그런 삶이 있다 해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가라. 발걸음을 내딛고 고난에 맞서라. 많이 내딛는 자가 보다 많은 위험을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단탈리안. 이 두 손에 거머쥘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위험 너머에 있다.”

    생존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라고.

    이제 너는 그럴 때가 되었다고 바르바토스는 말했다. 엄격한 선생님이 아닐 수 없다. 라피스처럼 당신을 신뢰하노라고 응원을 보내는 것도, 라우라처럼 당신과 끝까지 함께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도 아니라, 원래 세상은 그렇게 생겨 처먹었으니 땡강 부리지 말고 얌전히 나아가라고 질책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옆에서 마법진을 준비하던 마법사 열 몇 명이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했다. 마르바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시작해도 좋겠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바스가 수를 셌다.

    “슬슬 시작하지. 십, 구, 팔…….”

    마법진이 새하얗게 빛났다. 여러 사람의 마법이 중첩되면 마법진은 색깔이 하얗게 된다. 마법진은 땅바닥에 선명한 빛을 그리면서 순식간에 나를 포위했다. 새하얀 빛 사이로 마르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사, 삼, 이, 일…….

    되었다.

    지금쯤 상공에 거대한 입체영상이 떠올랐을 거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막 비슷한 것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지만 위를 올려다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야 꼴사나울 뿐이다.

    지금 수십 만의 인간과 마인이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인류여, 들으라.”

    그런 가운데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자아.

    세상에 독을 뿌릴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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