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저 영감탱이가 정말 죽고잡나.”
“내가 생각하기에 적당히 타협해야 돼. 이번 기회에 중립파에 빚 좀 만들어두고.”
그 적당한 타협이라는 것을 논의했다. 내가 미리 준비해온 대안을 마치 즉석에서 떠올린 것처럼 얘기했다. 바르바토스는 청문회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지만, 중립파를 설득시킬 재료가 없는 마당에 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의 의견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내가 마르바스에게 눈짓했다. 상의가 다 끝났다고. 마르바스는 이쪽을 보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눈짓하자마자 침상에서 일어섰다.
“모두들 연회를 즐겨주는 것 같군. 주최자로서 기쁘기 그지없다. 여기서 건배를 올리는 영광을 본인에게 허락해주길 바란다. 월맹군을 위하여!”
“월맹군을 위하여!”
마왕들이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자연스럽게 음악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나체로 춤사위를 벌이던 소년소녀들이 천천히 천막으로 빠져나갔다. 마르바스가 그들한테 모종의 신호라도 보낸 것이겠지. 새삼스럽게 정치에 특화된 마왕의 정교한 계획에 놀랐다.
“본인으로서는 여러분과 영원토록 잔치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마르바스가 마왕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연회의 목적은 앞으로 보조를 맞추면서 전쟁터에 나서야 할 수뇌부들끼리 안면을 익히는 것이다. 즉,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치장 한가운데에 별안간 입체그림이 떠올랐다. 마왕군과 인간군이 현재 대치하고 있는 브루노 평야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월맹군 제1군단에서 제6군단, 합스부르크 제국군에서 브르타뉴 왕국군, 각 군단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 명쾌하게 나타났다.
“인간군 도합 14만 병력. 우리 월맹군은 도합 11만.”
마르바스가 말했다.
“병력의 질로 따지자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허나 인간군에는 기사단이 최소 스물다섯 개 참전했다. 그중에는 <검의 주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터. 결코 만만한 전투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군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패망할 것이다. 고로 본인은 회합의 주최자이자 중립파의 대표로서 여러분에게 요청한다. 내분을 그만둘 것을. 본인의 제안을 숙고해주겠는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이 평원파를 대표하여 말씀드립니다. 산악파의 의중과 상관없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산악파에 정말로 배신의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만 합니다.”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어떻게 증명할 텐가? 증거가 불충분하다.”
“없는 증거는 만들어내면 됩니다. 산악파여!”
내가 파이몬과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펼쳐질 대전쟁에서 그대들이 선봉에 나서십시오! 그대들이 인간군과 분투하는 것 자체가 마왕군에 충실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시트리는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
전투에서 맨 선두에 서는 것은 무시무시한 피해를 불러일으킨다. 하물며 양군 총합 20만 대군이 맞붙는 전투인데 그 피해가 오죽하겠는가. 우리는 쉽게 말해 너희가 무죄임을 피로써 증명하라고 말한 것이었다.
“너 이 자식…….”
“우리의 제안이 몹시 관대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그대들에게 배상금을 요구한 것도, 산악파의 공식사과를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월맹군의 선봉에 서는 명예를 제안했을 따름이지요.”
“하, 명예? 개죽음이겠지!”
시트리가 또 날뛰려고 했다. 정말 혈기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미리 말씀드리지요. 협상의 여지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양자택일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평원파는 즉각 산악파에 선전포고를 할 것입니다.”
허언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공격당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 월맹군 원정이 실패할지라도 복수를 원했다. 조직의 체면이라는 물건이었다.
시트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너희야말로 월맹군을 배신하는 거야!”
“월맹군, 월맹군……그렇게 월맹군을 소중히 여긴다면 행동으로 증명하십시오. 산악파가 지금까지 내보인 행동은 명백히 월맹군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앞세워서야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내가 웃었다.
“정작 앞장서서 싸우기는 싫어하고, 입으로는 마왕군을 위한다고 떠들고……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휴전협정이니 뭐니 꼼수를 부리는 겁니까? 정말 팔자가 좋군요. 부럽습니다.”
모략은 양날의 검이다. 실패한 모략이란 통탄할 사건으로, 이는 쏜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화살과 같다. 아니면 적어도 활시위를 떠나면서 살갗을 벗겨놓는 화살이거나. 탄환이 튀면서 모략가를 죽일 수도 있는 총알이다.
그렇기에 모략가는 언제나 무덤을 두 개 파두어야 한다. 상대방을 죽이려 한다면, 자신 역시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파이몬. 너는 그런 각오를 해두었을까?
“좁밥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져서는――.”
“기다리세요.”
시트리가 뭐라고 소리치려 할 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파이몬이 제지했다. 시트리는 불만이 가득한 안색이었지만, 파이몬이 막아세우자 얌전하게 물러섰다.
그제서야 파이몬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단탈리안.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사와요.”
“어, 언니!?”
시트리가 경악했다.
“가만 있으세요.……월맹군의 선봉에 선다. 그걸로 우리 산악파의 무죄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거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향후 이번 건에 대해서 평원파는 별다른 보상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드리지요.”
“좋아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대전쟁은 개전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하는 절차가 있사와요. 상대편의 사기를 무너트리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대표자 한두 명이 나가서 연설을 하는 것이지요. 기습적인 작전에는 불필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회전에서는 유용한 절차예요.”
아아.
뭔지 알겠다. 이건 <던전 어택>이란 세계관에 마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표자를 엄청나게 거대한 홀로그램으로 띄우고, 목소리를 증폭시켜서, 상대측에 연설을 건다. 대체로 너희가 얼마나 약하고 우리는 얼마나 강한지, 왜 이번 전쟁의 명분이 우리에겐 있고 너희에게 없는지 지껄인다.
<던전 어택> 주인공이 이거에 재능이 있었다. 인류여, 일어서라! 함께 맞서싸워라! 하고 주인공이 울부짖으면 모든 인간군이 호응했다. 게임상에서는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주사위를 던지는데, 이 주사위 눈금이 높을수록 아군의 사기가 올라가고, 낮을수록 사기가 내려간다. 쉽게 말하면 버프 효과이다.
게임의 시스템이 여기서는 '의례'라는 걸로 구현되어 있었군.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파이몬을 바라보았다.
“그 대표연설자를 단탈리안, 당신이 맡아주세요.”
“예?”
“우리 산악파의 조건은 그것입니다. 저희 역시 이건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사와요.”
파이몬이 자기는 할 말 다했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설대표자로 나선다는 게 어째서 조건이 되는 것이지? 나는 잠시 기다려줄 것을 요청하고, 바르바토스와 밀담을 나누었다. 나 혼자서 판단하기에는 적잖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다시 천막 너머에서 음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인데 이 음악소리,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몰래 나누는 대화가 주변에 들리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철두철미한 마르바스였다.
“아마 파이몬 저 년은 합스부르크 황녀랑 마법적인 맹세를 나누었을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하. 그러니까 지가 먼저 선전포고하기 곤란하다는 거로군.”
바르바토스의 지적에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황녀든 파이몬이든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싸워온 종족과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안전장치를 해두었겠지. 예컨대 상대방이 약속을 깨고 공격해오면 저주에 걸리게 했다든지. 흐음. 아직 마법이라는 것이 생소해서 미처 고려하지 못했군. 뭐, 정확히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상관없지만…….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너한테 복수하려는 거겠지, 멍청아.”
바르바토스가 거 참 고소하다는 식으로 키득거렸다.
“지금까지 넌 막후에서 음모나 짰잖아. 그런데 이런 대전투에서 똬악, 하고 나가서 선전포고해봐라. 인간이든 마인이든 단탈리안 네 얼굴을 기억하게 될걸.”
“젠장. 뒤끝 쩌네.”
이해는 간다마는 납득하기 어렵다. 고작 나 개인에 대한 복수를 조건으로 넣다니?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쪼잔하고 유치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파이몬이 실패한 까닭은 내가 음흉해서가 아니라 지가 잘못해서다. 난 그저 녀석의 계략에 발맞추어 행동해주었을 뿐이고.
내가 한숨을 쉬었다.
“뭐……어쩔 수 없나.”
“어라. 받아들이려고?”
“거 선전포고 연설 좀 했다고 뭐 피해를 보겠어.”
까놓고 말해 내가 서열 제71위 마왕 단탈리안이라는 사실을 아는 인간도 적을 거다. 아니, 거의 없지 않을까? 대표연설자로 나간 이후에는 이름값이 오르겠지만 고작 그 정도.
사람들은 침략군의 장수를 기억하지 침략군의 사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악명이 조금 오르는 것에 불과하리라. 아니, 마왕군 내부에서 내 발언권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는 도리어 명예로운 자리라 할 수 있겠지.
순간적이지만 좋은 아이디어도 떠올랐고.
내가 바르바토스와 상담을 마치고 대답을 내놓았다.
“좋습니다. 여기 계신 군단장들께서 동의해주신다면, 기꺼이 제가 월맹군의 대표연설자로 나서겠습니다.”
군단장들이 쉽사리 동의했다. 마르바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조를 구했기 때문이다. 금발의 가미긴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끝까지 뻐겼지만, 마지막에 가서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마 가미긴은 이 기회에 산악파를 밟아두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협상이 타결되었다.
우리 평원파는 결과적으로, 손에 때 하나 안 묻히고 산악파한테 피해를 강요하게 되었다. 중립파는 평원파와 산악파를 중재함으로써 다시금 자기 파벌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나머지 무소속 마왕들은 행여나 산악파가 이번 월맹군에서 공훈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을 막았다. 마지막으로 산악파는 자기네의 무죄를 관철시켰다. 각 파벌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우리는 하루 빨리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지나치게 거대한 병력이 모였다. 식량, 그러니까 인육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전투는 필수였다.
마왕군은 다소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진형을 새로 조직했다. 산악파의 제1군단이 선봉. 중립파의 제2군단, 바싸고와 발레포르의 제4군단, 우리 평원파 제6군단이 중진. 나머지가 후방. 이렇게 진형을 조직하는 데 이틀이 꼬박 걸렸다.
그 사이에 인간군도 질서정연하게 진용을 갖추었다. 평원 멀리에서 프랑크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인간군의 선봉은 프랑크 제국이 맡은 모양이었다. 전쟁이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틀 동안 막사에 틀어박혀 연설문을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대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중대사를 맡은 것이었다. 말하다가 혀라도 씹으면 곧바로 인간군과 마왕군 20만 대군한테 비웃음을 사겠지. 그런 쪽팔림을 당할까보냐!
“그쯤 준비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라피스가 말했다. 참고로 이쯤해서 쿤쿠스카 상회의 직원이자 내 전용 상인인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는 게 왠지 모르게 오랜만이라고 느껴졌다. 사실 두 달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도 말이다.
“모름지기 준비는 몇 번을 해도 모자른 거야.”
“하아. 그렇습니까.”
그녀는 여태 나의 지시를 따라서 인간계와 마계에 각종 소문을 퍼트렸고, 때에 따라 뇌물을 사용하여 인간군의 수뇌부에 접촉했다. 말하자면 이번 전역에서 내 손발이 되어 움직여주었다.
“파이몬 전하 말입니다. 그분도 저희 쿤쿠스카 상회와 계약을 맺은지라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만, 단탈리안 전하의 정보를 중점적으로 모으더군요.”
“응? 나를?”
“예. 벌써 한 달은 되었습니다.”
한 달 전이라면 꽤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정보를 모았다고?
“……내가 뒤에서 움직인다는 낌새를 알아챈 걸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파이몬 전하는 명색이 최고위 서열의 마왕. 저희가 모르는 어떤 수를 숨겨뒀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