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시트리가 얼굴을 구겼다. 말도 안 된다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파이몬 본인은 태연했다. 대세가 이미 이쪽에 있음을 아는 것이겠지. 여기서 아니라고 변명해봤자 판도가 불리하게 돌아갈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시트리가 소리쳤다.
“애시당초 말이 안 된다고! 뭐, 우리가 평원파의 뒤를 치려고 왔어? 거기 너. 그래, 단탈리안인가 뭔가 하는 너 말이야. 너가 그딴 모함을 써재껴서 투고했다면서? 증거가 있으면 어디 대봐.”
이런, 화살촉이 나한테로 돌려졌다. 바르바토스보다 내가 더 상대하기 쉽다고 여긴 걸까.
게임에서건 여기서건 시트리는 말재주가 있는 마왕이 아니었다. 순수한 무투파였지. 그런 무투파한테 나는 어지간히도 얕보인 것 같았다.
주변에 기라성처럼 늘어선 마왕 전하들께서도 흥미진진하게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상 이들은 나의 밀서 때문에 움직였다. 그들 중에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한 이는 마르바스밖에 없다. 즉, 그들 입장에서는 지금이 바로 나 단탈리안의 데뷔전인 것이다.
뭐, 좋다. 마르바스가 이번 모임의 주최자라면 나 역시 그림자 주최자이다.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즐겁게 할 의무가 있다. 적당히 낚싯밥을 뿌려볼까.
“증거라면 충분합니다. 그쪽에서 우리 평원파한테 보낸 편지만 봐도 명약관화하죠.”
내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들어 보란 듯이 흔들었다.
“마계의 불구대천 원수인 인간군과 휴전을 협상하라, 그러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어딜 봐도 이반행위입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겠지요.”
“흥. 그거야말로 배신이 아니었어.”
시트리가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 쳤다.
“우리는 단지 대의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야. 마계인이 살아갈 영토를 대륙에 마련한다. 그게 우리 마왕의 존재의의야. 그때 거기서 휴전했다면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거할 수 있었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라.”
내가 비죽거렸다. 연기가 아니었다. 몸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표출했다.
“그건 누구의 피입니까?”
“뭐?”
“검은 산맥의 산성들을 힘겹게 뚫고, 로젠베르크 변경백을 물리치고, 북부 일대를 평정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제국군 5만과 겨루어 이겨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수많은 마인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나 역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적어도 이 대지는 나의 자그마한 핏방울도 머금고 있었다.
“시트리, 당신이 말하는 '우리'란 산악파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거기에는 월맹군 제6군단의 무수한 인명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왕이 월맹군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이전에 일개 파벌의 입장에서 바라보다니, 직무유기로군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변에서 몇몇 마왕이 웃었다. 바르바토스와 가미긴이었다. 마왕군 최고의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인가. 나는 정상인보다 변태들한테 호감을 주는 듯했다. 유유상종이라는 옛말도 그러고보면 틀린 것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시트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뒤로는 지리멸렬한 자기 변명만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래서야 대화에 재미가 없다.
적어도 거기 뒤쪽에서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파이몬은, 발푸르기스의 밤에 나를 정말로 거의 죽일 뻔했다. 내가 게임 지식을 동원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회유하는, 일종의 꼼수를 쓰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당했으리라. 그 정도 실력은 보여주었으면 한다마는……머리가 근육질로 이루어진 무투파에게는 무리였는가.
“아무튼 네 녀석 주장에는 증거가 없는 거야!”
“산악파와 합스부르크는 서로 내통한 적이 없다. 그런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우리 산악파는 오로지 마계를 위해 행동했어.”
내가 흐음, 하고 고심하는 척했다.
“그럼 산악파 여러분도 우리 평원파를 충분히 동지라고 여기고 있겠군요. 맞습니까?”
“물론이야. 우리는 다 똑같은 월맹군 소속이잖아.”
“음, 좋습니다.”
내가 순순히 인정했다.
시트리가 눈썹을 째푸렸다. 초반에 기세 좋게 공격하던 것과 다르게 너무 쉽게 물러서니 의심스럽겠지.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미 낚싯밥을 훌륭하게 회수했다. 거기에는 산악파라는 대어가 살이 통통 불어오른 채 잡혀 있었다.
“저 또한 산악파가 무죄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남들이 어떻게 바라보겠냐는 겁니다.”
“남들이?”
시트리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무슨 소리야.”
“의도가 뭐였든 간에 산악파는 평원파를 위협했습니다. 여기 계신 군단장 각하들께서 왕림하시지 않았다면 정말로 평원파는 멸망했을 터. 마왕군과 마계사회에선 이미 파이몬 님을 반쯤 배신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아? 어떤 새끼가 감히…….”
내가 말을 중간에 끊었다.
“가미긴 님. 개인적인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만. 파이몬과 산악파가 마왕군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응. 배신했다고 생각하는데에.”
금발의 가미긴이 싱글벙글하며 즉답했다.
“나 같은 새끼가 그래서 미안해~.”
“…….”
“그런데 말이야, 오히려 배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까아? 명분이야 갖다붙이면 그만이고, 결국 땅바닥에 코 박게 될 애들은 평원파였잖아. 마계인을 위한다 뭐한다 떠들어대지만 어쨌든 월맹군의 전력을 깎아먹는 일인걸.”
시트리가 할 말을 잃었다. 가미긴이 나한테 대놓고 윙크를 보냈다. ‘나 잘했지? 칭찬해줘!’ 하는 표정이었다. 저러니까 꼭 금색털의 거대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뭐, 그런 겁니다. 시트리 님이 아무리 증거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청문회가 열리면 산악파는 유죄판결을 얻겠지요. 이 경우 고소측과 피고소측인 평원파와 산악파를 제외하고……대충 스물다섯 명의 마왕이 청문회에 참석할 수 있군요. 그중 몇 명이나 산악파의 고귀하고 순결한 대의명분을 믿어주겠습니까?”
마왕들은 이기적이다. 코 한번 풀지 않고 상대측의 전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단언컨대 절대적인 표 차이로 산악파에는 유죄가 선고될 것이다. 시트리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약간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청문회를 요청하지 않으면…….”
“싫습니다. 산악파가 유죄라는 증거가 없다고 말씀했죠? 똑같이 되돌려드리지요. 산악파가 무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시트리가 대답하지 못했다.
“양쪽에 증거가 없으니 부디 청문회에서 투표로 판가름을 나눕시다. 공평해서 좋군요.”
“…….”
장내가 조용해졌다. 가미긴과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속닥거렸는데, 아무도 대화하고 있지 않은지라 그네들 대화가 빤히 다 들렸다.
“나 쟤 마음에 들어~. 가지면 안돼?”
“꺼져, 마조 새끼야. 내가 침 발라둔 지 일억사천만 년은 지났어.”
“히잉. 바르바토스 너무해.”
……남을 무슨 물건 다루듯이 얘기하지 마라.
중립파의 수장인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주름살이 고와서 멋진 중년이었다.
“이면(異面)의 마왕 단탈리안이여. 본인도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산악파와 평원파는 영원히 건너지 못할 강을 사이에 두게 된다. 산악파와 평원파는 마왕군의 제1세력이고 제2세력. 사실상 마왕군 전체가 양분되는 것이다.”
“이미 양분되어 있지 않습니까?”
“정도의 차이이다. 단탈리안, 세상의 모든 일은 정도의 차이야.”
마르바스가 외알 안경을 벗어서 비단 손수건으로 닦았다.
“인간과 전쟁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기를 보아 물러서야 하는가……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에 대해서는 어차피 절대적인 답안이 없다.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다. 허나 우리는 비록 불멸자일지라도 무엇이든 알지는 못한다. 상황과 때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그가 자문했다.
“그렇기에 파벌이 필요하다. 한쪽은 왜 전쟁이 옳은지 주장한다. 다른 한쪽은 왜 전쟁이 그른지 주장한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주장에 필요한 증거들을 모으겠지. 그러함으로써 우리 마왕군은 총체적인 의견과 증거를 가지게 된다. 일종의 분업이라 할 수 있다. 알겠는가? 투쟁의 목적은 투쟁 자체가 아니다. 투쟁함으로써 조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
중립파의 거두다운 발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파벌 투쟁은 좋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나아가면 곤란하다. 정도를 지키라.
“한쪽 날개를 잃은 새는 결국 날아오르지 못한다. 단탈리안이여, 산악파가 평원파를 공격하려던 것이 잘못이라면 지금 평원파가 산악파를 모조리 멸하려는 것 또한 잘못이지 않겠는가. 본인은 적절한 타협점을 바란다. 물론, 평원파가 관용을 베푼다면 그에 대해 중립파는 적극적인 지원을 보낼 것이다.”
달리 말해 정치적이고 물질적으로 보상하겠다는 말이다.
흐음.
본래 나한테는 산악파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러면 인간한테만 좋은 일 하는 거니까. 비록 내가 형식상 평원파에 속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내 최종적인 목적은 생존, 거기에 더해서 정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계와 마계가 적당하게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문제는 바르바토스를 어떻게 설득하는가였다.
아마 청문회가 열린다면 중립파가 일부러 산악파의 편을 들어줄 거다. 중립파는 아슬아슬하게 찬반 논쟁을 이끌고 가서 마지막에 적당히 타협하자고 제안했겠지. 그때 '이쯤에서 물러나자'라고 바르바토스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가.……마르바스는 아예 여기서부터 타협을 제안해왔다. 내가 듣기에는 꽤나 그럴듯하게. 이 정도라면 바르바토스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몇 명이나 마르바스의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를 알아차렸을지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알아들었다. 청문회 열어봤자 중립파의 지지를 기대하긴 어려웠다.……투표권을 가진 약 스물다섯 명의 마왕 중에 중립파는 열 석 정도를 차지한다. 여기선 한 발자국 물러나야 한다.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마르바스 님의 고견은 알겠습니다. 청문회는 물론 시급한 문제입니다. 중립파가 중립파이기 전에 마왕군의 일원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평원파이기 전에 한 사람의 마왕이지요.”
실제로 마르바스는 '중립파는 중립파이기 전에 마왕군의 일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까닭은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먼저 '청문회는 물론 시급한 문제'라고 그냥 들으면 외교적인 언사에 불과한 말을 앞에 갖다놓는다. 청문회라는 단어를 교통표지판 세워두듯이 앞에 배치해두고, 그 다음에 맥락을 이어붙인다.
이렇게 하여 '그대들 중립파가 마왕군 전체의 입장을 고려해서 청문회에 참석하리라는 사실을 내가 알아들었다' 하고 표시한다.
표면만 봐서는 상대방의 말을 단순히 맞장구치는 것처럼 보이는 말도, 맥락으로 살펴보면 훌륭하게 정치적인 거래가 된다. 마르바스는 천 년이 넘게 산악파와 평원파 사이를 중재한 위인. 이 정도 뉘앙스는 손쉽게 이해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마왕 마르바스의 호감도가 10 오릅니다.」
효과음이 울리면서 안내창이 떠올랐다. 자기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었고, 또한 원하던 바를 적절하게 받았다는 데 마르바스는 만족한 것이었다.
“물론 잘못한 쪽은 산악파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인은 단지 이번 회합의 주최자로서 지나치게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고 싶었을 따름이다. 청문회에 대한 건은 조금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겠지.”
뭐라고 할까. 나는 눈앞의 마왕 영감이 싫지 않았다. 평원파를 배려해서 '잘못한 쪽은 산악파'라고 딱 잘라서 못을 박아두었고, 우리 둘 사이에 오간 대화의 맥락을 숨기려고 '분위기를 식히고 싶었을 따름'이라고 연막을 뿌렸다.
이렇게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고 밀담을 숨긴 다음에는, 봐라. 다시 자연스럽게 '청문회에 대한 건은 조금 뒤에'라고 말을 덧붙였다. 바르바토스와 상의하고 오라는 얘기였다.
“그럼, 우선 본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준 여러분을 환영하겠다.”
마르바스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천막들 사이에서 미녀와 미남이 일렬종대를 이루며 서서히 춤추면서 등장했다. 맨살이 기름에 반들반들거렸다. 일부는 옷을 입었고 일부는 나체였는데, 아마 다양한 취향을 배려한 것 같았다. 세상에는 은꼴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천막 너머의 연주자들이 음악 소리를 흥겹게 키웠다. 파이몬과 시트리를 제외하고 마왕들이 기분 좋게 연회를 즐겼다. 나는 이 호화로운 잔치를 즐기면서 바르바토스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어떡할까. 청문회 열어, 말아?”
“뭔 개소리야? 당연히 열어야지.”
음. 바르바토스는 아까 전에 오간 대화의 속뜻을 잡아채지 못했다. 내가 조용히 설명하자,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어머나, 시발.”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드러내면 안 되니까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