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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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푸르기스의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마왕들과 대면하게 된 것은.
그러고보니 청문회로부터 대충 반 년이 조금 더 넘었는가. 그때 나는 피고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서열 제72위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죄과를 추궁당했다……이제는 입장이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내가 파이몬의 죄과를 캐물을 차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겠지.
군단들 사이의 중간지점에 비단으로 된 장막이 겹겹이 둘러쳐졌다. 미소녀와 미소년이 발가벗고 손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눈이 호강했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녀――알다시피 얘는 레즈다――의 알몸을 관람하면서 즐겁게 흥얼거렸다.
“헤에. 임시 회합인 줄 알았는데 꽤 본격적인걸.”
종족도 다양했다. 이런 자리에 약방의 감초라 할 수 있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는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마인들 사이에서 높은 계급으로 존경 받는 호족(虎族)과 묘족(猫族)도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로 따지면 브라만이라고 할까.
“소인들이 안내하겠나이다.”
천막 입구에 다다르자 미소녀 여섯 명이 오체투지했다. 새하얀 엉덩이가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미소년이 아니라 미소녀를 배치한 까닭은 아마도 바르바토스의 취향에 맞춘 것 아닐까. 어찌되었든 바르바토스는 무척 흡족해했다.
“확실히 마르바스 영감이 손님 접대하는 법도를 알아.”
“끄응. 너무 화려하지 않아?”
나에게도 따로 소녀 두 명이 따라붙었다. 무기 검사를 할 겸해서, 미소녀들은 내 옷을 벗기고 온몸에 향료를 발랐다. 그리고 고대 로마인의 토가 같은 천옷을 입혔다. 가슴팍과 허벅지가 훤하게 다 드러나는 옷이었다.
옛날에는 꿈에서도 바라지 못한 미남 미녀가 지극히 공손하게 대해준다.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는 구름 너머의 계급이 바로 마왕이었다.……이러니까 안드로말리우스 걔도 기고만장한 성격이 되었겠지.
“왜, 사치스러운 거 싫어?”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아예 즐기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묘족 소녀의 귓볼을 어루만지면서 놀았다. 묘족 여자애는 마왕이 손수 만져주자 너무나 황공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순진무구한 반응이 바르바토스의 가학심을 불태운다는 사실을 알까 모르겠다. 불쌍하게도. 꼭 돈 많은 아줌마가 초짜 영업녀를 갖고 노는 것 같군. 아니, 겉으로만 보면 묘족 여자애나 바르바토스나 같은 또래로 보인다는 게 곤란했다.
“글쎄. 별로 익숙하지가 않아서.”
“내가 보기에도 넌 좀 마왕스럽지 못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당연했다. 살아남기 위해 엄숙한 말투도 쓰고 그랬지만 어디 그게 내 천성이었던가. 맨날 반말만 쓰고 사는 게 지겨워서 라우라한테 일부러 존댓말까지 쓰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였다.
우리는 선남선녀의 안내를 받아서 천의 장막 깊숙이 걸어갔다. 장막은 산들바람에 살랑거렸고, 햇빛에 성스럽게 빛났다. 천과 천 사이의 미로와 같은 길을 굽이쳐 들어가자, 곧이어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장막의 중심이었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야~.”
선객이 한 명 있었다. 여자였다. 그녀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바람에 젖가슴이 천옷 틈새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맹세컨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본 어떤 젖가슴보다 거대했다. 거유(巨乳)를 뛰어넘어 폭유(爆乳)였다. G컵? 아니, H컵?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로 <던전 어택> 유저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마왕, 서열 제4위의 가미긴이었다.
금발이 풍성한 이 미녀는 비스듬히 누워서 포도를 먹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먹는 게 아니라, 옆에서 백발이 성성한 집사가 포도를 까고 있었다. 그가 포도를 껍질 벗겨서 주면 가미긴이 낼름 받아먹었다. 빨간 혓바닥으로 포도가 뎅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꽤나 요염한 광경이었다.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아예 풀어졌네, 풀어졌어. 좋냐?”
“어어엄청 좋은걸~. 솔직히 나, 이번 회합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거든. 지루하고 살벌한 모임이 될 줄 알고 한숨이나 쉬었는데 웬걸. 물이 너무너무 좋아.”
“으이구, 머리야. 말하는 뽄새 보니까 벌써 한 판 뛰었구만.”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주라~.”
우리도 각자에게 배정된 침상에 올랐다. 시종들이 다가와서 바르바토스와 나의 맨발을 물로 씻었다. 발가락 틈새가 시원해졌다. 그들은 곧바로 향기 좋은 술을 종류별로 진상했다.
천막 너머에서 은은하게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아마 음악가들이 이곳 중심지를 둘러싸고 연주하는 것 같았다. 피리 소리가 허파를 간지럽혔다.
미남 미녀, 고급 술, 거기에다 음악까지. 이래서야 누구든지 적의가 사라지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겠지. 대단했다. 회합을 주최한 마왕 마르바스는 작정하고 연회를 연출한 게 분명했다.
“근데 그쪽 신사 분은? 내 기억에 없는걸.”
“서열 제71위 단탈리안입니다. 금발이 아름다운 마왕이시여.”
“아아!”
가미긴이 침상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네가 단탈리안이구나! 와아. 뭐 되게 음흉하고 썩어빠진 할아버지를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젊게 생겼네.”
내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되게 음흉하고 썩어빠졌다는 거냐. 재차 강조하지만 나처럼 순수한 인간이 따로없다.
“아! 걱정하지 마. 난 음흉하고 썩어빠진 할아버지가 취향이거든!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박히면 나도 꼭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이 좋아. 막 달아올라!”
“…….”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잠깐이지만 매우 고민했다. 바로 내 옆의 침상에 자리 잡은 바르바토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 녀석 마조히스트야.”
새디스트 바르바토스에 마조히스트 가미긴인가. 마왕들은 성적 취향이 실로 다채로웠다.
댁들이 얼마나 신나는 사생활을 즐기는지 관심도 없고 딴죽 걸고 싶지도 않았지만, 웬만하면 초면의 인간한테까지 자기 성적 취향을 나불나불 떠들어대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하잖아.
혹시 그거냐? 일종의 관음증이냐. 자기 취향을 적나라하게 밝힘으로써 뭔가 쾌감을 느끼는 것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로군……. 내가 마왕 중에서 가장 순수하다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헤에. 막막 신기하다. 얘, 반말해도 괜찮지?”
“물론입니다.”
“응, 응. 그럼 이제 우리 친구니까 거리낌없이 뭐 좀 물어볼게!”
반말하면 친구인 건가. 심플한 인간관계였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려 할 때, 가미긴이 싱글벙글한 안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뜸 말했다.
“파이몬 내가 죽여도 돼?”
“…….”
뭐라고 할까.
정말로 단도직입적이군.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만 띄우고 있자, 가미긴이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
“예전부터 진짜 죽이고 싶었거든, 파이몬! 과반수가 넘는 마왕을 자기 파벌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싫었어. 게다가 그 아이, 만날 마계사회의 명분을 뒤에 업고 행동해~. 차암. 죽이면 죽이는 대로 내가 엄청 욕 먹을 게 뻔해서, 나 진짜 진짜 많이 참았는데에.”
그녀는 하얀 이빨을 내보이면서 웃었다.
“이젠 죽여도 되겠지?”
“…….”
“이거 비밀인데, 너희 둘한테만 말해줄게.”
가미긴이 오른손으로 입가를 막으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주변의 시종들한테 다 들리니까 의미가 없을 텐데도.
“지금 여기 천 미터 상공에 와이번 삼백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거든~? 내가 명령만 내리면 바로 와악! 하고 공격해올 거야. 헤헤. 귀엽지만 그럭저럭 강한 아이들이라서. 우리끼리 힘을 합치면 파이몬 한 명은 몰이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A급 몬스터 와이번 수백 마리. 회합에 참가해서 평화롭게 연회를 즐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저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죽음의 함정을 파놓았노라고 밝혔다……표리부동의 간웅인가.
아니다. 자기가 지닌 힘에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명분만 갖추어지면 서열 제9위의 마왕 따위 단번에 멸살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그러니 저토록 여유로우면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논할 수 있다. 그런 거다.
나는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얘기했다.
“산악파는 마왕군에서 제일가는 세력입니다. 섣불리 건드리면 가미긴 님한테 이익이 되지 않을 텐데요.”
“으응? 잘 모르겠는걸. 원래 명분만 있으면 짓밟아도 괜찮은 거 아니야?”
금발의 가미긴이 정말로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산악파라고 해서 딱히 파이몬을 황제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도 아니잖아. 시트리를 포함해서 대여섯 명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을 텐데, 걔네들 정도는 충분히 뭉개버릴 수 있어! 자랑은 아니지만 나 제법 쎄거든!”
“…….”
“파이몬이랑 걔네만 모가지를 잘라버리면 나머지 산악파 애들은 적당히 타협할걸. 뭐, 타협하지 않으면 걔들도 없애버리자. 헤헤.”
나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새로운 손님들이 속속 들어왔다. 서열 제3위의 바싸고, 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와 서열 제10위의 부에르, 주최자인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 그들은 서로를 반기거나 예의상 인사하거나, 대놓고 적대했다. 그러나 마르바스가 앞장서서 중재에 나서자 대체로 분위기가 좋게 흘러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이 들어왔다.
그녀는 부관으로 서열 제12위의 시트리를 대동했다. 파이몬은 의례적으로 마왕들과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은 그저 눈인사를 나누었다. 파이몬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도 발푸르기스의 밤을 떠올리면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것일까.
“와아, 이 년이 어디서 온 년이야.”
바르바토스가 즐겁게 말했다.
“파이몬. 너 되게 반갑다. 그치? 깔깔.”
“…….”
“야, 그래도 지가 뻔뻔한 줄은 아나보네. 저거 입 꽉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 좀 봐. 지 정조도 저렇게 단단하게 지켰으면 창녀라고 불릴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러냐, 이 창녀 새끼야?”
“입 닥쳐. 거 싸가지 없게 말하네.”
파이몬을 대신해서 말대꾸한 사람은 서열 제12위의 시트리였다. 게임상에서 그녀는 파이몬과 의자매를 맺고 있었다. 여기서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입 닥쳐라,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는 창녀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내가 무슨 하하호호 사이 좋게 화해하겠답시고 여기 놀러온 줄 알아? 너희 산악파 새끼들 조질려고 온 겁니다, 양성애자 버러지야.”
“하, 우리가 만만해 보여?”
시트리가 이죽거렸다.
“너희 평원파 좁밥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쓸어버릴 수 있어. 바르바토스, 너 며칠 전에는 아주 찔찔 울었다면서? 한번 울고났더니 정신이 나갔냐? 어디 한판 붙어볼래?”
“깔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아군 뒤통수 까는 것밖에 없는 새끼가 잘도 나불거리네.”
바르바토스가 황금빛 눈동자로 싸늘하게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오냐, 한판 붙어주마. 네 년 좆대가리를 잘라서 파이몬 저 창녀의 입구멍에 박아줄 테니 감사히 여기라고. 죽어서도 펠라를 받을 수 있으니 존나 좋겠네요.”
“이 새끼가……!”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면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자네들은 내 예상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군. 한 번쯤은 벗어나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어. 여기에 어디 산악파와 평원파만 모인 줄 아는가? 자제하게.”
“아니, 자제하지 못하겠어.”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마르바스 할아범. 난 할아범의 태도를 존중해. 하지만 파이몬 저 썅년은 도저히 두고볼 수 없겠다 이거지. 여기서 내가 그냥 물러가면, 응? 내가 아주 물로 보일 거 아니야? 안타깝지만 난 곱게 그런 취급 당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그녀가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파이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선언했다.
“연회고 뭐고 다 나중 이야기다. 나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동족을 배신한 건에 대하여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을 추궁하겠어. 이를 위하여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청문회를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