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11화 (111/510)
  • 00111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마르바스 영감이 회합을 열었어.”

    바르바토스가 채찍을 거둬들이고 말했다. SM 플레이를 강요받은 나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바지춤을 올렸다. 바지가 엉덩이에 닫자 무진장 쓰라렸다…….

    “회합?”

    “마르바스 영감이랑 창년, 나, 이렇게 삼자대면하자는 거지.”

    창년은 파이몬을 뜻하는 말이었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을 단순히 창녀라고 부르는 데 만족하지 못했는지 특별히 창녀 + 년, 이라는 용어를 개발했다. 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가지 마. 마르바스는 파이몬이랑 너를 중재시키려고 할 거야. 굳이 지금 나갈 필요가 없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바르바토스, 너가 훨씬 더 유리해지거든.”

    “흐응.”

    제2군단만이 아니라 제3군단, 제4군단, 제5군단. 이들이 전부 도착할 때가 바로 회합을 열어야 할 기회이다.

    마왕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산악파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놀아나지 못한다. 마왕군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어디까지나 서로 적군이니까. 마왕군인 동시에 제국군의 아군이기도 한 산악파는 입장이 한없이 곤란해진다……반면에, 우리 평원파는 입장이 유리해지겠지.

    “그럼 그냥 대기해야겠네.”

    “어. 시간은 우리 편이야.”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평원파에 소속한 마왕들도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명예롭게 닥돌할까 비겁하지만 일단 살아남을까' 하고 고심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진영을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특히 벨레드 형님이 곧잘 웃었다. 브란덴부르크의 영주성에서 그랬듯이 마왕들 몇몇을 모아서 자그맣게 연회를 벌이기도 했다. 진중에서 술을 마신다라……뭐, 과하지만 않다면야 상관없다.

    하지만 나한테 억지로 술을 먹이는 것은 제발 그만해주기를 바란다. 서열 제13위 마왕 벨레드, 이 양반은 삼국지연의로 따지면 장비 같은 양반이라서 세상 사람이 죄다 자기처럼 말술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 이 신장 4미터의 오우거 혼혈아는 역도 선수마냥 1미터짜리 술독을 그대로 들어올려서 원샷해버린다!

    “크아아. 인간놈들도 좋은 술을 담글 줄 안단 말이지.”

    “…….”

    나는 1미터짜리 술독이 텅 비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위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1미터 가량의 술이 들어가도 괜찮을 정도로 위장이 거대하다면, 그건 이미 위장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아닐까.

    “꺼륵.”

    벨레드가 트림질을 했다. 끔찍한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실신하고 싶었다. 근처를 지나가다 억지로 붙잡힌 것만도 억울한데, 딴 사람의 입냄새까지 관람해야 하다니……세상사란 정말이지 요 모양 요 꼬라지다.

    “자아. 단탈리안. 자네도 들이켜!”

    술잔에 벨레드가 술을 콸콸 따랐다.

    “너무 많은데요…….”

    “어허, 사나이라면 이 정도는 콧구멍으로 마실 수 있어야지!”

    댁의 기준에서 사나이라면 일단 오우거 핏줄을 타고날 필요가 있어보인다. 안타깝게도 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눈앞의 오우거 혼혈아는 눈알이 삐었는지, 나를 자기 동족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서 단번에 들이켰다.

    “오오.”

    주변에서 마왕들이 과장스럽게 탄성을 내질렀다. 한 마왕이 말했다.

    “괜찮은데? 허우대처럼 생긴 것치고 술은 꽤나 마시는구만.”

    “허우대는 또 뭡니까.”

    웬만하면 귀공자 스타일이라고 불러주기를 부탁한다. 대세는 너희처럼 근육 마초가 아니다. 나처럼 선이 가느다란 미소년 스타일이다. 정말이다. 난 방구석폐인이 아니라 그저 은둔생활을 애호하는 귀공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큭, 베파르도 졌다! 벌써 네 명이나 쓰러졌다고!”

    “하하하! 감히 나를 술싸움에서 이기려면 이보다 세 배는 더 갖고 와라!”

    서열 제42위의 마왕 베파르가 꼬꾸라졌다. 그 말고도 땅바닥에 마왕 세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벨레드 형님과 술내기를 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다. 실로 한심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주정뱅이들은 왜 져도 꼴불견이고 이겨도 꼴불견일까.

    “그 다음은 자네 차례야, 단탈리안!”

    벨레드가 입에서 술을 튀겨가며 나를 지명했다.

    “엑!? 왜 접니까?”

    “자네가 나의 아우이기 때문이지. 나의 아우라면 응당 나만큼 마셔야 해!”

    나한테 강제로 술잔이 주어졌다. 주방에서 혹시 술잔이 아니라 대접을 착각해서 가져온 것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큼직한 사기그릇이었다. 거기에 벨레드가 술을 쏟아부었다.

    “혀,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으으음? 뭐라는지 안 들리는걸――?”

    우라질, 설마 지금 귀여운 척한 건가? 당장 혀 깨물고 자살해줬으면.

    ……아니다. 침착하자. 제아무리 벨레드 형님일지라도 일단 위장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을 터.

    내 앞에서 네 명이랑 술마시기 싸움을 했으니 위장의 상당 부분이 들이찼을 거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벨르드는 더 이상 체내에 액체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즉, 승산이 충분하다!

    내가 훗, 하고 웃었다. 몸만 쓸 줄 아는 전사와 다르게 머리까지 쓸 줄 아는 자의 여유였다.

    “좋습니다. 평원파 최고의 주당이라는 명성, 제가 뺏어드리지요.”

    “바로 그 기세이지. 크하하, 덤비게나, 아우!”

    나는 기합을 지르면서 대번에 술을 들이켰다.

    기억이 날아갔다.

    힘겹게 눈을 뜨자, 거기엔 땅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진 일곱 명의 마왕과 내가 있었다. 그중에 벨레드는 없었다. 아마 내가 쓰러진 직후에도 연달아 두 명이 더 패퇴한 듯했다. 전멸이었다.

    인생, 익숙하지 않은 것에 모험하면 안 된다.

    이처럼 작은 사건사고가 있었지만……대체로 평원파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인간군과 마왕군, 양측의 대치가 계속되었지만 불안함이나 패배심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나치게 마음을 풀어둔 것도 아니었다. 징집병을 훈련시켰다. 군진을 보강했다. 마음에 여유를, 그러나 경계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평원파의 마왕들은 대개 전쟁에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다. 언제 어떻게 긴장을 풀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리가 진영을 차린 브루노 평야에 군대가 속속 모여들었다.

    우선 바타비아 공화국군이 도착했다. 그들이 합류하자 평원 저편의 인간군이 환호성을 질렀다. 합종연횡을 공모하는 지휘부와 다르게, 일개 병사들 입장에선 인간은 인간의 편이었고 마인은 마인의 편이었다. 속 편하게 환영할 수 있겠지.

    다음으로 사르데냐 왕국군, 폴리투니아 왕국군이 거의 동시에 들이닥쳤다. 각각 2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위용이 대단했다. 평원 저편이 인간군의 막사와 깃발로 수해(樹海)를 이루었다. 이로써 인간군은 합스부르크-프랑크-바타비아-사르데냐-폴리투니아, 다섯 국가가 연합하여 무려 8만 대군을 이루었다. 인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딱 나흘 동안만.

    “주군! 얼른 밖으로 나가봐라!”

    라우라가 막사에 허겁지겁 들어왔다. 뭔가 사단이 일어났나 싶어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요새?”

    엄청나게 커다란 요새가 '움직이고' 있었다. 대략 오십에서 팔십 미터 상공에 떠다니는 그것은, 몸체에 비해 몹시 가느다란 집게발 여섯 개가 지탱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저절로 떠올랐다.

    물론 움직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비슷한 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요새는 몸체가 홀쭉했고 다리들도 길었다. 게다가 몸체만큼 거대한 톱니바퀴 세 개가 성채에 박혀 있었다. 톱니바퀴들은 끊임없이 털털털 돌아갔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라서 몬스터들이나 마왕들이나 막사에서 뛰쳐나와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로지 바르바토스만이 냉정하게 말했다.

    “저거, 발레포르야.”

    “발레포르? 서열 제6위?”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발레포르의 마왕성이야. 기동성채(機動城砦) <라비린토스>.”

    세상에! 내가 입을 떡 벌렸다. 게임상에는 저런 괴물 같은 던전이 없었다. 발레포르는 분명히 여느 최상위권 던전과 마찬가지로 으리으리한 궁성을 지어놓고 살았다. 다만 평지가 아니라 바다에 궁전이 있다는 게 특이점이었는데……잠깐만. 바다?

    내가 물었다.

    “야. 혹시 저 마왕성 평상시에는 어디에 있냐?”

    “게르마니아 바다에 짱박혀 있지. 발레포르 쟤가 바다를 엄청 좋아하거든.”

    “아이고.”

    상황이 파악되었다. 저 무시무시한 마왕성은 원래는 바다에 위치해서 겉으로만 보면 꼭 수면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처럼 걸어다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던전 어택 폐인인 나도 저런 설정이 숨겨져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서열 제6위 발레포르의 마왕성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빌딩 같은 게 없는 시대였다. 평생 살아도 10미터보다 높은 건물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자그마치 육칠십 미터짜리 건축물이, 그것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축물이 등장했다. 인간군의 사기는 당연히 떨어졌다.

    참고로 서열 제6위 발레포르는 서열 제3위 바싸고와 함께 월맹군 제4군단을 이루었다. 단 두 명이서 하나의 군단으로 취급받는 것이었는데, 저 정도면 가히 군단급이라 할 만했다. 생각해보라. 난공불락의 성이 직접 이리저리 움직인다. 전술적 가치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날. 서열 제2위 아가레스가 이끄는 월맹군 제3군단이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할 무렵에 프랑크 제국의 본대도 당도했다. 마치 순서를 앞다투는 달리기 시합처럼 대륙의 모든 군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슬슬 교통이 정리되었다.

    인간군의 병력은 이러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 이만 명, 튜튼 왕국군 이만 명, 바타비아 공화국군 오천 명, 프랑크 제국군 삼만 오천 명, 사르데냐 왕국군 이만오천 명, 폴리투니아 왕국군 이만오천 명, 브르타뉴 왕국군 오천 명.――도합 13만 5천의 병력.

    마왕군의 병력은 이러했다. 제1군단 삼만 명, 제2군단 이만 명, 제3군단 삼만오천 명, 제4군단 오천 명, 제5군단 오천 명, 제6군단 일만오천 명.――도합 11만의 병력.

    양군의 병력을 전부 합치면 물경 20만 병력 단위의 전쟁이었다. 인간계든 마계든 이번 한판 승부에 판돈을 전부 걸었다.

    파이몬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인간군이랑 한편을 먹는다? 일단, 엘리자베트 제3황녀가 인간군의 실권을 쥐지 못한 것이 분명하므로――이제 열일곱 살짜리 여자, 그것도 황제가 아니라 고작 '유력한 후계자'인 그녀가 어떻게 저런 대군의 우두머리로 인정받겠는가?――인간군 수뇌부들이 파이몬과 어디까지 협조할지 불분명하다. 뒤통수를 갈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게다가 이쪽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디 배신할 테면 해보라 이거다. 평원파의 제6군단만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마계인들도 납득하겠지만, 제2군단에서 제6군단까지 싸그리 희생양으로 삼는답시면 세상에 누가 그걸 고작 희생양으로 여기겠는가.

    명분을 내세울 수도 없다. 그냥 불구대천의 배신자가 되어버리는 거다.

    “마르바스 영감이 회합을 또 요청했는걸.”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으면서 내게 서신을 넘겼다. 거기에는 정중한 필기체로 '각 군단의 군단장 및 최고참모가 한 자리에 모일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이제는 참석해도 되겠지?”

    “물론이지. 가서 파이몬의 죽빵을 날려버리자.”

    우리 둘이 마주보면서 음흉하게 낄낄거렸다. 정말 마왕다운 모습이었다.

    “참. 하지만 넌 되도록 울상을 지어야 해.”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주의를 줬다.

    “우리 군단장 각하께서는 사악한 파이몬의 계략에 휩쓸려 희생되실 뻔한, 순진무구한 소녀이니까. 억울한 티를 팍팍 내라고.”

    “깔깔깔. 걱정하지 마, 짜식아. 내가 또 한 순진하걸랑.”

    “세상에 순진이 다 뒈졌습니다.”

    “너부터 뒈지고 싶냐?”

    우리는 서로 툭탁거리면서 회합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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