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10화 (110/510)
  • 00110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  *  *

    도박에서 승리했다.

    마르바스가 제2군단을 이끌고 평야에 나타났을 때, 무심코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실 적당히 시기를 봐서 검은 산맥으로 후퇴하자고 건의하려 했다. 아무래도 인간군이 집합하는 것보다 월맹군이 도착하는 것이 늦어질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마르바스는 내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호감도는 쌓아두고 볼 일이었다. 청문회 때 파이몬에게 굳이 죄과를 묻지 않고 좋게 좋게 넘어간 것이, 결과적으로 청문회 사회자였던 마르바스의 호감을 샀다. 그 호감이 이번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청문회에서 모든 것이 비롯했다……. 무소속에 불과한 내가 바르바토스와 인연을 맺어 평원파가 되었고, 그것이 제8차 월맹군으로 이어졌다. 세상사가 참 얄궂지 않은가. 지금 파이몬이 맞이한 불운은 어찌되었든 본인이 자처한 셈이었다.

    “네 자식이 마르바스 영감을 불러들였다 이거지.”

    바르바토스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정보를 털어놓았다.

    나중에 가면 내가 모든 일을 기획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질 터였다. 그러느니 어느 정도 바르바토스한테 미리 고백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평원파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아니라고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바르바토스는 훌륭한 버팀목이었다. 다른 마왕들의 공격을 대신해서 막아줄 버팀목.

    “그래.”

    “……왜 나를 속였어?”

    내가 피식 웃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웃어? 지금 웃었냐?”

    “아, 당연하지. 웃기니까.”

    바르바토스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찰싹, 하고 내 뺨을 강타했다.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무력 능력치가 수백에 이르렀다. 나는 꼴사납게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입안이 저릿저릿하고 피맛이 느껴졌는데, 혓바닥에 무언가가 토돌토돌하게 굴러다녔다. 이빨이었다.

    “웃지 마.”

    지극히 무감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다. 감정을 제어하는 것일까. 아예 감정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화가 들끓는 것일까. 나는 퉤, 하고 이빨을 뱉었다.

    “내가 속였다고? 너야말로 웃기지 마라, 바르바토스. 단 한 번도 너를 속인 적 없어.”

    “개새끼가 지금 어디서 궤변을――.”

    “닥쳐!”

    내가 몸을 일으켜서 바르바토스를 직시했다.

    아, 이제는 확실히 그녀의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분노였다.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믿었던 이에게 속아서 치를 떨고 있었다. 너답지 않구나, 바르바토스.

    “네 마왕성에 처음으로 찾아간 날, 기억하냐? 빌어먹을 발레르뇽 포도주를 처마신 날 말이다. 거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월맹군을 조직하자고 결의했지. 대단한 음모였어. 안 그래?”

    그녀가 나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나는 개의치 않고 얘기했다.

    그때 우리 둘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대다수의 마왕은 인간계 정복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계를 정복해버린 다음엔 최상위 마왕들이 하위 마왕들을 어떤 의미로든 말살해버릴 테니까, 이것이 내분의 원인이다, 고로 월맹군이 성공하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마왕의 숫자가 적어질 필요가 있다…….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그래서 씨발! 네놈이 말했잖아! 어차피 마왕놈들이 싸우지 않을 바에야 인간 새끼들을 쳐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분명히 그랬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마왕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다. 용사를 필두로 마왕들 정벌이 이루어지겠지. 그전에 인간의 세력을 잔뜩 약화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 공격해오게 만들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면 이기적인 마왕놈들도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다.――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냐, 바르바토스?”

    “뭐?”

    “내가 얘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을 텐데.”

    웃음이 새어나왔다.

    “난 분명히 얘기했어. '마왕의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라고.”

    “……!”

    바르바토스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런가. 이제 조금 깨달았는가.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한테 맞은 뺨이 욱씬거렸다. 내가 계속해서 지껄였다.

    “월맹군을 일으키기만 하면, 응? 마왕의 수가 줄어든다고 생각했어? 내가 고작 그 정도 수단만 고안했다고 보았냐. 네 애첩의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걸……크으.”

    “너…….”

    “그래. 전부 내가 했어.”

    일부러 변경백의 영지를 먹으라고 했다. 그래야 인간계의 수뇌부가 초조해하므로.

    일부러 황태자를 잡으라고 부탁했다. 그래야 다른 나라들도 끌어들이므로.

    일부러 파이몬이 올 것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그래야 다른 마왕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내가 흥분되어 소리쳤다.

    “평원파는 미끼다! 마계와 인간계의 모든 군사를 끌어들이기 위한 개미지옥이지! 여기, 합스부르크의 부르노에서 대륙의 군세는 모조리 집결한다. 바로 여기서 악몽이 시작되는 거다.”

    “…….”

    “내가 너를 속였다고? 다시 한번 말해주지.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애시당초 너는 마왕들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어. 이번 월맹군의 목적 자체가 그거였다. 나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게 행동했을 뿐이야. 안 그러냐?”

    바르바토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기에, 더 이상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옳다는 사실을.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러면……나한테 미리 말해줘도 됐잖아.”

    “안돼.”

    내가 즉답했다.

    “우리 평원파는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에 놓여야 한다. 행여라도 우리가 일부러 계략을 파놓았다는 얘기가 나돌아서는 절대로 안돼. 잘 봐. 내가 말하지 않은 덕분에 너는 진심으로 울 수 있었어. 그걸 지켜본 마왕들과 몬스터들은 널 절대적인 피해자로 여기겠지.”

    나 단탈리안이 파이몬을 의심한 탓에 우연히 그녀의 계략을 알아차렸다. 어디까지나 그런 시나리오가 성립해야만 한다.

    제8차 월맹군이 끝난 이후에 평원파는 명분을 쥐게 된다. 가장 선두에서 마계를 위해 싸웠다는 명분이. 반면에 산악파는 '마계를 위해 동족을 공격했다'라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동족을 공격하려 했다'라는 오명만 짊어지게 된다.

    잘만 하면 산악파가 평원파보다 우세한 현재의 정국이 뒤바뀔지 모른다……마왕군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든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병법의 기본이야. 칭찬받지 못할망정 뺨다귀를 맞을 일 따위, 나는 하지 않았어.”

    “…….”

    또 다시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르바토스가 불쑥 물었다.

    “너의 그……인간 참모는?”

    “어?”

    너무 뜻밖의 내용이라서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인간 비서, 즉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뜻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왜 라우라 얘기가 나오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재차 말했다.

    “인간 참모는 알고 있었냐고. 네가 전쟁을 전부 조작했다는 거.”

    “……아니.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전부 알지는 못하지. 난 부하라고 해서 뭐든지 다 알려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럼, 다른 사람은?”

    머릿속에 라피스가 떠올랐다.

    “있는데.”

    “한 명? 여러 명?”

    점점 더 질문의 의미가 알쏭달쏭해졌다. 아니,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떠올리고 대답했다.

    “두 명. 아마도.”

    “두 명이라.”

    다시 침묵.

    도대체 뭐냐.

    내가 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자코 있자니,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더니 무언가 중얼중얼 속삭였다. 알아듣진 못했어도 그게 마법주문이라는 것은 알아차렸다.

    “좋아.”

    하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여긴 완전히 봉쇄됐어. 여기서 비명을 질러도 바깥에선 전혀 못 들어.”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존댓말로 지극히 공손하게 질문했다.

    “……저기, 바르바토스님. 왜 그런 마법을 부린 겁니까?”

    “후우.”

    그녀가 음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이 절망하고 또 절망했는데, 네놈은 혼자서 마음 편하게 놀고 있었다 이거지. 심지어, 뭐? 나는 모르는 걸 세상에서 두 사람이나 알고 있어?”

    “어, 어?”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 지랄하네. 시발. 그러면 나는 그냥 아군이고 그 두 년놈은 진짜 아군이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뭐 때문인지 몰라도 바르바토스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아우라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 나한테 뺨따귀를 날릴 때보다 심기가 더 불편해진 것 같았다!

    “나는 네 새끼가 처음이었는데……단탈리안 주제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바람을 피워? 앙?”

    “자, 잠깐만! 바람? 바라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식겁해서 소리쳤다.

    “우리가 언제 정식적으로 사귀기나 했냐!”

    “시발 새끼야. 난 이천 년 동안 처녀였어. 세계적인 처녀를 따먹었으면 응당 그에 걸맞게 책임을 져야지, 엉?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주지 못할지언정 감히 속여?”

    “내가 언제 널 따먹었어! 네가 나를 따먹은 거지!”

    “하. 난 처녀였고 넌 아니었잖아.”

    얘가 돌았나!

    내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네가 처녀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색정 마법까지 걸어서 졸라 발정시킨 게 누구신대!”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웃는 낯빛인데도 어딘지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치 너 방금 내 역린을 건드렸다, 라는 느낌이었다.

    “헤에. 뭐야? 나랑 떡쳐서 싫었다는 얘기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좋았냐?”

    내가 매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좋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대번에 사신의 낫이 소환되어 내 모가지를 댕겅 날려버릴 게 틀림없었다. 실제로도……나쁘지 않았고.

    바르바토스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컨대 너는 겉모습이 열두 살 소녀를 기분 좋게 따먹었고, 심지어 그 소녀는 네가 첫 남자였는데도, 너는 남자답게 책임을 지지 못할망정 속여 먹었어.”

    “…….”

    “세간에서는 보통 그런 남자를 개새끼라고 부르지. 개새끼야.”

    아니다, 정말로 뭔가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아무튼 아니었다. 무척 억울했다.

    게다가 바르바토스 저 년은 남자만 처음이었을 따름이지 여자랑은 질펀하게 놀아대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청순한 척, 남자한테 처음을 빼앗긴 척 굴면 어쩌자는 얘기인가. 어째서 내가 잘못한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거냐.

    “그리고 개새끼는 개새끼처럼 쥐어패야 마땅하지.”

    솨아악, 하고 바르바토스의 손아귀에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채찍이었다.

    식은땀이 등에 흘렀다.

    입술을 열었지만 혀가 제멋대로 떨었다.

    “바, 바르바토스. 왜 화났는지 몰라도, 우리 제발 이성적으로 대화하자. 응?”

    “병신아. 왜 화났는지 모르니까 화내는 거다.”

    바르바토스가 양손으로 채찍을 잡아 당겼다. 마치 채찍이 얼마나 질긴지 확인해보겠다는 것처럼. 적어도 내 쪽에서 보기에, 채찍은 무척이나 단단해보였다. 나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정보였다.

    “참고로 네 자식이 입을 열어서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내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거든? 그러니까 얌전히 입 닥치는 편이 네놈 신상에 이로울 거야.”

    “미안해. 내 계획을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일단 무조건 사과해보기로 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여하간 여자에겐 무조건 사과하는 게 정답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헌데 어째서인지 바르바토스는 차갑게 비웃을 뿐이지 않겠는가.

    “병신은 끝까지 병신이지. 하, 내가 존나 뭐에 씌였다고 이딴 놈한테!”

    “으, 으아아아악!?”

    채찍이 매섭게 날아왔다.

    그 다음 일은, 나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생략하겠다.

    다만 내가 살아남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빌었으며, 최종적으로 바르바토스의 마음이 풀어졌다는 사실을 말해둔다. 물론 왜 바르바토스가 그토록 화났는지는 끝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언제는 개새끼 같아서 좋다고 껄떡였으면서 이젠 개새끼 같다고 쥐어패다니.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대, 아마도 쪽 팔리게 부하들 앞에서 울어버린 것을 내 잘못으로 돌리려는 것 아닐까 싶다. 바르바토스는 자존심이 엄청 강하니까. 부하들이 듣는 앞에서 울었다는 걸 평생의 치욕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럼 날 그렇게 때릴 만도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부당하지 않는가? 불합리하다……내가 마음이 대해(大海)처럼 넓은 남자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삐져서 평원파를 탈퇴했을 거다. 못돼 처먹은 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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