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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08화 (108/510)
  • 00108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그날 파이몬은 마침내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황녀측과는 이미 마법수정구로 통신선을 마련해두었다.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알기 어렵도록 매우 이른 새벽에 진군하기로 합의했다. 여차하면 바르바토스가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사실 이것이 파이몬에게는 불행 중 행운이었다. 새벽에 진군하려고 정찰병 또한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이 부지런한 늑대기병의 짐승과도 같은 눈동자에 일단의 무리가 비추었다.

    그는 처음에는 몬스터 부락이 이동하는가 싶었다.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에선 계속해서 지원군을 받고 있었고, 그 대가로 향기롭기 그지없는 인육의 넙적다리를 보장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으으, 넙적다리 한입만 물어봤음 니미럴 소원이 없겠다.’

    설마 모든 지원병에게 넙적다리를 하사할 정도로 제6군단 놈들이 풍요롭진 않으리라. 그래도 군침이 고이는 선전이었다.

    자신이 속한 제1군단에선 인간과 전투를 치르지 않았기에 인육이 없었다. 심지어 파이몬 군단장은 인간 마을을 약탈하는 것조차 군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높으신 분들 생각이야 모르겠으나, 제1군단의 몬스터들은 인간의 마을과 도시를 지나칠 때마다 무던히도 정신 수양을 해야 했다. 저건 인육이 아니다, 저건 인육이 아니다, 저건 인육이 아니다……. 늑대기병은 빌어먹게도 신앙심이 부쩍 굳건해졌다.

    꿩 대신 닭이었다. 제1군단은 근처의 몬스터 부락을 싸그리 전멸시키면서 행군했다. 고블린 고기나 오크 고기도 제법 먹을 만했다.

    늑대기병은, 아마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으로 향하는 몬스터 부락 지원병을 발견한 모양이라면서 신중하게 그들을 추격했다. 행선지만 알아낸 다음에 얼른 본부로 돌아가서 자기가 식량감을 발견했노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오크일까, 고블린일까. 덩치가 좀 되어보이니까 오크겠지. 끌끌. 귓살은 내 꺼……허억!?’

    다크엘프 늑대기병이 본능적으로 어둠에 은신했다. 그는 늑대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여서 최대한 몸을 굽혔다. 얼굴만은 전방을 향했는데, 그의 시선이 심하게 떨렸다.

    고작 몬스터 부락민이 아니었다. 수십 명인 줄 알았던 인파는 수백, 아니 수천에 이르렀다. 그들은 야밤인데도 깃발을 펄럭이면서 엄중한 항오를 이루며 걸어가고 있었다.

    ‘기, 기, 기사단이잖아!?’

    척후병들은 출진하기 이전에 대륙의 주요 기사단 문장을 전부 외웠다. 특히 제1군단 척후병은 그들이 본래 진출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튜튼 왕국의 기사단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밝은 밤눈은 순식간에 저 일단의 무리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붉은 뾰족방패 기사단>의 군기(軍旗)임을 알아보았다.――튜튼 왕국의 근위기사단이었다!

    ‘시발, 냅따 토끼자……아니. 잠깐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려던 다크엘프가 생각에 잠겼다.

    기사단은 두려웠지만 그 이상으로 호기심, 그리고 척후병으로서의 사명감이 앞섰다. 이곳은 튜튼 왕국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였다. 어째서 튜튼 왕국의 기사단, 그것도 왕실을 수호하는 근위기사단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다크엘프는 실로 현명하게도, 이것이 어쩌면 이번 전쟁의 행방을 결정할 만큼 중대사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는 재빨리 연필을 꺼내들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 후방 약 90킬로미터. 튜튼 왕국의 군대 발견. 최소 일천 이상. <붉은 뾰족방패 기사단> 포착.

    다크엘프가 종이를 둘둘 말아서 늑대의 목에 달린 목걸이통에 집어넣었다. 그는 늑대로 하여금 빠르게 본부로 돌아가서 이 명령서를 전달하라 명령한 다음, 자신은 그대로 기사단의 뒤를 몰래 쫓았다.

    이 늑대기병의 신속한 행동으로 인해 월맹군 제1군단은 난데없이 튜튼 왕국군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두 시간만에 입수했다.

    여기에다 늑대기병은 과감하고 신속한 정찰을 통하여, 적군이 튜튼 왕국군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변경백 군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적어도 아홉 개의 기사단과 이만의 보병으로 채워졌다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늑대기병은 이렇게 충분히 정보를 알아냈다고 생각하자마자 최대 속력으로 달음질쳤다. 그 결과 제1군단은 적군의 대략적인 규모를 그날 아침에 알 수 있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늑대기병이 '대단히 영민한 판단과 용감무쌍한 담력을 겸비했다'라는 이유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물론 그가 그리도 염원하던 인육의 넙적다리도 부상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늑대기병 개인의 행운과 별도로, 제1군단 수뇌부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튜튼 왕국군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새벽에 예정되었던 공격 예정은 전격적으로 파기되었다. 파이몬을 포함하여 스물여덟 명의 산악파 마왕들이 단잠에서 깨어나 본부 천막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중엔 세수도 하지 못해서 표정이 어리버리한 마왕도 있었다.

    파이몬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일이 아니와요. 왜 튜튼 왕국군이, 게다가 근위기사단까지 우리군 후방에 등장한 것이죠?”

    마왕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이라고 이유를 알 리 만무했다. 다만 이 자리에 모인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 있었다. 튜튼 왕국군이 결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마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합스부르크의 황녀가 지원군으로 불러들인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한테 비밀로 숨기고요?”

    “예. 사실 황녀가 우리를 온전히 신뢰할 거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인간놈들이 보기에는 제6군단이든 우리 제1군단이든 다 같은 마왕군이잖습니까. 만일 우리가 놈들을 배신하고 제6군단이랑 붙어먹어서 합스부르크를 공격하면 어떡한가, 그런 불안감이 있을지도…….”

    파이몬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럴싸했다. 즉, 황녀는 제1군단과 연합하여 제6군단을 격파하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이쪽을 배신하여 튜튼 왕국군과 연합, 제1군단을 격파한다.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파이몬은 배신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2차 월맹군에서 아군한테 뒤통수를 당한 이후로――그네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고, 실제로 증거도 있었지만, 그런 얘기를 순순히 믿을 만큼 파이몬은 멍청하지 않았다――그녀는 거의 광적으로 배신을 예방했다.

    이번에 황녀와 협조하면서 파이몬은 수십 개의 마법적인 장치를 걸어두었다. 그중에는 군사적 사안에 관련하여 절대로 정보를 차단하지 않는다는 맹세도 포함되었다. 전설의 10서클 대마법사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에야 맹세를 깨부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구만요.”

    다른 마왕이 말했다.

    “저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후려까려고 왔다는 거 말입니다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고…….”

    “……그러게 말입니다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침쯤에 늑대기병이 도착하여 후방의 적군에 합스부르크 변경백군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변경백이 외국의 군대를 이끌어들인 것 같다'라고 추측했다. 이 변경백은 검은 산성 일대를 수호하는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과 다르게, 합스부르크-튜튼의 경계선을 지키는 폰 베스트팔렌 변경백이었다.

    어찌되었든 적군이 등장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제1군단은 시급하게 후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황이 묘해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엘리자베트 황녀의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월맹군 제1군단이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을 포위하는 양상이었다. 이제는 제6군단과 튜튼왕국군이 파이몬의 제1군단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파이몬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하루이틀만으로 고급 정보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바로 그 하루이틀 사이에 또 다른 첩보가 들어왔다.

    “프랑크 제국군이 나타났다고요!?”

    ─ 그렇다. 본인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군.

    마법수정구가 띄운 막에서 엘리자베트 제3황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오늘 아침에 프랑크 제국군 4천 명이 측면에서 접근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경이 아니라 아마도 튜튼 왕국의 국경을 돌파하여 온 듯하다면서.

    ─ 일단 우리쪽에서 급히 사신을 파견했네. 그때 가야 전후사정을 파악하겠지……허나, 합스부르크의 영내를 침범하면서도 아무런 통보도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우리한테 유리한 일은 아닐 것일세.

    “그렇다면……적이라는 뜻인가요?”

    ─ 적어도 각오 정도는 해두어야겠지.

    마법수정구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꺼져들었다.

    상황이 급박해졌다. 튜튼 왕국의 2만 병력에 비해 프랑크 제국의 4천 병력은 분명히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여러 국가의 군대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했다.

    무언가 거대한 협조가 있었다. 파이몬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모종의 계략이 펼쳐지고 있다고, 아주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다국적 군대가 서로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 가지의 이해와 수십 가지의 명분이 합쳐져야만 가능했다.

    아니, 그보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진군하는 것인가?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을 섬멸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엘리자베트 제3황녀와 협조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애당초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은 합스부르크가 해결해야 마땅하다. 이건 명백한 주권 침해였다.

    자신의 제1군단을 섬멸하기 위해서? 아니, 제1군단이 이곳에 도착한 지 불과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 사이에 군대를 정비하고 출진시키고 심지어 당도까지 했는가. 불가능했다.

    “…….”

    파이몬이 수시로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산악파 마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안하게 진지를 쏘다니거나 척후병을 독촉했다.

    무엇보다도 전력이 백중세가 되어버렸다.

    파이몬의 제1군단이 삼만. 여기에 황녀의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일만. 총 사만 명의 군대였다.

    이들이 상대해야 할 적군은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 일만팔천, 튜튼 왕국군 이만, 프랑크 제국군 사천, 총 사만이천 명의 군대였다.……병력 숫자로만 따지자면 도리어 황녀-파이몬 동맹군이 열세에 놓였다.

    그러나 파이몬은 병력의 열세에 대해 고민할 틈이 사라졌다.

    “군단장 각하!”

    척후병 대장이 허겁지겁 천막으로 뛰어들었다. 전통적으로 척후병은 다크엘프가 맡았고, 지금 뛰어든 자도 다크엘프였다. 새까만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파이몬이 그 얼굴을 보자마자 예의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지요?”

    “또, 후방에 군대가 출현했습니다.”

    “하아.”

    파이몬이 이마를 짚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이번에는 어디 군대인가. 바타비아 공화국? 폴리투니아 왕국? 아니면 튜튼 왕국이나 프랑크 제국에서 증원군을 보냈는가?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머리 잘린 황소의 문양입니다. 깃발에 머리 잘린 황소가 그려져 있습니다!”

    “……예?”

    파이몬은 그녀로선 드물게도 얼빠지게 대답해버렸다.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그녀는 차근차근, 눈앞의 다크엘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었다.

    이윽고 그의 말이 이해되자 파이몬은 입술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말도 안 되요!”

    “정말입니다. 게다가 문양기도 발견했습니다. 초원 늑대의 문양기가.”

    “아니,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어떻게――마르바스의 제2군단이 여기에 왔다는 건가요!”

    중립파를 통솔하는 마르바스의 월맹군 제2군단.

    총 이만의 몬스터 부대가 후방에 출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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