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06화 (106/510)

00106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상대편은 현재 절찬리에 내부 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마왕군, 듣기만 해도 인류 공동의 적이라는 느낌이 풀풀 풍겨대는 군대가 진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제3황녀는 이때다 싶어 군권을 한층 독점하여 '인류를 위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겠지. 그 앞에서는 어떠한 명분도 파리해질 뿐이다. 문벌귀족이든 뭐든 황녀파에 협조하지 않은 인물은 인류의 이름 아래 처형된다. 지금 우리가 합스부르크 수도로 진군하면 황녀에게만 좋은 일 해주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도 황녀가 몸이 달아오를 거야. 뭐라 치장해도 황녀는 비합법적인 군사 정변을 일으켰어. 정통성이 극히 취약해. 이런 때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명확한 업적이 필요하지.”

모든 쿠데타 정권의 숙명이다. 약한 정통성은 당장 무리를 해서라도 뚜렷한 업적으로 무마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의 권리를 확대한다든지, 경제를 개혁한다든지.

황녀는 마왕군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군권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루어야 할 업적이란 뻔했다. 군사적 승리다.

“우리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수록 황녀의 정당성은 약해져. 마왕군을 무찌르겠다고 했는데 정작 마왕군이 안 다가오니 말이지. 정적들에게 공격당하겠지.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반드시 다가와. 황녀 쪽에서 출병하게 되는 거야.”

“호오.”

바르바토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가 쳐들어가는 대신 적을 유인하는 거냐.”

“그래. 더불어서 유언비어를 좀 퍼트려주는 편이 좋지.”

황태자는 최전선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용맹분투했다. 황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애초에 제국군이 출병할 때 황녀는 참여하지조차 않았다. 황태자가 패배한 것도 황녀가 공공연히 방해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깔깔깔.”

내 작전안은 곧바로 수용되었다.

바르바토스의 막사에서 나오면서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방금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저 모든 이야기는 파이몬의 제1군단을 고려하지 않을 때만 성립했다. 지금도 파이몬과 산악파가 이끄는 3만 몬스터 대군은 이곳으로 열심히 행군하고 있다.

황녀는 빠른 시일 안에 휴전을 제안해온다. 바르바토스야 '휴전? 인간놈들이 단체로 약을 빨았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바로 그때 우리 제6군단의 배후에 등장한 제1군단이 정식으로 휴전 협정을 받아들인다. 졸지에 바르바토스는 닭 쫓던 개가 된다.

황녀 입장에선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공격해와도 그만, 공격해오지 않아도 그만이다. 공격해오면 그걸 빌미로 군권을 독점하여 대항하고, 공격해오지 않으면 파이몬의 제1군단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린다. 만만치 않은 여자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수가 몇 개 있다.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착오이다, 엘리자베트 황녀. 그리고 파이몬. 뭐라 해도 나는 신사이니까. 여자들한테 모든 일을 맡겨서야 신사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 점잖게 에스코트 해줘야겠지.

*  *  *

미리 예상해둔 대로, 사태가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다짜고짜 우리 군단에 휴전을 제의했다.

바르바토스는 제3황녀가 보내온 휴전제안서를 받아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 우리군 후방에 무려 3만의 몬스터 대부대가 출현하자 제아무리 바르바토스라 할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산악파 애새끼들이 왜 저기 있는 거냐?”

제6군단 내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검은 산성을 무혈로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가 뚫어놓은 길을 지나친 것 아니겠느냐, 튜튼 왕국으로 향하기 전에 우리와 함께 합스부르크를 밟아두려는 것 아니겠느냐. 어떤 의견도 썩 그럴듯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길길이 화내면서 제1군단에 사신을 보냈다.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고. 최대한 얌전히 표현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쌍욕을 가득 담아서 전언을 보냈다. 파이몬이 회답해온 바는 평원파의 마왕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제깟 년이 뭐라고 휴전을 하고 말고 지랄이야!”

휴전결의안.

마왕군과 합스부르크 제국 양쪽이 서로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문장에서 시작하여, 끝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인장과 파이몬의 인장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웃긴 점은 바로 옆에 바르바토스의 인장을 위한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검은 산성을 건너고 고생고생해서 아우스터리츠를 뚫고온 바르바토스 입장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수가 나타나서 적과 화해하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바르바토스는 당장 몬스터 군단을 휘몰아쳐서 제1군단을 공격하겠노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전방에서 엘리자베트 황녀가 직접 4만 군대를 통솔하여 진군해오자 비로소 바르바토스는 깨달았다. 상황이 무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고.

“잠깐만. 시바알,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게 저 혼자입니까? 아앙?”

그날은 비가 심하게 내렸다.

바르바토스가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얼굴이 심각한 자는 비단 바르바토스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열여덟 명의 마왕도 표정이 구겨진 알루미늄 봉지 같았다. 그들은 막사로 걸어오느라 온몸이 비에 젖었는데, 그 탓인지 더더욱 분노에 차 보였다.

“제국년은 왜 난데없이 휴전을 운운하고, 산악파 새끼들이 왜 가라는 튜튼 왕국으로 안 꺼지고 여기로 쳐오고, 좋아. 여기까진 뭔가 이유가 있다 해. 그런데 존나 왜 제국년이랑 산악파 새끼들이 우리를 앞뒤로 가로막는 건데? 씨발, 이거 협공하겠다는 거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바닥을 쾅 내리쳤다. 오른발이 형태 그대로 땅바닥을 깊숙이 눌러버렸다.

“파이몬 저 창녀가 인간놈들 빌어서 우릴 쌈싸먹으려는 거 아니냐고!”

“저 개 같은 새끼들을 당장 불지옥에 처넣어버립시다!”

벨레드가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호응하여 평원파 마왕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배신자 놈들을 싸그리 때려죽여야 한다는 둥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한 마디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돌격할 기세였다.

내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여러분. 파이몬은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마왕들의 시선이 나한테로 쏠렸다. 하나같이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들의 눈동자는 살기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경악으로 물들었다. 종장에 이르러선 언제 고레고레 고함이 오갔냐는 듯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허나 단탈리안.”

제파르 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싸우든 말든 파이몬이 이득을 본다는 것은 이해했네. 싸우면 이참에 우리 평원파를 전멸시키고, 싸우지 않으면 그대로 '인간계의 땅을 점령했다'라는 실적을 챙긴다고. 그렇지만 파이몬은 비단 우리 군단뿐만 아니라 마계 전체를 배신하는 셈이지 않는가? 우리의 동족들이 가만히 만행을 지켜보겠는가.”

내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이천 년입니다. 월맹군은 이천 년이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마계인이 월맹군의 존재의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쳐 있겠지요. 만약 이번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다면 마왕군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공적으로 인정한 영토를 보유하게 됩니다.”

“으음.”

“성공할지 말지 모르는 대륙 정벌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의 영토를 확고하게 차지한다……이것에 마계인들은 더 매력을 느낄 겁니다.”

이 업적을 이루어낸 파이몬을 위대한 마왕이라 칭송하겠지. 월맹군 이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결실을 맺었다면서 말이다.

제파르 대장은 나의 말을 이해하고 침음을 삼켰다. 다시금 막사 안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니까, 뭐야.”

잠자코 앉아 있던 바르바토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싸우든 휴전하든 파이몬 년이 이득을 본다고? 심지어 마계에서 우리를 지지해줄 가능성도 적다, 지금 그렇게 씨부린 거냐?”

“…….”

내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니, 어떻게……배신자는 산악파 년놈들이잖아. 어째서? 왜 우리가 무시를 당해야 하는데? 응?”

그녀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막사 안의 마왕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우리가 제일 열심히 싸웠잖아. 얘들아, 우리가 가장 많은 피를 흘렸잖아. 마계의 염원을 이루어주겠다고……얼마나 많은 동지와 부하가 이국의 땅에서 쓰러졌는데……왜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파이몬이 지지를 얻는다는 거야? 동지들. 우리는 그저, 열심히 싸웠을 뿐이잖아.”

마왕들이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이천 년이 너무 길어서 지쳤다고? 그러면 우리는? 그 이천 년 동안 지쳐도 쉬지 않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해온 우리는……우리의 각오와 피는 어떻게 되는 건데? 적당히 권세를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어. 군세를 조련하는 대신 그냥 놀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 빌어먹을 마왕의 의무라는 것 때문에 이천 년 동안 쉬지 않고,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이제 멈추라고? 잘못된 것은 배신자 돼지 새끼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그녀가 탁자를 내리쳤다. 주먹이 내리친 곳이 산산조각되어 파편으로 흩날렸다.

“웃기지 마! 감히! 감히 어떻게 우리의 긍지를! 우리의 피와 땀을!”

“……각하.”

“제1차 월맹군에서 나는 육천의 병력을 모두 잃었다! 제2차 월맹군에서 나는 팔다리가 잘렸어! 제3차 월맹군에선 두 달이 넘도록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군대가 와해되었고, 제4차 월맹군에서는 아군의 외면에 전멸당했다! 제5차도! 제6차도! 제7차도!”

그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일곱 번의 비극에서서 정작 피를 흘린 장본인은 누구냐. 마계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놈들이냐? 아니면 머릿속에 든 거라곤 자기 이익밖에 없는 산악파 놈들이냐? 아니야. 아니라고! 우리――우리가 최전선에 있었어! 우리는 가장 헌신적이었고 가장 용맹했다! 이천 년의 헌신과 용맹의 대가가 고작 이것이라고――웃기지 말라 그래!”

바르바토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파이몬 개씨발 쌍년……그래, 죽고 죽이는 전투를 바란다 이거지. 좋다 이거야! 감히 나를, 우리의 긍지를 호구로 보았겠다……죽여버리겠어.”

그녀는 막사 바깥으로 훌쩍 떠났다. 그녀의 발걸음이 너무도 단호하면서, 또 어딘지 위태로워서, 나를 비롯해 다른 마왕들은 차마 바르바토스를 붙잡지 못했다.

우리는 막사에 남았지만 대화라곤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간간이 누군가가 한탄 섞인 숨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한참 뒤에야 제파르 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휴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였다. 마왕들은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들도 똑같은 생각에 잠긴 것이 눈에 보였다. 다만 동족인 마왕의 계략에 빠져서 전쟁을 멈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망연자실하여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벨레드 형님이 이를 갈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였는지 모르겠는데.”

“진정해라, 산돼지. 너도 알고 있다. 휴전 말고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 제파르 애송이. 네놈 말대로 나는 무식하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고 있다. 바로 우리가 모욕을 당했고, 우리는 전사라는 것이다. 전사는 모욕을 참지 않는다!”

벨레드가 포효했다.

그러자 제파르도 지지 않고 말했다.

“모욕을 참지 않으면 어떡하겠다는 얘기인가.”

“질문이라고 한 거냐. 싸운다!”

“싸우면? 제1군단의 3만 군세를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제1군단뿐만이 아니다. 제국군 4만에 의해 협공을 당한다. 3만의 몬스터 군단에 4만의 인간군이다. 전투는 불가능하다.”

“싸우다 천운이 다하면 죽는 것이 전사의 운명이다! 네놈은 언제나 이길 수 있는 전투만을 해왔는지 몰라도 응당 전사에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야! 쳐부시고, 또 쳐부신다. 그게 전부다!”

제파르 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전쟁광이……평원파를 몰살시킬 셈이냐!”

“긍지를 잃어버린 평원파는 더 이상 평원파가 아니다!”

논쟁이 과격해졌다. 마왕들은 순식간에 화평론자와 주전론자로 나뉘었다. 훗날을 도모할 줄 모르는 머저리, 싸워야 할 때를 모르는 겁쟁이 등, 양쪽에서 욕설이 쏟아졌다. 대세는 화평론이었다. 벨레드를 포함해서 일부 과격파만이 죽음의 결전을 부르짖었다. 당연하다, 패배할 게 분명한 전투를 누가 반길까…….

“크, 큰일입니다!”

그때 호족 장교가 막사에 뛰어들었다. 그는 마왕들의 험악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말했다. 장교의 보고는 과열된 열기를 단숨에 잠재울 정도로 시급한 것이었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홀로 출격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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