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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04화 (104/510)
  • 00104 왕과 장군  =========================================================================

    “백작……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옆에서 황태자가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근위기사단은 과인의 수하이외다. 백작이 마음대로 부릴 권리 따위 어디에도 없소!”

    이런 시국에도 지휘권 타령인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아예 질려버렸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가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 지금은 소관에게 지휘권을 일임해주십시오. 기필코 적군을 저지하겠나이다.”

    “저지? 저지한다고? 저 시체들을?”

    황태자가 날뛰었다.

    “미쳤소외까! 저, 저건 몬스터가 아니오. 악마……그래, 악마가 틀림없소. 인간이 악마에게 어찌 대항한다는 말인가!”

    “진정하십시오. 저들은 한낱 몬스터에 불과합니다.”

    “당장 근위기사단을 동원해서 후퇴하시오!”

    폰 로젠베르크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

    “귀가 멀었소? 근위기사단에 얼른 후퇴 명령을 내리란 말이오. 이런 곳에서 근위기사단을 잃을 수는 없어……용병 놈들이 방패가 되어주는 동안, 우리라도 후방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오!”

    “……어떻게 전열을 가다듬는다는 말입니까. 아군의 주력은 적의 우익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후퇴해버리면 아군은 전멸합니다.”

    변경백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전하, 전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버텨준다면 곧 아군이 마왕군의 우익을 섬멸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버티지 못하면!?”

    황태자가 고함을 질렀다.

    “중앙군은 전멸하고 과인도 패사(敗死)하겠지! 로젠베르크, 그대가 지금 무엇을 저당으로 삼아서 내기를 걸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가. 합스부르크의 미래이다!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황제를 내기돈으로 삼고 있단 말이다!”

    “…….”

    “아군이 우익을 돌파할 때까지 버티면 승리라 말했으렷다? 허면 만일 그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어찌할 테냐. 감히 네놈에게 합스부르크 전체의 명운을 쥐었다 폈다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 촌놈이!”

    황태자가 뒤돌아섰다. 그가 씩씩거리면서 걸어갔다.

    “내기를 걸려면 네놈의 목숨이나 걸어라. 과인은 일개 필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유일무이한 주권자이니! 네놈이 저 악마들을 막고 있는 사이 나 합스부르크는 퇴각하겠노라.”

    “……송구하오나, 그건 안 되겠습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황태자의 앞길을 막아섰다.

    “뭐?”

    “전하께서 퇴각하시는 것은 불가하다 말씀드렸나이다.”

    “아니, 이 역신이 진정!”

    황태자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손이 더 빨랐다. 변경백은 황태자의 오른팔 손목을 낚아챘다. 지휘관이기 전에 한 사람의 건장한 무사인 변경백의 악력에 황태자는 당해내지 못했다.

    “으, 으으――!”

    “저 앞에서 병사들이 군진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총사령광인 전하가 도망쳐보십시오. 당장 사기는 바닥에 떨어지고 군대는 꼴불견 사납게 패주할 것입니다. 우리의 중앙군은 스스로 붕괴하고, 우익과 좌익은 각개격파를 당할 것입니다. 아우스터리츠는 제국의 수치로 영원히 기억되겠지요…….”

    변경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수치스러운 제국입니다. 이제 와서 부끄러운 역사가 하나 추가된다 한들 크게 바뀔 것도 없습니다.”

    “네놈――이 반역자 새끼가!”

    “중요한 것은 제국의 위신이 아닙니다. 전하, 인류의 수호입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손에 한층 힘을 더했다. 황태자는 신음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오른손을 빼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요지부종이었다. 마치 거목의 뿌리처럼 변경백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한번 이기고 한번 지는 것은 의외로 대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그 신념을 등불로 삼아 모여드는 부나방이기 때문입니다.”

    “무, 으윽, 무슨 소리를…….”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전하의 안녕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전하께선 여기서 물러나셔서는 아니됩니다.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태자가 마왕군을 눈앞에 두고 도망쳤다, 그것도 아군을 희생양으로 삼아서……그런 얘기가 나돌아보십시오.”

    변경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야말로 제국은 끝입니다. 장병은 더 이상 싸우지 못할 테고, 백성은 더 이상 국가를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병은 우리와 계약하려 들지 않겠지요. 아니, 합스부르크 제국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국가의 신민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고 말 것입니다. 엄청난 민폐이지 않사옵니까. 저는 전하께서 그런 민폐덩어리로 전락하는 모습을 신하된 도리로서 지켜볼 수 없나이다. 충신이라 칭찬해주셔도 모자릅니다.”

    변경백이 자기 말에 자기가 웃겼는지 미소를 지었다. 눈빛만은 처음부터 싸늘했다. 부엉이의 눈동자와 같은 것이 두 쌍으로 황태자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제국을 위해 죽으십시오, 전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노신(老臣)은 진심이었다! 황태자는 안개를 뚫고 언데드 몬스터 군단이 출현했을 때보다 더 심한 공포를 느꼈다.

    “지휘관으로서의 소양은 눈꼽만큼도 없는 전하이옵니다만, 다행히도 제국의 황태자라는 꼬리표는 적당히 쓸 만하옵니다. 자그마치 황태자가 극악무도한 마왕군에 맞서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이 소식을 접하면 열국의 백성이 분노할 것입니다. 만민이 일치단결하여 마왕군에 맞서 싸우겠지요.”

    “네, 네, 네놈이 죽으면 될 것 아니냐!”

    루돌프 황태자가 턱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소리쳤다.

    “네놈이, 이럴 때 죽으라고 네놈이 변경백인 것 아니느냐……!”

    “송구하옵니다. 소신 혼자만 죽어서야 약발이 약합니다.”

    변경백이 소리없이 웃었다.

    “어찌 충신된 자로서 전하를 홀로 피안으로 보내겠나이까?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인, 미흡하오나 전하를 저편까지 전송해드리겠습니다.”

    그때 장교 한 사람이 칼을 뽑고 변경백한테 달려들었다.

    “배신자 자식!”

    장교는 호기롭게 외치고 기병용 검을 들어올렸다. 변경백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허리춤에서 단칼을 뽑아들어 던졌다. 막 검을 내리치려는 장교의 이마에 단칼이 박혀들었다. 장교는 짧게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수풀에 코를 처박았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황태자는 변경백의 무위에 놀란 개구리처럼 눈을 크게 뜰 뿐, 그 이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가 제국에 이백 명밖에 없는 제2급 기사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병사는 들으라.”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장교들을 향해 말했다.

    “본인은 그대들이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는지 모른다. 다만 판단해주기를 바란다. 흐림 없는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총사령관이 도망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멀리서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 부대 5천과 용병 부대 2만이 드디어 맞닥트린 것이었다. 네 배의 병력 차이. 그런데도 변경백은, 또한 장교들은 어딘지 모르게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대가 제국에 충성한다면 무엇이 제국을 위한 길인지 생각하라. 황제 폐하께 충성한다면 무엇이 폐하를 위한 길인지 생각하라. 이곳에서 물러서면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목숨을 아우스터리츠에 뿌리는 셈이 되어버린다.……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는 윽박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장교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떤 장광설보다 효과적인 설득이었다.

    장교들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었다는 것, 설령 여기서 죽더라도 훗날을 도모할 단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합스부르크의 병사에게는 그 정도면 상관과 생명을 함께 불사르질 이유로 충분하고도 넘쳤다. 장교들이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여기 자리한 군인 전원이 옥쇄를 각오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저 반역자 놈을 처치하고 제국의 공신이 되어라!”

    황태자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가련하게 소리쳤다. 변경백이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의 임무는 간단하옵니다. 발할라에서 제국의 자랑스러운 장병들에게 잘 싸웠노라고 치하해주시옵소서.”

    “과인은……과인은 합스부르크 그 자체야!”

    “농담이 심하시군요.”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중후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일개 한 개인이 국가 전체와 동일하겠나이까? 합스부르크는 바로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있습니다. 국가와 인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바로 저들이 합스부르크입니다.”

    그리고, 하고 변경백이 말했다.

    “주권을 대리하여 행사하는 자는 필요합니다. 허나 심려치 마십시오. 전하께서 불행한 일을 당하신다 할지라도 우리 제국에는 황위계승권자가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네, 네놈! 엘리자베트 년의 하수꾼이었는가!”

    황태자가 온몸을 흔들면서 발악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내 진즉에 그럴 줄 알았음이야! 엘리자베트 그 매국년이 언제나 대사를 그르치지! 끄으으윽!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

    황태자가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그는 두 팔이 묶였고 입에 천이 둘러쳐졌다. 그리고 막사 깊숙한 곳에 유폐되었다. 변경백이 황태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물론, 우리군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목을 바치겠노라.

    변경백이 장교들에게 말했다.

    “제군들. 병력의 질은 저쪽이 높을지언정 양은 우리쪽이 월등하다. 위아래가 합심하여 저항하면 너끈히 며칠이고 버틸 수 있을 터. 그 어느 때보다 제군들의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 사람이 일당백의 용사가 되어 분투하기를 소관은 기대한다.”

    “예, 장군!”

    장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 급히 일선 부대에 파견되거나, 연락을 주고받거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아예 군막사에서 탁자를 옮겨와서 바깥에다 설치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숙이기를 반복하면서, 현재 전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실시간으로 지도에 표시했다.

    연락장교가 보고했다.

    “장군, 제1진이 돌파되었습니다. 그대로 제2진에 합류. 퇴각 시의 혼란은 다행히도 적었습니다.”

    “그대로 수비하라. 우리가 버티기만 하면 승리한다는 사실을 병사들에게 다시 한번 알리도록.”

    “예!”

    잠시 후, 연락장교가 보고해왔다. 그는 아까 전에 보고한 장교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 연락장교가 죽었으므로 다른 장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2진이 돌파되었습니다. 제2진과 제3진이 합류하여 적군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아군의 사기는 아직 건전합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최후까지 함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함성으로 화답했습니다.”

    “좋다. 병사들이 버림 받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령 효과가 미비하더라도 투석기와 궁병을 계속해서 활용하라. 결사의 항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

    다시금 연락장교가 보고해왔다. 그 역시 또 다른 인물이었다. 재차 연락장교가 전사하는 바람에 급히 인원이 바뀌었다. 그는 각이 잡히게 군례를 올린 다음, 또박또박 전황을 말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 또한 변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3진이 돌파되었습니다. 마지막 군진에서 전군이 항전하고 있나이다.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전사하여 명령체계에 차질이 생겼습니다만, 빠르게 복구되었습니다.”

    “근위기사단을 우회 투입하라. 적군은 기세를 타느라 전열이 흐트러졌을 터. 기사단이 적군의 측면을 후려갈기는 틈을 타서 제3진을 완벽하게 방비하라.”

    “예, 장군. 부디 무운을.”

    그리고 다른 장교, 또 다른 장교…….

    마침내.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주위에는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란츠크네히트 용병대는 대륙 최고의 위명에 걸맞게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했다. 합스부르크 근위기사단은 적군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기사단장부터 최하급 시종기사까지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장교들 역시 전멸했다. 최후에 로젠베르크 변경백한테 보고를 올린 사람은 장교가 아니라 일개 계급 없는 병사였다. 그는 제3진이 돌파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곧바로 전선으로 되돌아갔다.

    뚜벅, 하고 발소리가 들렸다.

    “흐응. 네가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러하다.”

    변경백은 여전히 책상 위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변경백의 앞에 선 소녀가 몹시 즐거운 어투로 말했다.

    “전투는 끝났어. 인간의 아이야,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냐?”

    “전투를.”

    “그 전투마저 끝났다면 무엇을 바라보겠느냐?”

    “전투를.”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거대한 낫이 번쩍였다. 낫은 허공을 가르면서 인간의 연약한 살덩어리를 갈랐다. 털썩, 하고 무언가 묵직한 것이 수풀에 떨어졌다. 그것은 잠시간 뎅그르르 굴러가다 이윽고 멈추었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의 두 눈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눈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지된 시선만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마치 그곳에서 끝없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 작품 후기 ============================

    ─ 챕터 <왕과 장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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