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03화 (103/510)
  • 00103 왕과 장군  =========================================================================

    그것은 말없는 진혼곡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사뿐히 풀을 밟을 때마다 대지가 약하게 울렸다. 오천의 몬스터가 일부러 한치의 어긋남 없이 바르바토스와 보조를 이룬 것이었다. 비록 기습을 노리기 위해 큰소리로 울부짖지 못했어도, 이렇게 발걸음을 함께함으로써 그들의 주인에게 주장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바르바토스가 미소 지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애새끼들.”

    그녀는 원래부터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무사였다. 자신의 병기에 의지하여 창검의 지옥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강했다. 동료와 부하가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어느새 그녀와 함께 영원한 전쟁을 맹세했던 동지들은 전부 죽었고, 그녀만이 생존했다.

    그때부터 바르바토스는 동료들을 되살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생전 처음으로 마법을 접했다. 재능이 없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더군다나 흑마법은 지극히 까다로웠고, 마계와 인간계를 가리지 않고 전승이 희귀했다. 그래도 바르바토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더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에. 전쟁터에서 우연히 날아든 화살, 동료를 지키기 위한 희생, 어리석은 명령에 의한 죽음――그런 하찮은 원인으로 죽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눈부셨고, 강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영원히 살아숨쉬게 만든다.

    바르바토스는 그들을 위해 검을 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여태까지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병기 대신,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동료를 선택했다. 그녀는 손수 한명한명의 병졸을 죽지 않는 몬스터로 부활시켰다. 지금 아우스터리츠의 안개를 걸어나가는 몬스터 중에 제아무리 하찮은 좀비일지라도 그녀의 손끝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 없었으며, 언젠가 그녀와 함께 명예로운 전장을 헤쳐나가지 않은 이 없었다.

    얼마나 안개의 바다를 걸었을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해가 떠올랐다.

    그때 언덕 위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은 군막사에서 전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한 연락장교가 헐레벌떡 막사로 뛰어왔다. 그는 군례하는 것조차 잊었다.

    “화, 황태자 각하!”

    “무례하다. 언제부터 제국군의 기강이 이리 해이해졌는가.”

    연락장교가 팔을 번쩍 들어올려 예를 취했다. 그는 긴 거리를 뛰어왔는지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지도 않고 연락장교가 말했다.

    “적이……적군이 전방에 출현했습니다!”

    “적군이 출현했다고?”

    황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누가 이런 멍청이를 연락장교로 뽑았는지 분이 치밀었다.

    “정신차려라! 어디서 출현했는지,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보고해야 할 것 아닌가!”

    “밖으로……서둘러 밖으로……!”

    황태자가 혀를 찼다. 눈앞의 사내는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황태자는 망토를 펄럭이며 막사에서 나갔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과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언덕 끄트머리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보인다는…….”

    사방이 안개에 잠겨 있었다. 천천히 안개 구름이 걷혔다. 그리고 태양빛이 아우스터리츠를 비추기 시작했을 때, 안개에서 몬스터의 새까만 정강이가 드러났다. 살점이 문드러져 보기 흉악한 발이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발이었다. 곧이어 두 개가 되었다. 그것이 백 개의 발, 천 개의 발이 되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벅, 하고 땅이 부르르 진동했다.

    이윽고 몬스터들은 안개를 완전히 꿰뚫고 온몸을 드러냈다. 수많은 군기(軍旗)가 펄럭거렸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을 나타내는 징표가 거대한 군기로 앞장서고 있었다. 죽음의 왕관이 그려진 군기에는 고대제국어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발퀴레들이여, 영원히 행군할지언저――.

    그 뒤로 열한 개의 군기가 펄럭였다. 마왕군 군기가 아니었다. 한때 인간계 국가의 근위기사단을 상징하던 깃발들이었다. 청마 기사단, 붉은 독수리 기사단, 십자 기사단, 황금마 기사단, 철방패 기사단, 은빛 백합 기사단, 철혈 기사단, 라인연맹 기사단, 자유-명예 기사단, 녹사슴 기사단, 헬베티카 사자 기사단. 지금은 멸망하고 사라진 제국과 왕국의 근위기사단들――그들의 상징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평원파 수장, 서열 제8위 마왕 바르바토스 군단의 자긍심.

    언제나 월맹군 최전선에 섰으며,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근위기사단과 맞붙었으며, 그중 열한 개의 기사단을 전멸시키고 군기를 쟁취했다. 그중에는 멸망한 지 어언 천육백 년이 넘은 제국의 군기도 있었다. 말하자면 저곳에서 안개를 들이키며 흉흉하게 펄럭이는 깃발들은, 지난 이천 년 간 마왕군과 인간군이 자아낸 역사를 그대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한 좀비가 으르렁거렸다.

    여기 우리, 불패하고 불사하는 군대이리니.

    해골병사가 마나의 파동으로 화답했다.

    여기 우리, 영원토록 행군하는 발퀴레일진저.

    오천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가 마치 파이프 오르간처럼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두개골 가장 깊숙한 속까지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칠백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쳤으며, 열하나의 국가를 멸망으로 몰아넣었고, 이제 다시금 열하나를 열둘로 늘리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여기 우리, 죽었기에 죽는 도리 없으며, 죽지 않았기에 패주 또한 모를지어니.

    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발할라는 바로 이곳 지상에 있나이다――.

    “이, 이게 대체!”

    루돌프 황태자가 숨을 들이켰다. 오천 마리의 몬스터가 지극히 장중하게 프라첸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황태자는 처음에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지나치게 몬스터 부대가 근접해 있었다. 이런 것이 애당초 가능하단 말인가. 아우스터리츠의 안개라는 기후, 고지대에선 오히려 저지대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지리적 문제, 그리고 발자국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정예 언데드 몬스터 부대――이 모든 요소가 겹쳐서 제국군은 바로 앞마당까지 적군이 접근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몬스터들은 장례식을 치르는 듯 장엄했다. 시체에서 풍겨나오는 죽음의 기운이 삽시간에 언덕 위쪽까지 풍겨왔다. 누구를 위한 장의행렬인가? 저들은 누구를 위해 미사를 올리고 있는가?

    “자아, 친애하는 나의 장의사들이여.”

    바르바토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장례식을 치르자.”

    몬스터들이 포효를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고요하게 걸을 필요가 없었다. 기습은 성공했으며, 고작 육백 미터 앞에서 인간군이 공포에 떨어대고 있었다. 일개 장병만 혼란에 시달린 것이 아니었다. 부사관, 지휘관, 장군, 심지어 황태자까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불멸의 바르바토스!”

    오로지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만이 이빨을 악 물고 소리쳤다.

    그는 대번에 바르바토스의 전체 전략을 눈치 챘다. 만약 여기서 물러설 경우, 제국군 전체가 좌우로 양분당해서 각개격파 당할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변경백이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태자는 입을 벌리고 어딘가 혼이 빠져 있었다. 저런 상태로 제대로 군대를 지휘할 리 없었다. 여기서는 자신이 나서야 했다.

    “당장 투석기를 교정하여 전방을 공격하라 이르라!”

    “예, 예에?”

    주변에 기립해 있던 지휘관들이 얼 빠지게 대답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평소 성미에 맞지 않게 폭력을 동원했다. 발끝으로 지휘관의 종아리뼈를 쳤다. 지휘관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가! 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리친다. 그것을 위한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아닌가! 대답하라!”

    “그, 그렇습니다!”

    지휘관들이 허둥지둥 열을 맞추었다. 십수 년 동안 훈련하면서 배운 제식이 효과를 발휘했다. 아직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몸동작을 맞추었을 뿐인데도 그들은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변경백에겐 일단 그것으로 충분했다.

    “명령을 하달하라. 투석기는 당장 방향을 교정하여 전방을 공격한다!”

    “예!”

    “폰 발렌슈타인 대장!”

    변경백이 용병대장을 불렀다. 그때까지 멍하게 안개를 바라보던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정신을 차렸다.

    “예, 백작 각하. 부르셨습니까.”

    “지금 아군의 중앙을 담당하는 병력은 그대의 용병부대 2만뿐이다. 절대로 저놈들에게 전방이 뚫리면 안 된다. 알겠는가? 죽을 각오로 아군의 진지를 사수하라.”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군례를 올렸다. 이런 때를 위해서 고용된, 합스부르크 최고의 용병부대였다. 용병대장은 또한 겉으로는 고용주인 황태자를 따랐으나 내심 변경백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기꺼이 명령을 받들였다.

    “란츠크네히트의 위명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각하, 저희는 대륙 최강입니다.”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한다. 바로 지금이 전투의 승부처이다! 아군의 1만 병력이 지금 마왕군 우익을 돌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이 우익을 뚫기만 하면 우리 제국이 승리하는 것이다.”

    “아.”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고기방패가 되어 적군을 막아내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제대로 전략적인 목표까지 알려주었다.

    아군이 우익을 뚫을 때까지 이곳을 막아내면 우리가 승리하고, 아군이 우익을 뚫기 전에 이곳이 함락되면 우리가 패배한다. 일단 목표가 생긴 것만으로도 지휘관과 장병의 자세 자체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여차하면 근위기사단이 출동할 것이다. 알겠는가? 우리에겐 아직 예비대가 있다. 전력으로 수비에 전념하라.”

    “명을 받듭니다!”

    용병대장이 힘차게 외쳤다.

    변경백은 비단 용병대장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주변에서 지휘관들이 두 장군의 대화를 빤히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말해준 것이었다. 우리가 언제까지만 버티면 되는지. 우리는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잘만 하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면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고위 지휘관들이 빠르게 혼란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로 달려가서 방금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말한 바를 그대로 소리내어 읊었다. 그 내용은 지휘관에서 부사관으로, 부사관에서 장병에로 퍼져나갔다.

    “시바알, 한번 죽지 두번 죽냐!”

    “어디 한번 디벼 와라, 해골바가지 새끼들아!”

    용병들이 장창을 꼬나쥐고 소리쳤다. 그들은 어디 동네 한량처럼 굴러다니는 용병이 아니라, 폰 발렌슈타인의 지휘 아래에서 대륙의 전쟁터를 누벼온 정예병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고용주에 대한 충성심, 더 정확하게 금전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용병대장은 적절하게도 ‘이번 방어전을 성공리에 수행할 시 전 장병에게 100골드를 하사한다!’ 하고 알렸다. 즉흥적인 발상이었지만 병사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여타 용병대장과 다르게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임금 약속을 어긴 적 없었다. 그가 100골드를 하사하겠다면 정말로 100골드가 떨어졌다. 용병들이 용기백배하여 군가를 불러재꼈다.

    “백작 각하! 송구하오나 투석기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각도가 안 나오는가.”

    변경백이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적군이 지나치게 근접했다. 이래서야 투석기는 바위를 날릴 수 없었다. 적군과 함께 아군까지 바윗덩어리로 깔아뭉갤 생각이 아니라면.

    “하지만 막아낼 수 있다. 후방에 근위기사단을 대기시켜라.”

    “예, 각하!”

    연락장교가 수시로 각 부대의 상황을 보고해왔다.

    정작 중요한 소식, 마왕군 우익으로 향한 중앙군 1만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지금쯤 전투에 돌입했겠지. 대충 어림잡아서 마왕군 우익에만 2만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그들이 분발해주어야만 했다……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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