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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02화 (102/510)
  • 00102 왕과 장군  =========================================================================

    그런데 모든 전선이 이곳처럼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나야 죽음의 기사로 신나게 재미를 보았으나, 당연하지만, 다른 마왕들에겐 죽음의 기사가 없었다. 그들은 제국기사의 육탄돌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호족 전사나 리저드맨 전사로 대응하긴 했으나, 기사를 상대하기엔 적잖게 약했다.

    슬라임 무전기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전열 일부가 돌파당한 것이었다! 제파르 대장은 즉시 그곳으로 오우거를 집중시켰으나, 도미노가 무너지듯 연달아 우익의 전열이 돌파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제1진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전열이 무너진 장창병은 기사에게 탐스러운 한끼 점심식사에 불과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 오러가 깃든 양손검에 오크 장창병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을 거다.

    ─ 제2진으로 후퇴한다. 전군, 제2진으로 후퇴하라.

    제파르 대장의 판단은 신속했다. 오크 장창병들은 천천히 보조를 맞추어 뒤로 물러섰다. 장창병 병진이 한 발자국씩 후퇴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십 마리의 오크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가 박자를 맞추어야 하니까. 결국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크를 제법 많이 잃었다.

    ─ 서둘러라! 후퇴를 끝내지 못한 부대가 있는가? 반복한다. 후퇴를 끝내지 못한 부대가 있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물러선다.

    잠시 뒤. 제1진의 오크 부대가 제2진의 오크 부대와 합류했다. 후퇴가 시작한 지 5분만에 우리는 자그마치 20미터를 뒷걸음질 쳤다. 바로 조금 전 1시간에 고작 5미터 물러선 것에 비하여 대단한 쾌속후진이었다.

    “오크 새끼들이 도망친다!”

    “거세게 밀어붙여라, 아그들아! 여기서 좀만 고생하면 이긴다!”

    제국군은 아주 기세등등했다. 부사관들이 장창병에게 쉼없이 전진을 명령했다. 기세를 탔다고 생각했겠지. 전쟁에서 기세만 잘 잡으면 순식간에 승리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파악했다. 제국기사와 인간 장창병이 더더욱 악착스럽게 들러붙었다.

    그때 제파르 대장이 소리쳤다.

    ─ 마법사 부대, 공격하라!

    여태껏 얌전하게 보조마법에만 주력하던 마법사들이 돌변했다. 열 명의 마법사가 후방에서 일시에 화염구 마법을 쏟아냈다. 화염구 마법은 제국군의 머리 위를 날아가서 약 30미터 전방에 내리꽂혔다. 불길이 화르륵 솟았다.

    본래 목책이 있던 장소인데, 방어용처럼 보이게 짚풀을 잔뜩 쌓아두었다. 사실은 목책에다 기름을 정성스럽게 발랐고 짚풀도 바싹 마른 짚풀만 갖다놓았다. 안쪽 짚풀에 기름을 넉넉하게 먹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곳으로 화염구가 쏟아지자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바로 이때를 위하여 제파르 대장은 마법사라는 가장 강력한 병종을 아끼고 또 아꼈다.

    불길이 가로 방향으로 길게 장벽을 이루었다. 제국군 전체가 불길에 의해 양단되었다.

    눈치가 기막히게 빠른 병사들은 불이 막 거세지는 틈을 타서 얼른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우리 오크 장창병이 후퇴할 때 그러했듯, 제국의 장창병 또한 후퇴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후퇴할 수 있지 않았다. 장창병은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니까. 결국 우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든 제국군들은 꼼짝없이 불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그들은 명백히 혼란에 빠졌다. 난데없이 배수진, 아니 배화진(背火陣)을 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리떼의 본능을 가진 몬스터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과감하게 제국군을 밀어붙였다. 오크 장창병은 리치의 차이를 이용해서 한 발자국씩 나아갔고, 고블린은 오크들의 다리 사이를 넘나들며――키가 작은 고블린이기에 장창 아래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제국군의 무릎을 난도질했다.

    제국기사들이 분전했으나 그뿐. 오러는 지속적으로 쓸 수 없다. 후방의 대기조와 계속해서 교체해주든지, 아니면 기마돌격처럼 한 순간에만 파괴력이 필요한 전법을 써야 한다. 어느 쪽이든 지금 불의 장벽에 갇힌 제국기사에겐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빠르게 오러를 소모했다. 오러가 사라진 뒤에는 피라냐처럼 몰려드는 몬스터한테 얻어맞아 차례대로 쓰러졌다.

    “으, 으아아아악!”

    결국 제국군의 장창병 전열이 무너졌다. 소위 말하는 모랄빵이었다. 전방으로 선도해주던 하마기사가 죽어나갔고, 후방에선 시뻘건 불길이 연차 혀를 내밀어댔다. 이런 상황에서 전열을 유지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겠지.

    제국군은 전열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가망 없는 돌격을 감행하거나, 살 길을 찾겠답시고 불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뻔했다. 오크용 장창에 의해 꼬치가 되든지 불에 의해 바베큐가 되든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벌벌 떨면서 어머니를 연호하든지……전열을 잃은 장창병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죽었다.

    “참혹하군…….”

    라우라가 뇌까렸다.

    “천 명? 어쩌면 이천 명은 전멸했을지 모른다.”

    불길이 타닥, 타닥거렸다. 화끈한 열기가 수십 미터를 넘어서 우리한테까지 왔다. 진지를 구축할 때 제1진에서 제2진 사이의 공간은 완벽하게 제초작업을 해두었다. 불은 자신이 태울 것을 찾아서 마왕군이 아니라 제국군 방향으로 타들었다.

    안개가 심한데다 수풀이 새벽 이슬을 머금어서 본격적인 대화재로 번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저쪽의 마법사들이 화재를 진압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했다.

    우리는 그 사이, 제1진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방에 말뚝을 무수히 박아두었다. 그리고 제1진이 후퇴하느라 꽤나 흐트러진 장창병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럴 땐 확실히 마왕군이 인간군보다 유리했다. 이쪽에선 마왕들이 '내 몬스터 놈들 이쪽으로 모여!'라고 명령하기만 하면 곧바로 부대가 재정비되니.

    우리는 아예 몬스터들한테 식사까지 명령했다. 식사는 실로 효율적이고도 간단하게 이루어졌는데, 눈앞에 널린 인간 시체들을 바로 그 자리에서 가져다가 포식한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오우거는 제딴에 풍미를 챙기겠다는 듯 불길에 다가가서 시체를 구워먹었다. 어디서 뺏었는지 장창병에다 시체들을 꼬치처럼 줄줄이 꿰어서 말이다. 그 광경에 라우라와 내가 할 말을 다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심히 포스트모던하군…….

    후방에서 바위를 날리던 투석기도 멈추었다. 제국군이 멀찍이 뒤로 물러섰노라고 사역마가 정찰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하긴 불길이 잦아들 때까지 투석기에 맞겠다면 바보천치이다. 양군에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  *  *

    “무능한 놈들 같으니!”

    제국군이 마왕군의 우익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루돌프 황태자는 탁자를 거세게 내려쳤다. 황태자뿐만 아니라 미카엘 폰 콜로브라트 장군, 요한 폰 쿠투소프 장군 등 중앙군 소속의 장성들이 불같이 화냈다.

    “정예병 팔천오백에다 기사단까지 천오백까지 달렸는데도 돌파를 못했다고? 변경백, 어디 해명해보시오. 그대가 만 명이면 우익을 점령하고도 남는다 아주 자신하지 않았소외까!”

    프린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이를 갈았다. 보고에 따르면 전투가 시작하고 삼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들 모두 변경백 자신이 평생을 걸쳐 키워낸 병사였다. 지금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장본인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변경백이었다. 심지어 황태자나 다른 장군이나 병력을 지원해주지도 않았다!

    “…….”

    변경백은 황태자의 책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기만 했는데, 그것이 황태자의 질책에 대해 말없이 반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총사령관으로서의 발언권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 또한 자명했다.

    “하! 부하는 장군을 닮는다더니 틀린 말 하나 없군.”

    황태자는 곧바로 명목상의 총사령관에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비록 돌파할 수는 없었지만 마왕군 우익도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판단했다. 처음부터 황태자는 이런 상황, 즉 적군이 피해를 입었지만 중앙군의 병력은 고스란히 보존된 상황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 병력을 투입하여 승기를 거두면, 전투의 공훈은 오롯이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차지이다.’

    황태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이번 전투는 자신에게 안겨주는 것이 넘쳐난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장만 해도 제국의 잠재적인 반란군인 변경군이 약화되었다. 더불어 이번에 중앙군을 소집하면서 군부에 대한 황태자의 장악력이 높아졌다.

    이이제이(以夷制夷).

    황태자가 생각했다. 군주의 소양이 바로 이것이라고. 문벌귀족이든 변경군이든 백성이든 무엇이든, 겉으로야 충성을 맹세할지라도 결국은 자기 이익을 노리는 승냥이였다. 자고로 군주란 그 승냥이들끼리 싸우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은 지금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변경군을 손상시키지 않았는가.

    만약 여기서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여 마왕군 우익을 뚫어내기만 하면, 자신은 인류를 마왕의 마수에서 지켜낸 수호자요 합스부르크의 유일하게 합당한 계승자로 떠오를 것이다……그 꿈과도 같은 일이 눈앞에 잘 익은 사과처럼 떨어졌다. 손을 뻗어서 사과를 줍기만 하면 된다!

    “폰 콜로브라트 장군! 폰 쿠투소프 장군! 즉각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장병 1만을 이끌고 적군의 우익으로 향하시오.”

    “예. 전하의 기대를 결코 배신하지 않겠나이다.”

    두 명의 장군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군막사에서 나갔다. 그동안 변경백은 입을 꾹 다물고 바닥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용병대장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왕군 우익을 향하여 제국군 1만이 행군했다. 그들은 화려한 깃발을 휘날리면서 프라첸 고지를 내려갔다. 그 광경을 하늘 위에서 지켜보는, 작은 마조(魔鳥) 한 마리가 있었다. 마조는 날개를 퍼득이면서 안개 구름을 비껴 날았다.

    그리고.

    프라첸 고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소녀가 눈을 감고 있었다. 백발. 나이가 들어 색이 빠지고 힘없는 백발이 아니라, 원래부터 찬란한 하얀색으로 자라난 백발이었다. 소녀는 히죽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황금빛 눈이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됐다.”

    바르바토스, 서열 제8위의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제파르! 그 녀석이 기대를 만족해주었다. 그녀 또한 슬라임을 통해서 우익의 전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제파르는 훌륭하게 방어전을 수행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을 듯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냄으로써 제국군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게 만들었다.

    바르바토스는 재차 믿었다. 우리 마왕들은 무능하지 않다. 아니, 우리 평원파는 무능하지 않다! 지금까지 일곱 차례의 월맹군에서 마왕군이 패배한 까닭은 결코 평원파 잘못이 아니다――우리는 유능하고, 용감하며, 무엇보다도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을 지금부터 자신이 보여줄 차례였다.

    따로 명령을 하달할 필요도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자신 외에 다른 모든 마왕을 우익과 좌익에 보냈다. 중앙군을 지키는 마왕은 오직 바르바토스 그녀밖에 없었다. 즉 지금 이곳에 자리한 몬스터들은 모두 그녀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으며.

    ─ 뚜벅.

    그녀가 중앙의 전군에 전진 명령을 내리는 데는, 단지 하나의 발걸음만이 필요할 따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말없이 걸어나갔다. 그 뒤를 좀비, 해골병사, 온갖 언데드 몬스터가 뒤따랐다. 화려한 군악도 없었다. 흥분에 찬 함성도 없었다. 그들은 전사였으며, 죽어서도 전사였고, 고요하게 싸울 줄 알았다. 이천 년 전부터. 바르바토스 직속 몬스터 부대 오천은 그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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