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왕과 장군 =========================================================================
“…….”
내가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난전이 펼쳐지리라 직감했다.
기사의 돌파력을 이용한 일점 공격도, 궁기병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도 먹히지 않았다. 제국군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첫 번째는 이대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후퇴함으로써 어떠한 이득도 얻지 못할 상황에서 후퇴를 선택할 장군은 없었다. 그러니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였다.
안개의 장벽에서 새까만 그림자의 파도가 몰려왔다. 인간종 특유의 정련한 군악과 함께. 언젠가 산골마을 촌민들이 꽹과리로 요란하게 울부짖은 것과 다르게, 제국군은 나팔과 북을 위주로 썼다. 안개 천지에 뿔나팔 소리가 가느다랗게 울었다.
“시작했군요.”
보병을 앞세운 근접전.
제국군 장창병들이 항오를 이루어 차근차근 이쪽에 다가왔다. 오크 투창병과 고블린 투석병이 쉴 새 없이 무기를 투척했다. 그러나 가시나무숲처럼 촘촘히 곤두세워진 장창들에 한 번쯤 부닥쳐서 창이든 돌이든 위력이 한결 초라해졌다. 연못에 돌을 떨어트려도 금세 잠잠해지듯 제국군은 투척 공격에 끄떡하지 않았다. 제기랄.
그때 아군 후방에서 투석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산맥의 산성들에서 우리를 깨나 애먹인 바로 그 투석기였다. 사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진 대신 무거운 바윗돌을 날려보낼 수 있었고, 공성무기로 쓰기보다 지금처럼 야전에 쓰기에 제격이었다. 제파르 대장은 이때를 위해 산성들에서 투석기를 죄다 약탈해서 가져왔다.
열 개의 바윗덩어리가 한꺼번에 공중을 가로질렀다. 그것들은 안개의 장벽을 넘어 적진에로 쏘아졌다. 장창병은 병종의 특성상 매우 밀집하여 대형을 이루었는데, 이런 진형은 포격에 무척 취약했다. 이 세계에는 아직 대포가 발달하지 않았으니 투석기가 장창병의 천적이었다.
“끄아아악!”
“피, 피해라!”
“피하지 마! 시발 놈들아,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바위덩어리가 마음껏 제국군의 장창병진을 휘저었다. 실질적인 피해도 크겠으나 심리적인 위축이 가장 심각했다. 상상해보라. 안개 낀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듯 바위가 내리꽂는다. 머리 위로 바윗덩어리가 들이닥치는데 엄중한 대열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라우라가 간단하게 평했다.
“흐음, 우리 마왕군의 중앙과 좌익을 붙잡아두느라 투석기를 전부 놓고 온 것이 패착이었다.”
“전략적인 승리를 고집하다가 전술적인 피해를 입게 된 거죠.”
제국군에도 당연히 투석기가 있었다. 그러나 안개 탓에 시계가 제한된 상황에서 투석기를 활용하기란 어려우니, 마왕군의 중앙과 좌익을 묶어두려고 차라리 무차별 사격에 들어가 있었다. 제국군은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 대신 현재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어떤 전략에든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까.
내가 가만히 적군을 관찰하다 혀를 찼다.
“쯔읏.”
나는 투석기가 적의 전열을 흐트러트리는 효과를 낳으리라 기대했다. 내 기대는 간단히 배반되었다. 제국군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전열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점차 아군의 진지로 다가왔다. 저런 미친놈들을 봤나.
“산성수비군도 그렇고 저놈들도 그렇고, 제국 군대는 무슨 초인들로만 이루어져 있답니까? 도대체 물러서는 경우가 없군요. 비상식적입니다.”
“징집병이 아니라 상비군일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비군은 용맹하기로 정평이 났으니.……어쩌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직속 부대일지도 모른다. 인류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항시 훈련에 임한 자들이다. 평범한 군인과 일선을 달리하겠지.”
“그놈의 인류!”
내가 으르렁거렸다.
“인류를 위해. 인류를 지키기 위해. 전부 썩은내 풍기는 선전구호입니다. 제가 진실을 알려드리지요, 라우라. 조금이라도 이익이 없다면 명분은 결코 대규모의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번 원정에서 장병들한테 제대로 먹을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따지고보면 내가 연출했다. 몇 개월 전부터 나는 쿤쿠스카 상회의 정보망을 빌려서 대륙 정세를 되도록 세세하게 파악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뇌부가 어떤 프로파간다를 동원했는지 정도는 꿰뚫고 있었다.
“올해부터 대륙 열국은 블랙 허브를 대량으로 수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민초는 여전히 흑사병에 신음하고 있어요. 왜인지 압니까? 블랙 허브를 군대에 우선적으로 분배하기 때문입니다. 각 정부가 필사적으로 재배한 블랙 허브입니다. 상비군을 전부 치료하고도 창고에 여유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창고를 열지 않습니다……블랙 허브를 얻고 싶으면 군대에 지원하라는 것입니다!”
상비군만으로 전쟁을 치루는 나라는 없다. 이 시대엔 징집병이 장창병으로든 고기방패로든 쓰인다. 군대를 징집하려면 마을들의 억센 불만과 저항에 직면해야 할 뿐더러 지방의 모든 마을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차라리 블랙 허브를 미끼로 지원병을 받자, 하고 대다수의 국가가 결정했다.
결국 사람들은 블랙 허브를 얻으려 마을을 등지고 군대 집결지로 걸어간다. 가족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중에는 마지막 희망을 품은 채 엉기적 기어나가는 병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병자가 먼 거리를 걸어서 집결지까지 당도할 가능성은 무척 적다. 길가에서 힘이 떨어져 객사할 뿐. 대륙의 모든 가도에서 지금 병자들의 덧없는 행군이 연출되고 있다…….
“인류의 수호고 뭐고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시당초 영주들이 초기에 대응만 잘했다면 영지민들이 흑사병에 신음할 일도 줄어들었겠지요. 세금을 투입하여 블랙 허브를 재배해놨더니, 이제는 병사가 되지 않을 거면 약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합니다. 모든 책임과 피해를 영지민이 입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류라는 이름으로 치장하다니……그만한 개소리도 없습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조건 기사단과 정예병에 블랙 허브를 나눠주었다. 변경백이 영지를 잃고 퇴각하는 가운데 정예병이 거의 탈영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은혜를 배풀어둔 것이었다.
변경백 입장에선 현명한 선택이었겠지. 그러나 남겨진 백성은 어떤가? 인류를 지킨답시고 자신들을 내버린 것이었다. 누구를 위한 인류인가.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국과 변경백이 지키고자 하는 인류라는 것에 백성이 없다면――남은 인류는 하나뿐이다. 바로 귀족정의 국가이다. 왕실이다. 그게 뭐가 인류인가! 웃기지 말라고 백성들은 소리치고 싶겠지.
그래서 영지민은 간단히 주인을 인간귀족에서 마왕으로 갈아탔다.
변경백이 주지 않은 블랙 허브를, 우리 제6군단은 나의 주도 아래 분배했다. 쿤쿠스카 상회는 마계의 약초밭과 계약하여 작년부터 블랙 허브를 대대적으로 키웠다. 나는 상회와 계약한 바에 따라 전체 블랙 허브의 5%에 대해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그걸 풀었다. 당장 죽을 날만 기다리던 가족이 기사회생한 것이다. 영지민은 우리 군단에 환호했다. 자발적으로 바르바토스 군단장을 백작으로 받아들였다……누가 인류를 지켰는가.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은 입에 발린 명분을 앞세워서 흑세무민할 뿐이다. 내가 너희의 그럴듯한 가면을 깨부셔주겠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닥 먼 미래도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너희처럼 명분을 앞세우는 강자의 긍지를 진흙발로 뭉개주는 것이다. 그때가 무척 기다려진다.
라우라가 내 표정을 보더니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으음. 주군이 무언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
“모함하지 마십시오. 저처럼 언제나 순수하고 밝은 생각만 하는 마왕도 없습니다.”
“방금 주군과 가장 어울리지 않은 단어를 들은 기분이 든다마는, 소녀의 착각인가?”
“착각입니다. 완전히 착각이에요.”
라우라가 훗, 하고 비웃었다. 점점 더 군주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실로 건방지고 불경스러운 신하가 아니고 뭔가. 아무래도 전투가 끝나고 진득하게 침대 위에서 군신의 예를 가르쳐야겠다.
“그르흐크읍――!”
“밀어붙여! 밀어붙여어억!”
드디어 오크 장창병과 제국군 장창병이 맞닥트렸다. 개싸움이었다. 빤히 상대가 장창을 뻗들고 있는데 그 창날의 늪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이 경우, 장창의 길이가 긴 쪽이 당연하게도 유리했다. 창대의 길이나 두께에서 오크용 장창은 인간용 장창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이런 불리함을 뒤집기 위해서 제국군에선 하마(下馬)기사를 대거 동원했다. 랜스 대신 양손검을 잡고 기사들이 장창병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오크의 장창을 오러소드로 무 썰듯 잘라내면서, 어떻게든 아군 장창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들려고 발버둥 쳤다.
이 방법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기사에는 오우거로 대응해야 마땅했지만, 기사가 잽싸게 창대를 자르고 병사와 병사 사이를 누비는 반면에, 덩치가 큰 오우거는 그런 묘기를 보여주기 어려웠다. 제국군은 기사의 활약에 힙입어 오크 장창병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명령을 받은 즉시, 오크 장창병들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죽음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흑기사에 제국군 기사들은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기사들은 허무하게 몸통이 꿰뚫려 절명했다. 열 명의 제국기사가 땅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얼굴을 처박았다.
적군에서 즉시 새로운 기사대가 돌입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오크가 장창을 찔러오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사와 결투하기 위해 용감히 뛰어들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헛수고입니다.”
나는 명령을 내렸다. 잠입하라고. 제국기사가 도착하기 직전에 죽음의 기사는 전원 영체가 되어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제국기사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비겁하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상투어였다.
“최고의 칭찬이네요. 비겁해서 이쪽은 이기고, 비겁하지 못해서 저쪽은 패배한다. 패배의 대가는 휘하 장병들의 떼죽음. 어느 쪽이 미덕일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저들도 진심으로 내뱉는 말은 아닐 터다.……그나저나 주군, 바로 조금 전에 순수하다고 자칭한 사람이 입에 담을 단어가 아닌 듯하다.”
“저는 순수하게 비겁합니다.”
내가 떳떳하게 말했다. 라우라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뭐 어떤가. 세상사가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었다.
기사들은 애꿎게 칼끝으로 그림자를 찍어댔으나 그야말로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고 본연의 임무로 되돌아갔다. 오크 장창병의 창대를 열심히 잘랐다. 그러자 제국군 장창병이 마왕군을 압도하는 듯했지만――.
“다카포.”
내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기분으로 명랑하게 중얼거렸다. 그림자에서 죽음의 기사들이 솟구쳤다. 오크 장창병에 정신이 팔린 제국기사는 다시금 기습을 허용했다. 제국기사들이 열에 뻗쳐 비명을 질렀다. 그같은 광경이 반복했다.
제국기사는 오크들이 자신을 찔러대는 와중에 언제 죽음의 기사가 습격할까 예민하게 신경 써야만 했다. 기사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눈앞으로 수십 개의 장창이 쇄도하는데 발밑까지 주의한다?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오러가 떨어져서 오크의 장창에 타격당하거나, 죽음의 기사한테 살해되었다.
오러라는 게 무한히 유지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짧은 시간 동안에만 오러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오크의 두꺼운 창대를 일도양단하려면 오러를 동원해야만 했다. 제국기사는 오러를 급속도로 소모했다. 오러가 떨어진 기사는 별로 두려울 게 없었다. 제국기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끊임없이 양손검을 휘둘렀다.
제국기사는 과연 위명에 걸맞게 분전했다. 그들의 용맹무쌍에 오크 장창병 대열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딱 5미터.
처음 지점에서 오크들은 5미터 물러섰다. 그 5미터를 위하여 내 전방에서만 제국기사가 오십 명 넘게 죽어나갔다. 간단히 계산해서 기사 열 명이 희생해야 겨우 1미터 전진하는 셈이었다.
제국군이 이곳에 얼마나 많은 기사를 투입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기사 열 명에 1미터 전진은――제국군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만한 교전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