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00화 (100/510)
  • 00100 왕과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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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제국군은 재빨리 공격해왔다. 사역마 정찰 덕분에 우리는 제국군이 어느 지점을 타격하려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곳을 향해 우익의 모든 부대가 집결했다. 한 시간 정도 흐르고 드디어 양군이 격돌했다.

    나와 라우라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정석적으로 오는군요.”

    “정석이기에 강력하니 말이다.”

    먼저 돌격한 것은 역시나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이 이쪽의 전선을 헤집으면, 뒤이어서 보병을 투입하여 결단을 내버리려는 속셈이겠지.

    기사단이 목책과 뾰족한 말뚝이 겹겹이 박힌 우리의 진지로 겁없이 달려들었다. 백 미터 바깥에서 불쑥 안개를 뚫고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기사단의 파도는 과연 무지막지했다. 그들은 전차처럼 밀어닥쳤다. 어찌나 거센지 첫 돌격부터 제1진이 무너질 뻔했다.

    “멍청한 돼지 새끼들! 창을 들어! 창을 들라고! 육봉으로 인간년들 강간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쫄보처럼 떨어대고 앉았냐, 돼지 새끼들아!”

    리저드맨 부사관이 고레고레 소리 지르면서 오크 병사들의 궁뎅이를 빵빵 걷어찼다. 오크 몇 마리가 넘어졌다. 그들은 헐레벌떡 투구를 고쳐쓰고 장창을 붙들어 잡았다. 마왕이 명령을 전달한다지만 그렇다고 몬스터들이 갑작스레 용감해지거나 두려움 같은 감정이 증발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르릅, 그루훕, 그르릅!”

    오크들이 장창을 세웠다. 보통 인간이 5미터에서 6미터 길이의 장창을 쓰는 반면, 힘이 훨씬 좋은 오크병사는 9미터가 넘는 장창을 썼다. 무려 약 10미터에 이르는 장창들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빽빽하게 들어서는 것이었다. 여기에 인간용보다 창대가 두꺼웠다. 아무리 기사가 오러를 써대는 인간병기라 할지라도 이 두터운 가시나무 숲을 뚫기란 쉽지 않았다.

    “크야아아아!”

    물론 괴물 같은 인간이 있기 마련이었다. 한 기사가 일순 오러를 폭발적으로 일으켜서 단 한 번의 칼질로 장창 예닐곱 개를 파괴했다. 순식간에 틈이 생겨버렸다.

    “제일 공훈자는 나, 산돼지 기사단의 프리드리히다!”

    기사가 함성을 내지르면서 그곳으로 말머리를 치박았다. 곧바로 뒤에서 대기하던 오우거가 급히 달려들었다. 쿠웅, 하고 기사의 랜서와 오우거의 도끼가 부닥쳤다. 오우거는 기사를 대비하여 일부러 거대한 도끼를 장비했다. 웬만큼 두꺼운 강철도끼가 아니고서야 기사의 오러에 파괴되기 때문이었다. 기사의 돌격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잠시의 틈으로 충분했다.

    “크르릅, 그루후웁!”

    제2진으로 대기하던 오크병사들이 일제히 몰려와서 장창을 찔렀다. 기사가 탄 말을 향하여. 이 세계에서 기사들은 특별히 몬스터의 피가 섞인 말을 양성하여 타기에, 기사전용의 군마는 이미 하나의 훌륭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장창이 무수로 쏟아지는데 몬스터 핏줄의 군마인들 버틸 수 없었다. 장창이 넙적다리를 꿰뚫고 나와 쑤욱 허리살을 찔렀다.

    ─ 이히이잉!

    말이 날뛰면서 눈앞의 오우거한테 머리를 박았다. 평범한 말보다 덩치가 두어 배는 큰 군마가 전력으로 박치기를 하니 오우거의 자세가 약간 흐트러질 정도였다. 그것이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대는 강철일진저! 노바이코피아(novae copiae)!”

    일정 간격마다 배치된 마법사가 달려와서 서둘러 마법을 영창했다. 창칼의 절단력을 일시적으로 대폭 강화하는 술식이었다. 마법에 힘입어 오크 장창병들이 다시 한번 힘차게 창끝을 내밀었다. 그것들은 기사의 가슴팍이나 허리를 뚫었다. 그중 한 개가 군마의 머리통에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피가 낭자했다.

    “으, 크흐읍!”

    오러로 신체가 강화된 탓일까. 기사는 가슴과 허리에 창날이 박혔음에도 장검을 빼들어서 창대를 베었다. 무시무시한 생명력이었다. 그러나 분투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전사했다. 그가 장창을 상대하는 사이에 오우거가 도끼를 휘두른 것이었다. 도끼날은 기사의 투구를 머리통째로 분쇄했다. 사방에 뇌수가 튀었다.

    “흐르아아아아!”

    오우거가 포효했다. 강한 사냥감을 잡아내고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과시했다. 오크 장창병들이 그에 호응하여 소리를 질렀다. 제1진에 뚫린 틈은 어느새 제2진의 예비대가 메꾸고 있었다. 진지는 굳건했다. 저 기사는 제국군에서 가장 처음으로 마왕군의 제1진을 돌파했다는 명예를 얻었으나, 대가는 결코 값싸지 않았다.

    첫 번째 기사단 돌격이 그렇게 끝났다. 진지 이곳저곳이 허술해졌다. 다행히도 완전히 돌파당한 구역은 전무했다. 기사단이 말머리를 돌려 되돌아가자 몬스터들이 벌써 승리한 것처럼 함성했다.

    “힘차게 돌격한 것치고 꽤나 가볍게 물러가네요.”

    나는 제4진에 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죽음의 기사들은 이미 제1진에 영채로 잠복해 있었다. 아직 그들이 나설 때가 아니었다. 덕택에 내가 할 일도 없었다. 우리편의 분투를 기도하며 이렇게 바라봐주는 수밖에.

    “첫 번째이지 않았는가. 아마 우리쪽에서 어떻게 방비하고 있는지 알아볼 겸 시험삼아 돌격한 것이겠지. 이제부터 혹독해질 것이다, 주군.”

    나는 라우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돌격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은 적 기사단이 위력정찰의 목적을 가졌고, 또한 전방에 무수히 많은 목책과 말뚝을 박아놓은 탓이었다. 기사들은 목책과 말뚝을 제거하거나 피하기 위해서 속도를 약간이나마 줄여야만 했다. 그것이 기사단의 돌파력을 제법 상쇄했으리라.

    “뭐하냐, 개새끼들! 좆 빠지게 튀어나가지 않고!”

    “농땡이 피우다 우리 죽여버릴 속셈이지, 앙!?”

    부사관들이 고블린에게 발을 놀렸다. 고블린은 오크 뒤에 숨어 있다가 부사관이 독촉하자 얼른 앞으로 뛰었다. 한꺼번에 백여 마리의 고블린이 뛰쳐나갔다.

    “케르르륵!”

    “케릅, 케흐르륵!”

    고블린은 세 명씩 한 조를 이루었다. 한 명은 말뚝들을 지게에 졌고, 한 명은 말뚝을 건네받아 땅에 꽂았고, 나머지 한 명은 망치를 크게 휘둘러서 말뚝을 땅 깊숙이 박아넣었다. 이번 전투에서 공병(工兵) 역할을 맡은 고블린이었다. 말뚝 박는 소리가 난데없이 전쟁터를 가득 메웠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금 전방에 뾰족한 말뚝들이 주르륵 늘어섰다. 고블린들은 할 일을 다하고 뛰쳐나갔을 때만큼, 아니 뛰쳐나갔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지에 복귀했다.

    “훌륭하다.”

    라우라가 감탄했다.

    “완벽한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블린을 운용하여 말뚝을 박아, 기사단의 돌파력을 최대한 상쇄한다. 오크 장창병들로 기사단에 대항한다. 혹여 전선이 뚫릴 경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오우거가 급히 출동하여 일단 저지. 제2진의 오크가 합류하여 포위, 마지막으로 마법사가 처리를 도와준다……제파르 장군은 실로 유능하군.”

    “음. 공격보다 방어에 특화된 분이지요.”

    내가 게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는 서열 제13위의 벨레드와 유형이 정반대였다. 벨레드가 무지막지한 무투파라면 제파르는 전술가, 그것도 방어전의 귀재였다. 제파르가 상위 마왕에 등록된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간단했다.

    마왕성이 빌어먹게 공략하기 어려웠다.

    상위 마왕일수록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마왕들이 각자 총애하는 몬스터의 종류가 고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에는 언데드 몬스터밖에 없다. 그래서 보스 몬스터인 바르바토스를 잡기는 힘들어도, 마왕성 자체를 돌파하기란 제법 쉽다. 언데드 몬스터에 극도로 효율이 좋은 성녀들을 끌고 가면 되니까. <던전 어택>에서는 먼저 상대 마왕의 유형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공략조를 짜야 한다.

    그런데 제파르는 딱히 총애하는 몬스터가 없다. 전혀.

    10위권 마왕 중에 오크병사를 쓰는 마왕은 저 양반밖에 없다. 다른 마왕들은 명색에 10위권이라 다들 오크보다 두 급수는 높은 몬스터 위주로 부대를 구성한다. 심지어 고블린까지 있다! F급 몬스터인 고블린이! 오크든 고블린이든 제파르는 각 몬스터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배치했고, 난공불락의 마왕성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매우 짜증난다. RPG 류에서 플레이어가 NPC보다 유리한 이유가 무엇인가. 플레이어가 상성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슬라임이 나오면 불계열 스킬을 쓰면 되고, 불도마뱀이 나오면 물계열 스킬을 쓰면 그만이고. 반면에 저쪽에는 종족의 속성과 일치하는 기술밖에 쓰지 못한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제파르는 몬스터 종족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플레이어의 속성적 유리'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플레이어는 벙찌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열나게 머리 쓰면서 전술 대 전술의 싸움으로 몰고가는 방법밖에 없다. 아니면 레벨을 넘사벽으로 키우든가. 뭐, 달리 말해 마왕성을 돌파하기만 하면 정작 보스 몬스터 제파르는 쉽사리 죽일 수 있지만…….

    “저것 봐라. 기사단이 되돌아왔다.”

    라우라가 손가락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새로운 말뚝들에 당황한 모습이다. 첫 번째 돌격과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군.”

    그러했다. 기사단은 용감히 돌격했고, 몇몇 군데를 실제로 돌파했다. 그러나 말뚝 탓에 기사들은 아무래도 서로 간격이 떨어진 채 돌격해야만 했고, 설령 돌파에 성공할지라도 틈새로는 한 명이나 두 명 정도의 기사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오우거의 긴급출동, 제2진 장창병의 원호, 마법사의 강화마법. 방금 전과 똑같은 시나리오가 두 번째 기사단 돌격에서 재현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 번째 돌격에서는 타이밍을 잡지 못해 대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오크 투창병과 고블린 투석병이 매섭게 창과 돌을 날렸다. 오러를 익힌 기사는 자신의 눈앞으로 날아드는 창을 칼질 한번으로 튕겨냈다.

    그러나 시야 바깥에서 우연히 날아드는 것까지 잡아챌 수는 없었다. 몇 개의 창이 군마에 명중했다. 한참 기세 좋게 달리던 군마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기사가 속절없이 낙마했다. 무섭게 내달린 만큼 기사는 낙마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낙마해서 죽거나 다친 기사가 내 눈에만 여섯 명이 잡혔다. 참고로 어떤 기사 한 명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터벅터벅 제국군 쪽으로 뛰어가는 것 아닌가. 나는 어이없어서 그가 안개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무슨 몸이 강철로 이루어졌나…….

    제6군단 우익은 두 번째 기사단 돌격을 완벽하게 방어했다.

    몬스터 부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올라갔다. 안개 탓에 아군의 진형도 백 미터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방천지가 몬스터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고블린 공병들이 신이 나서 다시 말뚝을 박으러 출동했다.

    그때 군악단이 음악을 울렸다. 뿔피리와 꽹과리 등으로 이루어진, 고약하기 그지없는 군가였다. 요컨대 몬스터의 군가로는 딱 제격이었다. 오우거, 오크, 고블린, 리저드맨, 호족, 묘족,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들이 땅을 힘차게 밟으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종족과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군가를 꽥꽥 소리쳤다. 그것은 기괴하고 음산한 합창 교향곡이었다.

    제국군의 세 번째 공격은 기사단 돌격이 아니었다. 궁기병들이 재등장했다. 아마 내 부대가 미처 잡지 못하여 놓쳐버린 궁기병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멀리서 화살을 쏘고 퇴각하기를 반복했다. 기사단 돌격에 대부분의 목책이 무너진지라 몬스터는 화살세례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내가 혀를 찼다.

    “저런. 죽음의 기사를 다시 활용해야 할까요?”

    “아니다. 주군, 저쪽을 봐라.”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던 궁기병 전술은, 그러나 곧바로 좌절되었다. 몇 시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때는 마왕의 부대들이 넓게 퍼져 있었으나 지금은 집합했다. 즉 오우거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마법사까지 합류했다.

    마법사가 전방에 발광 마법을 걸어 시야를 넓히자 궁기병의 모습이 뚜렷하게 비추었다. 그 기회를 산의 주인은 놓치지 않았다.

    “크라알라!”

    오우거가 투창병의 창을 냉큼 뺏어들더니 궁기병을 향해 홱 던졌다. 창은 총알처럼 날아가서 궁기병의 몸통을 꼬치처럼 뚫었다. 그러고도 속도가 죽지 않아 창은 시체를 꽂고 한참이나 멀리 날아갔다. 그 광경이 전선 전체에서 연출된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궁기병들은 손실을 견디다 못해 꼬리를 말고 후퇴했다.

    오우거의 포효가 전장에 길게 울려퍼졌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은 모르는 진실 하나.

    Q. 제파르는 왜 마왕치고 저리 특이하게 몬스터를 운용하나요?

    A. 제85화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제파르를 골리면서 한 말인데요.

    “내가 말했잖아, 병신 같지만 멋있다고. 깔깔! 멋있긴 해도 병신은 결국 병신이거든. 아 완전 대차게 말아먹었지 뭐야. 너희 그거 아냐? 이 새끼가 그때 거기서 병력을 죄다 꼴아박아서 지금까지도 오우거가 스무 마리밖에 없어요. 서열 제16위 새끼가 오우거 스무 마리리야!”

    제파르는 제6차 월맹군, 그러니까 비교적 신세대 마왕이던 시절에 엄청나게 큰 전술적 착오를 했습니다. 대륙에서 세 번째로 강력하다는 브르타뉴 왕국 근위기사단 <초록장미 기사단>에 오우거로 닥돌한 것입니다. 기사단이 돌파력이 강해봤자 오우거만 하겠어! 하고 실로 젊은 마왕답게 호기로이 전군 돌격을 외쳤습니다만.

    바르바토스가 얘기했다시피 결과는 폭망. 오러를 활용하고 몬스터 핏줄의 군마를 타는 기사들한테 발렸습니다. '절대로 회전에서 기사단과 돌격으로 맞붙지 마라'라는 병법서의 교훈에다 제파르 본인의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입은 피해로 제파르는 거의 재기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당연히 있는 몬스터 없는 몬스터 바리바리 끌어다가 마왕성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즉 제파르가 방어전의 귀재가 된 까닭은 그냥 오우거 같은 고급 몬스터를 싸그리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패배는 승리의 어머니라더니, 아름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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