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99화 (99/510)
  • 00099 왕과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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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기병, 후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일선 부대의 보고를 접했다. 제국군에는 하위부대와 상위부대 사이로 연락장교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이들 덕택에 제국군은 부대들 간에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었다.

    “마왕군이 반격 태세에 들어갔는가?”

    “아닙니다, 각하. 소규모 부대를 운용하여 궁기병을 각개격파했습니다.”

    장교가 딱딱하게 굳어서 대답했다. 지금 군막사에는 프리츠 로젠베르크 변경백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1황위계승권자인 루돌프 합스부르크 황태자, 미카엘 콜로브라트 장군, 요한 쿠투소프 장군, 페르디난트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제국군의 최고지휘관들이 자리했다.

    연락장교 입장에서 실로 기라성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아군의 철수를 보고해야만 했다.……어쩌면 형편없는 보고에 분노하여, 예컨대 황태자가 연락장교인 자신에게 발길질 세례를 퍼부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앞으로 평생 '황태자 전하에게 밟힌 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군문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출세는 물 건너가는 셈. 연락장교는 몬스터 놈들에게 패배한 아군의 궁기병이 원망스러웠고, 무엇보다 이 사실을 자기가 보고해야 한다는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그것 보시오, 백작!”

    루돌프 황태자가 큰소리로 말했다.

    “소극적인 작전안은 쓸모없다고 누누이 경고하지 않았소외까. 미래에 과인의 기사가 될 동량들이 땅바닥에 버려진 셈이 되어버렸군. 인재가 곧 국력이오. 혹여 백작은 병사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 아니오?”

    “송구하옵니다.”

    변경백이 황태자를 향하여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자세였으나 동작에 절도가 배어 있었다. 황태자는 너그럽게 사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손을 저었다. 허나 속으로는마뜩치 않았다.

    ‘제국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바퀴벌레 놈.’

    루돌프 황태자는 강력한 절대군주를 꿈꾸었다. 언젠가 황제로 등극하여 변경백을 모조리 폐지하고자 했다. 그에게 변경백이란 지나치게 막강한 군권을 지닌 잠재적 반역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나의 군주, 하나의 상비군, 하나의 국가――절대군주로 향하는 도정에 지방군벌 따위 방해를 줄 뿐이었다.

    황태자의 속내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었다. 비단 그의 일그러진 얼굴만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하기에 앞서 황태자는 중앙군을 앞세우지 않고, 변경백으로 하여금 먼저 군대를 움직이라 명령했다. 심지어 용병을 뒤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봐도 변경백의 군대를 소모시키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변경백은 당연히 군무에 정쟁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매우 상식적인 논리를 들어 반박했다. 이에 대하여 황태자 및 중앙군 소속 장군들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싫으면 군 지휘권을 넘겨라.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머리가 아팠다. 어쩔 수 없었다. 총사령관인 만큼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저들의 논리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1만에 불과한 변경군이 2만의 중앙군과 2만의 용병군 사이에서 우두머리로 행세하려면 어느 정도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현재 마왕군 우익에 맞서서 배치된 보병과 기사단은 순전히 변경군 1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변경백의 과감한 결단에 일단 황태자와 중앙군 장수들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디 한번 네가 얼마나 군을 잘 지휘하는지 관람해보겠다는 태도였다.

    변경백이 연락장교에게 말했다.

    “궁기병은 전원 기사의 시종으로 이루어졌다. 쉬이 패배하지 않았을 터. 마왕군이 어떤 병종을 동원했느냐?”

    “검은 갑주를 입은 몬스터였습니다. 사람 키보다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죽음의 기사로군.”

    변경백은 할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떠올리면서 즉각 연락장교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가 침음을 삼켰다. 변경백의 조부 역시 변경백이었고, 지난 수백 년 동안 마왕군에 맞선 전투를 일일이 적어서 남겼다. 거기에선 ‘백오십 년 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죽음의 기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가를 세세하게 묘사했다. 변경백은 선대의 기록물을 어릴 때부터 수십 번 반복해서 읽었으므로 죽음의 기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다른 장군들이 흥미가 동하였다. 죽음의 기사. 무척 생소한 이름이었다. 다만 체면이 문제여서 누가 섣부르게 질문할 수 없었는데――변경백이 아는 몬스터를 자신은 모른다고 내비추면, 장군 개인의 체면이 아니라 중앙군의 체면이 문제되었다――마침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주변 분위기를 능숙하게 읽어냈다.

    용병대장이 물었다.

    “총사령관 각하. 죽음의 기사란 몬스터는 처음 들어보는군요. 대륙의 구석을 죄다 돌아본 소장으로서도 생소합니다. 어떤 몬스터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불사의 몬스터, 그중에서도 영체(靈體) 몬스터라네. 오로지 7서클 이상의 흑마법사만이 사역할 수 있다고 알려졌지. 가히 일당백의 무력을 갖고 있어서 개체 하나 하나가 최정예 기사와 맞먹는다네.”

    “어이쿠.”

    용병대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꽤나 무시무시한 놈들이로군요.”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의 근위기사대라고 보면 된다네. 아직까지 바르바토스가 아닌 마왕이 죽음의 기사를 부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 마왕군은 우익도 만만치 않게 견고한 듯하네.”

    “호오. 그렇다면 적의 우익에 마왕 바르바토스가 있다, 그렇게 판단해도 좋을련지요?”

    변경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네. 소규묘의 별동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아하니 극히 적은 숫자만 배치되었겠지. 연락장교, 별동대의 규모에 대해서 보고하게.”

    “예. 다소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궁기병 부대들이 맞닥뜨린 몬스터는 약 예순 마리에 이르렀습니다.”

    “예순 마리라.”

    변경백이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예순 마리, 많은 병력이 아니었어도 대단히 적은 숫자 또한 아니었다. 죽음의 기사는 본드래곤을 제외하자면 단연코 마왕군에서 가장 강력한 병종. 그런 몬스터가 마왕군 우익에 배치되어 있었다.……즉, 마왕군에게 우익이야말로 가장 허약한 약점이며,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마왕 바르바토스가 근위대의 일부까지 추려냈다는 얘기이리라.

    예순 마리나 보충해야 할 정도라면 우익이 예상보다 훨씬 허약할지 모르겠다고 변경백이 생각했다. 궁기병을 쓰는 유인책이 실패했을지언정 전황이 반전되거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보너스가 사라질 따름이었다. 이쪽이 유리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꿀꺽.

    연락장교가 침을 삼켰다. 죽음의 기사 예순 마리, 이것은 일선부대 지휘관이 잔뜩 숫자를 과장한 것이었다. 현재 마왕군의 우익을 상대하는 제국군 1만은 변경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전체를 통솔하는 사단장은, 변경군이 아니라 중앙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변경백이 총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앙사령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자, 그를 대신하여 중앙군 장수가 파견된 것이었다.

    여기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병폐가 노출되었다.

    단탈리안이 예측했다시피, 제국군의 상층부는 두 패로 나뉘었다. 중앙군과 변경군. 이들은 서로 전투에서 지휘권을 잡으려고 사사건건 다투었으며, 이것은 일선의 현장지휘관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행보하게끔 만들었다.

    중앙군 장군의 실패는 중앙군의 지휘권 약화로, 변경군 장군의 실패는 변경군의 지휘권 약화로 이어졌다. 따라서 궁기병 전술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단장은 자신이 무능해서 패배한 게 아니고 적군이 지나치게 많아서 패배한 것이라고 어느 정도 과장을 섞어서 보고했다.

    애시당초 명목상의 총사령관과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따로 있다는 것부터 문제였다. 한 몸에 머리를 두 개 달아버린 셈이니 군대가 잘 돌아갈 리 없었다. 지독하게 효율이 떨어지는 체계가 이루어진 까닭은, 만일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훈은 명목상의 총사령관 루돌프 황태자가 독식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면 책임을 실질적인 총사령관 변경백한테 전부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을 프린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또한 꿰뚫고 있었다. 그는 가문의 입장을 고려하여 루돌프 황태자한테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지금의 행태에는 약간이나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장 가증스러운 자는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자 곁에 앉아서 호시탐탐 군지휘권을 노리는 중앙군 장수들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의 귀족들은 죄다 바퀴벌레 같은 작자뿐이로군.’

    중앙군은 변경군을, 변경군은 중앙군을 바퀴벌레로 취급해버리는 사태가 연출되었다. 중앙군은 황태자가 친정하는 전투에서 일개 변경군이 총사령관의 감투를 썼다는 사실, 심지어 자기 영지를 꼴불견스럽게 잃어버린 패장이 지휘권을 잡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변경군은 대(對)마왕군 전투에 있어 누구보다 전문적인 자신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깔보는 중앙군의 행태에 분노했다.

    이 와중에 황태자는 군주의 권력을 강화한답시고 중앙군 장군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일이 지휘권에 간섭하려 들었고, 용병대장은 중간다리가 되어 각 장군 간의 신경전을 최대한 무마해보았으나 마지막에 가선 자신의 고용주인 황태자한테 이끌려다녔다.

    결과는 단순했다.

    “소장은 처음부터 불만이었소. 투석기로 찔끔찔끔 공격한다는 것부터가 잘못이오!”

    “이제와서 무슨 소리외까. 우리 모두가 지난 회의에서 동의한 일 아니오.”

    “투석 공격은 적군뿐만이 아니라 아군의 움직이까지 제한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멈추고――.”

    “궁기병은 실패했소, 이는 명백하오.”

    “그러니까 근위기사단을 투입하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우선 회의가 무척 길어졌다. 몇 시간이고 회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물론 총사령관인 변경백은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길게 회의해봤자 아군에 득이 될 게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으며.

    “알겠습니다. 우익은 이대로 1만이 단독 공격하기로 하지요.”

    회의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모든 작전의 책임을 자신이 홀로 뒤집어 쓰기로 결심했다.

    “크흠.”

    “뭐, 그렇게 합시다. 흐흠.”

    황태자와 중앙군 장군들은 마뜩치 않게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총사령관이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겠다는데 반대 의견을 낼 명분이 마땅히 없었다. 물론 총사령관의 단독 공격이 혹여 실패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들개처럼 달려들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을 물어뜯을 태세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우외환을 맞이했음에도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가 강경하게 나서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절대적인 자신감!

    그는 자신의 군대를 믿었다. 그리고 마왕군 중에서 우익이 제일 허약한 지점이라는 사실 또한 파악했다. 강한 아군이 약한 적군을 타격한다, 그렇다면 패배할 리가 없노라고 변경백은 확신하고 있었다.

    “자네는 명령서를 들고 즉시 출동하게.”

    “예, 총사령관 각하!”

    사령부의 명령은 곧바로 전방의 제국군에 전달되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친필로 서명한 명령서였다. 황제가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이상,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이보다 무거운 명령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중앙군 소속의 키엔마이허 사단장이 즉각 예하 장병에게 큰소리로 호기롭게 소리쳤다.

    “전군, 전진하라!”

    8천 5백 명의 보병과 1천 5백의 기사단이 짙은 안개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마왕군 우익이 며칠에 걸쳐서 정성스럽게 구축해놓은 군진이 자리했고, 그 너머에는 4천 마리의 몬스터 부대가 대기했다. 제국군에 내려진 명령은 반드시 적의 우익을 돌파하라는 것이었고, 마왕군에 내려진 명령은 기필코 우익을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제국군의 창날과 월맹군 제6군단의 방패, 폰 로젠베르크의 공세와 서열 제16위 마왕 제파르의 고수방어가 맞붙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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