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98화 (98/510)

00098 왕과 장군  =========================================================================

“이리야아!”

“워어, 워어!”

우리가 엎드린 곳에서 채 이십 미터가 떨어지지 않은 곳을 궁기병들이 내달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 다소 요란하게 소리질렀는데, 부대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상대방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충돌사고가 일어나기 십상이니까.

기마병들이 나와 라우라를 지나쳤다. 그들은 측면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전방을 주시하는 것만으로 이미 그들은 집중력을 전부 소진하고 있을 터였다.

야간 전투가 되도록 지양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인간의 오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이다. 시각이 봉인된 채로 목숨을 위협받으며 전투에 나선다, 이것이 병사 개인한테 얼마나 심력을 소모하게 만드는지.……어느 군대가 야습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정예병임을 증명하며, 심지어 운용하기 까다로운 궁기병을 야습에 동원한다는 것은 그들이 징집병 따위가 아니라 전문군인임을 뜻한다.

무슨 상관인가.

전문군인이라 해서 목뼈가 부러져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내가 말없이 오른손을 꾸욱 움켜쥐었다. 어떤 정해진 신호가 아니었다. 단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 동작.

그러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땅바닥에서 어두운 것들이 스멀스멀 솟아나왔다. 마치 그림자로 이루어진 점액질 같았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흑기사의 형체를 이루었는데, 빈틈없는 갑옷으로 무장했음에도 여전히 몸의 반절쯤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주변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압도적인 사기(死氣)에 귀뚜라미조차 숨어들었다. 열두 명의 흑기사. 그들은 안개에 휩싸인 밤 그 자체였다.

저것들을 죽여라.

죽음의 기사들이 숨결을 뱉었다. 지독히 차가운 숨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생체활동의 일환으로 내쉬는 숨처럼 따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데드 몬스터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마나, 그것의 잔재였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흑기사들이 차갑게 살기를 가다듬고 있음을.

지금이다.

궁기병들이 내 부대의 군진에 사격을 가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병종이나 공격 직후에 가장 허약했다. 기마병들이 말머리를 돌려 반전하는 그때, 죽음의 기사들이 탄환처럼 빠르게 질주하여 그들을 덮쳤다. 단 일격이었다. 열두 명의 흑기사는 열두 명의 궁기병을 일도양단했다. 궁기병들은 애마와 함께 통째로 두짝으로 갈라졌다.

“어, 어엇――.”

운 좋게 첫 공격의 대상으로 선점되지 않은 궁기병 몇 명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두운 탓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을까. 그들이 비명을 지를 틈은 없었다. 죽음의 기사들은 당연하게도 칼을 휘두른 다음에 또 휘둘렀으며, 이격째에 나머지 궁기병 전원이 죽어나갔다.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궁기병 소부대가 격멸됐다.

─ 그오오오.

죽음의 기사들이 대검을 늘어트리고 내쪽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것인가? 우리의 적은 이것으로 끝났는가? 녀석들은 그렇게 불평하고 있었다.

고위 몬스터답게 녀석들은 일단 형식적으로 내 부하였으나 시도때도 없이 자존심을 세웠다.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해야 할까. 내 마왕 레벨(E)에 비하여 몬스터 레벨(A)이 지나치게 높은 탓에 이쪽을 깔보는 것이었다.

뭐, 아무튼 명령은 들으니까 괜찮았다. 모든 몬스터와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교감을 나눌 필요는 전혀 없었다. 블링이나 요정들과 저들은 달랐다. 죽음의 기사들은 강했다. 그거면 됐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우리는 신속하게 다른 곳의 궁기병 부대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두 명의 흑기사와 열 마리의 요정을 이끌면서 이동했다. 세 번 정도 접전을 펼친 결과, 역시나 궁기병은 아무리 많아봤자 마흔 명 이상으로 몰려다니지 않았다. 그 정도 숫자는 내쪽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궁기병 부대를 솎아냈다.

“어이, 큰일 났네! 적들이 반격에 들어갔다고!”

말을 타고 궁기병들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내가 나타나자 궁기병들이 경계했다.

“누구냐? 소속을 밝혀.”

“프리데리츠. 레프하임 경의 시종이라네.”

방금 처치한 군인의 이름이었다. 죽이기 전에 상태창을 통하여 신분을 알아냈다.

“이보게들, 우리 부대는 지금 전황을 알려주려고 한 명씩 나뉘어서 여름날 개새끼처럼 뛰어다니고 있네. 몬스터 놈들이 드디어 발정이 나서 무작정 돌격하기 시작했거든.”

궁기병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서로 쳐다보았다. 일단 인간처럼 생겼고, 인간 전용의 갑옷을 입었으며, 합스부르크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나를 보고 의심이 적지 않게 사라진 듯했다.

“허나 우리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도…….”

그때였다. 영령의 상태로 궁기병들 바로 뒤편까지 접근한 죽음의 기사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솟구쳤다. 말들이 놀라서 앞발을 들어올렸다. 궁기병들이 당황해하며 허리춤의 칼을 뽑으려는 순간, 그보다 빠르게 흑기사의 대검이 날아들었다.

붉은 피가 공중에 튀었다. 머리통을 잃은 시체들이 갸우뚱거리다가 이윽고 힘없이 마상에서 떨어졌다. 털썩, 털썩, 하고 시체가 차례대로 풀밭에 고꾸라졌다. 허리가 자유로워진 군마 몇 마리가 안개 저편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대여섯 마리의 말들은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프르르 투레질을 했다.

“주군, 계속해서 휘몰아쳐야 한다.”

“동의합니다.”

라우라와 나는 말을 한 마리씩 잡아탔다. 궁기병이 죽음의 기사한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이상, 기습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느니 차라리 최대한 빠르게 적들을 해치워나가는 것이 현명했다.

“기사들이여, 들으라!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나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어 그대들이 불만에 차 있다는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이다!”

내가 호기롭게 일갈하고는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자존심은 뒷전에 밀어넣어라. 승리하지 않은 병사가 논하는 명예일랑 개밥으로나 줘버려라. 그대 자신의 진정한 의무를 위해, 지금도 적들의 서슬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을 아군을 위해 검을 휘두르라! 그것조차 못한다면, 너희를 나에게 하사한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 그오오오오.

내 외침에 흑기사들이 불만스럽게 포효했다. 녀석들은 명백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말에 납득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었다. 너희는 잠자코 내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을 모시다가 갑작스럽게 서열 제71위 쩌리를 받들게 되어 불만스럽겠지. 알게 뭐냐. 바로 그 서열 제8위와 승부를 해서 이긴 사람이 나 단탈리안이다. 감정상의 불복 따위 배려해줄 만큼 전장은 녹녹하지 않다. 그건 전투의 프로인 너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영체화 할 필요도 없다! 달려라!”

나는 군마를 몰고 다음 지점으로 달려갔다. 라우라가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 양옆으로 흑기사들이 초인적인 빠르기로 뒤따랐고, 요정들이 날아왔다. 곳곳에서 사역마들이 공중으로부터 나에게 적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곧이어 우리는 한 무리의 궁기병 부대로 치달았다.

“마왕 단탈리안이 여기 있다!”

궁기병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빠르게 화살을 장전하여 직사했다. 놀라운 반응 속도였다. 나는 요정들로 하여금 바람마법을 일으키게 하여 내 전방에 일종의 바람막이를 형성했다. 쉬시시식,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나와 라우라를 비껴나갔다.

─ 그롸아아아아!

죽음의 기사들은 화살을 몇 발 맞은 모양이었지만, 끄떡없이 달리기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궁기병에겐 화살을 한 번 더 날릴 기회가 없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대검을 휘둘러 제국군의 머리를 쪼갰다. 순전히 힘으로 밀어붙인 일격이었다. 검이 찌르고 휘두르고를 반복하자 순식간에 스무 명 가량의 궁기병이 절단되었다. 마치 전차가 보병을 깔아뭉개는 듯한 기세였다.

“어찌된 것이 허약한 나보다도 느려터졌군! 바르바토스 군대의 훈련이 그리 가혹하지 않았나보지!”

부대 하나가 날아가버린 것을 확인하고, 내심 흐뭇한 마음을 감추며 크게 비웃었다. 흑기사들은 뻔한 도발에도 분노했다. 수백 년 동안 바르바토스와 함께해온 그들로서는 무엇보다도 서열 제8위 마왕의 군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했다.

그때 이곳의 소란을 들었는지 일단의 궁기병 부대가 이쪽으로 쏟아졌다. 지금까지 기습적으로 당한 부대와 다르게 그들은 작심하여 공격했다. 먼저 일제 사격을 가한 다음, 허리춤에서 장도를 빼들어 돌격해왔다.

“마왕이다! 마왕을 격살하라!”

이번에는 규모가 꽤 컸다. 얼핏 보아서 마흔 명 가까이 되었다. 소부대 두 개가 합친 것이든지, 아니면 제법 지위가 높은 장수가 이끄는 부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궁기병에서 자연스레 경기병으로 전환한 병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칼을 치켜들었다. 그중 두 명이 내게 세이버를 휘둘렀다.

그러나 칼날이 나한테 닿는 일은 없었다. 칼이 반원을 그리면서 내 가슴에 부닥치기 직전, 한 개의 대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채애앵,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자루의 대검이 기병의 세이버 두 자루를 한꺼번에 막아냈다. 죽음의 기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대검을 내밀어 날 보호해준 것이었다.

─ 그롸아아!

흑기사는 기병의 칼들을 흘려막고 곧바로 대검을 돌려 휘둘렀다. 대검은 기마병 두 놈의 허리를 일직선으로 베었다. 갑옷이 부서지면서 뜨거운 내장이 터져나왔다. 내 몸에 핏방울이 대거 튀었다.

─ 그오오오.

죽음의 기사가 내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뿐이었다. 바라본다고 해야 할지, 투구 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녀석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기마병 무리로 뛰어들었다. 대검이 새벽공기를 가를 때마다 기병의 턱이 터졌고, 허리가 갈라졌다. 마흔 명으로 이루어진 기마부대가 빠른 속도로 전멸했다.

“후, 후퇴하라!”

“저놈이 대장이다!”

명령조로 후퇴 운운하는 기마병을 향해 내가 소리쳤다. 죽음의 기사 한 명이 투창하듯이 대검을 날렸다. 2미터짜리 투핸드소드가 기마병의 어깨죽지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병사의 오른팔이 팔뚝째로 찢어졌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면서 낙마했다. 미처 낙법을 취하지 못하고 목부터 땅에 부닥쳤으니 십중팔구 즉사했다.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경기병으로는 최고의 중장병인 죽음의 기사를 결코 당해낼 수 없었다. 제국군은 과감하게 접근전을 걸어왔으나 과감함은 단지 과감함으로 그쳤고, 자신들의 용기에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여기는 일단락되었다. 나는 죽음의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음 지점으로!”

약 삼십 분에 걸쳐 우리는 궁기병 열두 부대와 조우했다. 때로는 그들과 접근전을 벌였고, 때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 접근전에서는 그들을 무참하게 격멸했고, 추격전에서는 적당히 놓아주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국군으로 하여금 궁기병 전술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순순히 후퇴해준다면야 굳이 추격할 필요까진 없었다.

전투 와중에 요정들의 바람막이를 피하여 화살 하나가 내 허벅지에 박혔다. 그것이 내가 열두 번의 소규모 접전에서 입은, 유일한 피해였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으나 그뿐이었다. 마왕의 신체는 회복능력이 대단했다. 겨우 이 정도로 죽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에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흐음, 기묘한 불운이로군.

마지막 전투에서는 안타깝게도 죽음의 기사를 한 명 잃었다. 기마부대에 지휘관으로서 진짜 기사가 섞여 있었다. 아마도 궁기병 전체를 통솔하는 지휘관이었겠지. 군기(軍旗)까지 있었으니 확실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군기를 노획하는 것으로써 이번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라우라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병사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 다만 나와 더불어서 죽음의 기사와 요정을 지휘했을 뿐이다. 나 역시 약간 지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대로 물러가주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어림잡아서 이백사십 명에 이르는 병사를 죽였다. 그에 버금가는 숫자의 병사가 후퇴했다. 제국군의 현장 지휘관은 지금쯤 궁기병 전술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겠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에게 보고할 테고. 즉, 우리 제6군단 우익은 그만큼의 시간을 벌게 되었다…….

멀리 지평선에서 해가 밝아왔다. 태양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져서 뿌연 빛깔로 비추기만 했다. 새벽이 되었는데도 시야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적군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궁기병으로 아무리 공격해본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너희가 바라는 회전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제 어떻게 나올 셈이냐, 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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